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크 슬릿뿐만이 아니었다.
내내 하얀 명찰이 달려 있던 체시어의 가슴팍에도 금색 배지가 빛나고 있었다.
“뭐, 뭐야? 도스라고?”
“쟤 6급 아니었어?”
“야, 쟤라니. 기분 나쁘겠다. 조용히 말해.”
주변이 웅성거렸다.
내가 4급 배지를 받고 나왔을 때보다 더 충격받은 분위기였다.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친 나는 호다닥 일어나 체시어의 뒤에 숨었다.
그리고 브루스를 향해 혀를 쏙 내밀어 줬다.
“어, 어떻, 어떻게….”
브루스의 얼굴에서는 이제 아예 색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벌벌 떨며 손가락을 들어 체시어를 가리켰다.
“왜, 왜….”
“손가락.”
체시어가 말했다.
“부러뜨려줘?”
“헙.”
브루스가 재빨리 체시어를 삿대질하던 손을 내려 등 뒤로 감췄다.
나는 또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체시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 모두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바뀐 건 그저 딱 하나.
하얀 명찰이 금색 배지가 되었을 뿐인데….
“…….”
체시어는 저벅저벅 걸어 브루스에게로 갔다. 나도 놓칠세라 그 뒤에 호다닥 달라붙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아, 저, 그… 체, 체시어.”
“…….”
브루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체시어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나는 슬쩍 체시어를 올려다봤다.
‘어이쿠, 무서워라.’
그리고 바로 다시 눈을 깔았다.
정말 화가 났는지 무시무시한 눈빛.
체시어는 브루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봐줄지, 내가 당한 대로 똑같이 겁을 줄지.
브루스는 괘씸하지만, 도스에게 맞으면 많이 아플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죽을지도….
“체, 체시어.”
그건 아니지 싶어 말리려는데―
“얘들아아! 가자!”
“우, 우, 우리 끝났어!”
젬과 롬이 측정을 마치고 흰색 배지를 단 채 나왔다.
아직 복도에서 벌어진 다툼을 모르는 둘은 의아해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화들짝 놀랐다.
“뭐, 뭔 일이래? 너희 둘이 배지 바꿨어?”
젬은 나와 체시어의 배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곧, 브루스와 대치 중인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거 해 볼래?”
체시어가 물었다.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낮았다.
“으, 응?”
그는 뒤에 있던 나를 당겨와 브루스의 앞에 세웠다.
그리고는 말했다.
“꿇어.”
그러자 곳곳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놀라 숨을 삼켰다.
나도 놀라 체시어를 돌아봤다.
“표정이 왜 그래.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
“너 기분 나쁠 때마다 롬 무릎 꿇리고 기어 다니라고 하지 않았어?”
진짜? 듣고 있다 황당해진 나는 브루스와 롬을 번갈아 보았다.
브루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고 롬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춤거렸다.
체시어는 아예 롬까지 내 옆에 세웠다.
“꿇으라고.”
재촉하는 말에 브루스는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있던 전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결국, 브루스가 주춤주춤 나와 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자존심 강한 브루스인데, 우습게도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 하나 없었다. 외려 웃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간 체시어의 심기를 거스를 테니까.
‘나는 진짜 여기랑 안 맞나 봐.’
날 공격하려 했던 브루스를 무릎 꿇리고 있는데도 마음이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입도 열어.”
체시어가 명령했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를 돌아보며 말렸다.
“있지, 체시어. 나 이제….”
“미안해, 리리스. 미안해, 롬. 내가 잘못했어.”
브루스가 시킨 대로 입을 열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브루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 * *
“아니,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럴 수도 있는 거야?”
“대, 대, 대단하다. 그, 근데 나는 체, 체시어 6급 아, 아닐 줄 아, 알았어. 엄청 쎄, 쎄니까.”
교정의 파고라.
젬과 롬은 상상도 못 했던 체시어의 계급에 연신 놀라워했다.
주변을 산책하던 아이들도 전부 배지를 달고 있는 우리를 힐끔거리며 속닥였다.
정확히는 금색 배지를 단 체시어와 녹색 배지를 단 나를.
“브루스 그 자식 표정 봤냐? 무릎 꿇으면서도 막 웃는 거? 리리스가 뭐라 할 땐 맨날 구시렁거리더니!”
젬이 속 시원하다는 듯 말하며 덧붙였다.
“진짜 배지가 좋긴 좋다!”
“제, 젬. 그, 그만 조, 좀 말해.”
“응? 아!”
롬이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 주자, 젬이 나를 보며 손으로 입을 헙 틀어막았다.
나는 막 웃었다.
“하하, 모야. 너희 왜 자꾸 내 눈치 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저, 정말 괘, 괜찮아?”
“응, 롬. 난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그, 그런데 아, 아, 아까부터 마, 말이 어, 없어서….”
“아, 그거는 구냥 모.”
배지를 달고 나서 새삼 또 느낀 이 적폐 계급 사회에, 회의감이 들어서랄까.
“리리스.”
그때, 조용하던 체시어가 나를 불렀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어?”
“응?”
“브루스. 너한테 무릎 꿇린 거.”
