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는 벌벌 떠는 보좌관의 등을 무심히 응시하다, 다시 손에 들린 명부를 보았다.
제라드 슈미트.
당연히 도스였을 것이고….
체시어.
이 아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오닉스 후작의 사생아.
그리고 에녹이 데려와 후견하는 소년.
아마도 에녹은 아이가 쓸 만한 재능을 가졌음을 알아봤을 테고, 그래서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내기가 아님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설마 도스일 줄은 몰랐지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들이 아니다.
“내가 대답을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나.”
“폐하….”
니콜라스의 재촉에, 보좌관은 조심히 일어나 서류철에서 명부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스가 아니어도 괜찮다.’
부모보다 능력치가 떨어지는 자식이 나오기도 한다. 가끔 일어나는 이변이다.
‘콰르토여도, 셉티마여도 상관없지.’
군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제국군에 소속되는 3계급까지만.
황제의 권한으로 마음껏 출정시킬 수 있는 계급이기만 하면 된다.
니콜라스는 그렇게, 긴장한 마음을 달랬다.
리리스 루빈슈타인
계급: 4급, 옥타바
그러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이게, 뭐지.”
“…….”
“뭐냐고!!!”
니콜라스가 소리쳤다.
쨍, 쨍, 쨍―!
핏발 선 눈으로 포효하는 그의 기세에 집무실의 유리창이 전부 터져 나갔다.
“큭! 허억!”
웅크리며 컥컥거리던 보좌관이 황급히 제 몸에 마나를 둘렀다.
이렇게 황제가 노할 때면, 그의 곁에 있다가 제멋대로 분출하는 힘에 죽어 나간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폐, 폐하. 부디 고정하십시오. 루빈슈타인 공녀의 계급이 4급 옥타바로 판명되었다 합니다.”
“내가 그런 대답을 듣자고 물은 것 같나.”
“예, 예! 죄송합니다…. 양성소 내의 연구원 전부가 측정을 참관하였고, 세 대의 마나포말로 거듭 공녀의 계급을 측정했다고 합니다.”
“…….”
“저도 보고를 받은 뒤에 놀라 직접 가서 확인하고 돌아온 길입니다.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공녀는….”
눈을 질끈 감은 보좌관이 덧붙였다.
“…4급, 옥타바가 맞습니다.”
니콜라스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껏 생각도 않았던 변수다.
그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이, 고작 4급이라니.
“이게, 이게….”
비척비척 일어난 니콜라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말도 안 된다.
몇 년을 공들여 만들었던 에녹 루빈슈타인의 목줄이었는데.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니콜라스의 눈이 다시금 벽에 걸린 지도로 향했다.
딸의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개가 되기로 약속한 에녹은 이제 마음을 바꿀 것이다.
그 옛날, 치기 어린 소년 시절에도 그랬듯이….
언제나처럼 입바른 소리를 해 대며, 정복왕이 되려는 제 앞길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겠지.
빌어먹을, 쓸모없는 년….
“으아아아악!!!”
리리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니콜라스가 이내 분노에 휩싸여 소리쳤다.
* * *
“헉?”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지금쯤 황제 귀에 내 계급이 들어갔으려나?’
아마 신나게 내 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내가 얼마나 예뻤을까? 우리 아빠의 유일한 목줄이었으니까.
오죽했으면 직접 양성소에도 오고 퍼포먼스도 하면서 나를 둥가둥가하느라 바빴던 황제….
‘꼬시다!’
나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으허어엉. 가지 마아아….”
“리리스, 이제 못 봐?”
“그냥 수업 안 받구 한 달만 더 여기서 놀면 안 돼? 흐잉.”
앨리샤와 다이앤, 미셸이 짐을 싸는 나를 안으며 눈물 콧물 다 쏟았다.
“나두 너희들이랑 헤어지려니까 너무 슬프다.”
4급, 옥타바의 녹색 배지를 단 나를 보고 양성소 아이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맨날 친근하게 달라붙으려다가 태도가 180도 변한 아이들….
말 걸고 싶은데 망설이기만 하다, 내 계급이 생각보다 낮자 눈치 보며 다가오는 아이들….
‘아마 밖에 나가도 비슷하겠지.’
날 대하는 태도만 보고도 사람들을 거를 수 있을 테니 다행이었다.
우리 방 아이들은 내 계급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다가, 곧 헤어질 생각에 마냥 아쉬워만 했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너희도 빨리 졸업했으면 좋겠다. 나오면 우리 집에 초대할게. 와 줄래?”
“당연하지!”
앨리샤가 코를 훌쩍이며 나를 끌어안았다.
“예쁜 선물 많이많이 사서 갈게. 꼭 초대해 줘.”
“나도, 나도!”
“나도~!”
“으히힛, 그래!”
앨리샤가 짐을 싸고 있던 젬을 보며 물었다.
