* * *
양성소 별관, 연구동.
온통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건물 분위기는 숨이 막혔다.
이곳은 양성소 졸업의 최종 관문, 계급 측정을 위한 장소다.
‘이번에 졸업하는 애들은 스무 명 정돈가.’
이번 월말 평가로 졸업 점수를 채운 아이들은 스무 명 남짓.
[마나포말 룸 A]
[마나포말 룸 B]
[마나포말 룸 C]
각각의 팻말이 달린 측정실 앞 복도에, 도착한 순서대로 쪼르륵 앉아있었다.
“와, 내가 졸업이라니. 아직도 안 믿겨.”
내 왼쪽에 앉아있던 젬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가면 모 할 거야, 젬?”
“당연히 용병단 들어가야지! 디에즈(*Dies: 능력자 6계급 중 6번째 서열)로 제일 출세할 수 있는 길이잖아!”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젬. 제미언 트라하는 순식간에 용병단 한 개를 장악하고 유명해질 것이다.
“나, 열심히 할 거야! 나중에 내 용병단을 만들 때까지!”
“고럼, 고럼.”
“벌써 이름도 생각해 놨다?”
“우왕,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지만, 이미 알고 있다.
그녀의 용병단 이름은 <붉은 들개>.
젬의 붉은 들개 용병단은, 3계급 셉티마군보다도 실력이 좋다.
‘그래서 제국군이 토벌대 꾸릴 때 항상 고용하지.’
젬은 곧 돈방석, 꽃길, 명성….
그 모든 걸 다 거머쥐고, 체시어와 틈만 나면 토벌 다닐 예정이다.
“히히. 젬, 넌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해 놓은 용병단 이름 모야?”
“흠, 부끄러운데.”
“먼데, 먼데.”
“리리스의 들개들!”
띠용.
나는 삐끗했다.
“그, 그게 뭐야…?”
“아하핫!”
젬이 부끄러운 듯 코를 쓱 훔치고는 말했다.
“나 너 없었으면 계속 졸업 못 했을 거야. 공부도 가르쳐 주고 같이 시험도 봐 줘서 고마워.”
“너, 너 엄청 쎄잖아, 젬! 나 없어도 졸업했을걸?”
“아냐. 진짜 너 없음 못 했어. 그리고 너처럼 착한 귀족도 처음 봤는걸. 나 평민인데 친구 해 준 것도 고마워.”
“아, 아니….”
“진짜진짜 다 고마워. 내 용병단 이름은 무조건 리리스의 들개들이야.”
“안 돼! 멈춰!”
나는 당황하며 젬의 머리를 가리켰다.
“너, 너 머리 이쁘잖아. 색깔 따서 ‘붉은 들개’는 어때?”
“뭐야. 유치해.”
젬이 질색했다.
“리리스 어쩌구가 더 유치해!”
“헹, 아닌데. 붉은 들개가 더더 유치한데.”
“아니라니까? 체, 체시어!”
나는 호다닥 오른쪽에 앉아있던 체시어에게 S.O.S를 쳤다.
“젬 좀 말려 봐. 얘 작명 센스 완전 이상해.”
“왜? 좋은데.”
“뭐어?”
“그치! 죽이지!”
나는 둘 사이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 나, 나도 리, 리리스의 드, 들개들에 하, 한 표!”
“크하핫! 너도 좋지, 롬? 3 대 1이라고, 리리스!”
젬의 옆에 있던 롬까지.
나는 그냥 생각을 관두고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병단 이름 하나 달라지는 게 뭐 대수겠니….’
이름부터 포스 철철 흘렀던 <붉은 들개> 용병단이 <리리스의 들개들>로 강제 개명 당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헉.”
“와, 도스다.”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뭔가 보니, 측정실에서 계급을 받고 나온 제라드였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색 팔찌가, 가슴팍에는 작은 금장 단추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는 ‘랭크 슬릿’이라고 하는 마도구로 일종의 신분증.
그리고 금장 단추, 저게 능력자 배지다.
“새, 색깔 죽인다….”
젬이 감탄했다.
제라드의 배지와 랭크 슬릿에는 전부, 1급을 상징하는 ‘DOS’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멍하니 제라드를 구경하는데, 왜인지 그가 우리 앞에 와서 섰다.
‘뭐야. 이제 확실히 계급도 받았으니 시비 걸려고?’
예상 계급이 1급이었을 때와 진짜 1급을 받고 나왔을 때는 천지 차이다.
신분도 씹어먹는 계급제.
이 나라는 공작이니 후작이니 하는 신분 위에 계급이 있다.
심지어 슈미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에 1급 도스.
체시어나 젬이 아무리 배짱 있는 성격이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거다.
‘에휴, 시비 걸지 말고 그냥 좀 갔으면.’
생각하는데―
“고맙다.”
“……?”
제라드의 입에서 상상도 못 했던 말이 나왔다.
나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신세 진 건 언젠가 꼭 갚을게.”
그는 우리 조원들과 한 명씩 눈을 맞추며 그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제라드가 앉아있는 체시어를 내려다봤다.
“…미안하다. 전에 했던 말은 잊어 줘. 내가 실수했어.”
“…….”
전에 했던 말? 전에 했던 말이 뭔데!
역시, 나 모르게 체시어에게 시비 걸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체시어는 흔쾌히 턱을 까딱했다.