“아니? 속 시원하지! 에휴, 나쁜 자식! 걔 나 완전 죽일 생각이었다니깐?”
“…….”
일부러 밝은 척 말하는데도, 체시어는 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었다.
“음.”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브루스는 혼쭐이 좀 나 봐야 돼. 그러니까 모,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구…. 근데 조금 이상하잖아. 이런 거.”
아이들이 전부 나를 주시했다.
“어제까지는 다들 체시어를 무시하다가 오늘은 체시어 얼굴만 봐도 벌벌 떨고 피해 다니구.”
나는 눈을 들어 교정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들 태반은 체시어의 계급을 놀라워하면서 또 무서워했다.
혹시나 지금까지 흰색 명찰을 괴롭혔던 걸 보복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겠지.
“사실 나 지금까지는 잘…, 못 느꼈거든. 계급이 무섭다는 거.”
나는 아빠 딸이고 모두가 나를 도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시당할 일이 없었다.
또 내가 귀족이 된 후로 만난 사람들 거의 주인공의 편이었다.
계급으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선역들.
“우리 집에서 일하는 집사 아저씨랑 하녀 언니들이랑 다 비능력자구 평민인데, 할아버지도 고모도 아빠도 전부, 그 사람들한테 상냥해.”
나는 체시어의 팔을 붙잡으며 덧붙였다.
“쌍둥이 오빠들도 그르치? 우리 오빠들 친구 중에는 2급도 있고 3급도 있고 4급도 있는데, 오빠들은 다 똑같이 친하게 대해.”
“맞아.”
체시어가 동의하자, 젬과 롬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여기 와 보니까…. 와서 또 계급 받고 하니까…. 그냥, 그냥 우리 집 식구들이 특이한 거였구나, 하구 깨달았어.”
“…….”
“다들 우리 식구들 같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리리스.”
“응?”
체시어가 나를 불렀다.
“특이한 거 아니야.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그랬어. 계급으로 사람을 깔아뭉개는 이 나라가 이상한 거니까, 절대 거기에 익숙해지지 말래.”
“그치. 울 아빠 말은 다 맞아.”
“응. 그리고 언젠가, 모두가 너희 집 식구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체시어가 나를 쳐다봤다.
아빠가 벌써 체시어에게 뭔가 얘기를 해 준 걸까? 아니면 우리 아빠가 뭔가 해 내리라고 체시어가 혼자 확신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주인공의 승리로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브루스 무릎 꿇린 거, 신경 쓰고 있다면 미안해.”
“으잉, 아니? 아니라니까? 솔직히 브루스는 한 번쯤 당했어야지! 맞지, 얘들아?”
“고럼, 고럼!”
“나, 나, 나도 이, 이러면 아, 안 되는 거 아, 아는데 토, 통쾌했어. 고, 고마워, 체시어….”
젬과 롬이 거들었다.
픽 웃은 체시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마 걔도 오늘 일로 깨달았을 거야. 고작 배지 하나에 무릎을 꿇어봤으니까.”
“응, 맞아.”
나는 동의했다.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거. 브루스도 느꼈겠지.”
우리는 한참 말없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리리스 루빈슈타인?”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찾은 것은 그때쯤이었다.
“뭐지? 리리스 왜 찾지?”
“어, 어?”
의아해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태연하게 일어났다.
“가따 오께, 얘들아.”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이 4급이 나왔는데 재검사를 안 할 리가.
그러니까 이미 예상한 바였다.
몇 번이고 4급을 띄워주지.
* * *
황제,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은 언제나처럼 집무실 벽에 걸린 대륙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레처럼 대륙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왕국 하나는 올해가 가기 전 사라질 것이다.
충성스러운 신하, 에녹 루빈슈타인의 손에.
“폐하, 라몬입니다.”
보좌관이었다.
기다렸던 보고를 가져왔을.
“어서 들어오게!”
니콜라스는 기쁘게 맞았다.
기특하게도 한 달 만에 양성소를 졸업한 에녹의 딸.
그 아이의 계급을 보고받는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저, 폐하….”
“그래, 이번 달에는 쓸 만한 것들이 좀 나왔나?”
자리에 앉으며 묻자, 보좌관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보고했다.
“이번 달에는 스물한 명이 계급을 받았습니다. 디에즈 아홉 명, 누베노 한 명….”
“라몬.”
보좌관의 말을 자른 니콜라스가 그의 손에 들린 서류철을 향해 손짓했다.
“버러지들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 앞장만 이리 내.”
니콜라스는 그때쯤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제 보좌관이라면, 들어오자마자 에녹의 딸 얘기부터 했을 텐데.
“도스가 몇 명 나왔지?”
“두, 둘 나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에 잠시나마 긴장했던 니콜라스는 안도했다.
이변은 없었다.
도스 둘.
슈미트 공작 가문의 막내아들과 에녹의 딸일 것이다.
“뭐지?”
그러나.
받아든 도스 둘의 명부를 살펴본 니콜라스의 얼굴이 굳었다.
살벌한 반응.
보좌관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었다.
이윽고 명부에 향해 있던 니콜라스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리리스 루빈슈타인은.”
“폐, 폐하….”
서릿발 같은 목소리.
보좌관은 분노할 황제의 앞에 허둥지둥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