“그래.”
“기회 되면 다시 보자.”
“제, 제라드! 잠깐!”
나는 떠나는 제라드를 붙잡고 엄지를 척 세워 줬다.
“너 완전 멋지당.”
제라드가 작게 웃었다.
“고마워. 나중에 봐, 리리스.”
“응, 잘 가! 우리 퇴소할 때 또 보자!”
나는 긴 복도를 걸어 사라지는 제라드의 뒤에 계속 손을 흔들어 줬다.
갱생… 된 걸까?
솔직히 체시어가 몸까지 던져 꽃 괴물한테서 구해 줬는데, 감동 안 받고는 못 배겼을 거다.
‘원작의 고구마를 미리 정리했다!’
콩콩, 들뜨는 마음에 심장이 뛰던 것도 잠시.
“리리스 루빈슈타인, A 측정실. 체시어, B 측정실로 들어가세요.”
관리자가 우리를 불렀다.
* * *
마나포말 룸.
능력자들은 계급을 측정하기 위해 이곳을 거쳐야 했다.
연구원, 셀레나 루덴도르프는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마나포말을 점검하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유리관.
이 ‘마나포말’이라는 마도구는, 능력자들이 몸에 지닌 마나의 양을 측정한다.
“아.”
문 열리는 기척.
돌아본 셀레나가 놀라서 그대로 굳었다.
‘이런.’
마찬가지로 놀랐는지, 파란 눈을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작은 아이.
리리스….
‘왜 하필.’
측정실은 세 개나 되건만, 신의 장난인지 뭔지.
“안녕하세요.”
“아, 그래. 안녕.”
셀레나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리리스에게서 애써 눈을 돌렸다.
“입소한 지 한 달 만에 여길 올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구나.”
“네.”
타박타박 가까이 오는 리리스의 걸음 소리에 셀레나가 마른 입술을 훑었다.
“잠시만… 기다리렴.”
“네.”
셀레나는 마나포말을 점검하는 척하며, 일부러 눈을 맞추지 않고 말했다.
“어떻게 하는지는 알지? 여기, 들어가서 아무 마법이나 한 번 쓰면 돼.”
“네.”
리리스가 열린 마나포말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저기….”
“…….”
“…엄마.”
“……!”
셀레나의 눈이 커졌다.
“아! 그, 카일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할게요. 그냥 지금은, 지금 여기에는 우리 둘뿐이니까요.”
“…….”
“시, 싫으시면 그냥… 선생님이라구 부를까요….”
살짝 시선을 내리는 리리스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긴장하고 있었다.
거절당할까 봐.
“…아니야. 편한 대로 부르렴.”
“앗, 네.”
별것 아닌 허락에 아이의 작은 뺨이 금세 붉어졌다.
“엄마, 있잖아요. 혹시… 부탁 하나만, 해 봐도 돼요?”
“무슨?”
“그냥… 물어만 보는 거예요. 꼭 들어달라는 건 아니구, 그냥.”
한 발짝, 다가온 리리스가 유리 위에 작은 손을 붙였다.
눈이 빨개져 있었다.
“저 계급 나오면요, 혹시. 혹시 숨겨주실 수 있어요?”
“뭐?”
“전쟁터 안 나가도 되는 계급으로요. 4급이라구…. 저를, 저를 위해서요. 엄마는 거짓말…, 해 주실 수 있어요?”
“…….”
“카일은… 카일은, 엄마가 카일은 지켜주려고, 전쟁터 안 보내려고…. 그러려고 황제 폐하한테, 저랑 아빠 있는 데 알려주신 거잖아요….”
아이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울먹이는 눈에는 약간의 원망도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기대.
셀레나는 리리스가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계급을 거짓으로 고해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라도 그렇게 해 달라는 거였다.
너도 걱정하고 있어.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어.
―그렇게.
“리리스.”
“네….”
“미안해.”
“…….”
아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셀레나가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넌, 너는 괜찮을 거야.”
아이의 아빠는, 에녹은.
황제가 오랫동안 탐냈을 만큼 강한 능력자다.
딸을 팔아 아들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달리.
“네 아빠가 지켜줄 거야. 너는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어.”
“…어떻게요?”
큰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눈물을 매단 채, 아이는 물었다.
“저 아무것도 안 하는 대신, 아빠는 막… 다른 나라 사람들 죽이고 다니면서요? 그렇게 저를, 지켜줘요?”
셀레나가 숨을 삼켰다.
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죄송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리리스는 끝내 작은 뺨을 타고 또르르 흐른 눈물을 소매로 훔쳐냈다.
그리고 제 손가락 끝에 하얀 불꽃 하나를 피워냈다.
“…….”
착잡한 마음으로, 셀레나는 불이 들어온 마나포말 하단의 계급 측정판을 응시했다.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
계급 측정은 무의미했다. 확인하지 않아도 아이는 도스였다.
흰색, 6급 디에즈.
흑색, 5급 누베노.
녹색, 4급 옥타바.
셀레나는 점점 계급이 높아지는 측정판의 색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미안해.’
청색, 3급 셉티마.
적색, 2급 콰르토.
금색, 1급 도스.
“하.”
셀레나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삐이이이―
오류를 알리는 경고음과 함께, 측정판의 화면이 텅 비었다.
! Error !
마나 미보유
비능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