“너도 올 거지?”
“엉?”
“리리스, 젬도 초대할 거지?”
나는 젬의 퇴소도 못내 아쉬워하는 귀여운 앨리샤의 질문에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 다 같이 모여서 맛있는 거 먹은 다음에 밖에 나가서 이쁜 것도 사고 재밌는 것도 보자! 어때?”
“좋아!”
“나도 좋아!”
“꺄아, 기대된다!”
아기 새들처럼 조잘거리는 친구들을 보고 젬이 웃으며 코끝을 쓱 문질렀다.
“그러려면 얼른 다들 졸업이나 하셔!”
“흥, 나도 이백 점만 더 모으면 졸업이거든!”
투닥거리는 젬과 앨리샤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양성소에서의 훈훈한 마지막 날이었다.
* * *
나는 저녁을 두 그릇이나 먹고 통통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체시어와 산책했다.
마지막 식사….
좋았다….
더럽게 맛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양성소 식사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다.
“배지 떼. 왜 달고 다녀.”
체시어는 하루 종일 자랑하듯이 달고 다니는 내 녹색 배지를 보며 말했다.
“왜? 이쁜데.”
“다들 쳐다보잖아.”
과연.
지나가던 아이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오늘 양성소 핫 이슈는 나였다.
당연히 도스 계급일 거라 생각했던 애가 옥타바 배지를 달고 동네방네 휘젓고 다녔으니까.
“체시어.”
“응.”
“혹시 너도 나 쪼끔 낮은 계급이라서 실망했어?”
“뭐?”
체시어가 드물게 얼굴에 표정을 지었다.
이건 좀 귀하네. 그 체시어가 오만상을 찌푸리다니.
“내가 그럴 것 같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지…. 왜 무섭게 인상을 쓰구 그래.”
무섭다는 내 말에 체시어는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는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응?”
“아저씨가 맨날 걱정했거든. 네 얘기만 나오면 한숨 쉬고.”
“아하, 아빠가?”
“응. 다 자기 잘못 같다고 했어. 네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태어나 보니 도스라서 군인으로 살아야 하는 게 너무 미안하대.”
“아빠 잘못 아닌데….”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아저씨 생각은 안 바뀌더라고.”
그랬겠지.
고개를 끄덕이는데, 체시어가 덧붙였다.
“아저씨가 제일 좋아할걸. 전쟁터에 안 가도 되니까 다칠 일도 없고 혹시나 죽을 일도 없잖아. 너는 안전해.”
“히히, 맞아. 그런데 너는? 너는 이제 괴물 잡으러 다녀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아니, 괜찮은 게 아니라 엄청 좋았어. 도스라서.”
“좋았어?”
…의외의 권력욕?
흥미로워하는데, 체시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제 네 옆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사람들이 나 같은 거랑 붙어 다닌다고 네 욕을 하진 않을 거야.”
“…….”
나는 말을 잃고 멍해졌다.
체시어는 왜 이렇게 저번부터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걸까?
‘이거 완전 고백 아냐?’
도스 배지를 받아 좋은 이유가, 내 옆에 있을 수 있어서라니.
“나랑 같이 있자. 계속.”
“으응?”
“네 옆에 항상 있을게. 혹시 누가 너 못 괴롭히게 내가 지켜 줄게.”
나는 진지한 체시어의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정신 차려!’
체시어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냥 순수하게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이걸 로맨스 필터 씌우고 있는 나 자신이 못내 부끄러웠다.
‘에휴, 어떡하지?’
그만 뛰거라.
나는 체시어의 얼굴을 힐끔 보며 콩콩 뛰는 심장을 꽉 내리눌렀다.
‘이건 좀 많이 곤란한데….’
체시어는 곧 우리 가문에 아빠 양자로 정식 입적되어야 한다.
계급은 받았지만, 아직 어린 열한 살.
전공을 세워 작위를 받으려면 한참 멀었고, 그때까지 확실한 울타리가 없어서는 안 되니까.
‘체시어는 곧 내 오빠가 될 텐데 속으로 이렇게 음흉한 마음을 먹으면 어떡해? 멈춰!’
나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근데 나 집에 가도 다들 너처럼 생각해 줄까? 아까 브루스가, 돌아가면 가족들이 나 벌레 취급할 거라구 한 거 있지?”
“그딴 말을 왜 신경 써? 아직도 네 가족을 몰라?”
물론 전혀 신경 안 쓰지. 그냥 화제 전환을 위해 꺼낸 말이다.
“응, 브루스가 바보 같은 말….”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모부였다.
“우와! 안녕하세요, 고모부!”
반갑게 인사했지만, 번개같이 내 앞으로 다가온 고모부는 어째 답이 없었다.
헛웃음을 터뜨리며 내 가슴 위에 달린 녹색 배지를 빤히 볼 뿐.
“고, 고모부…?”
어째 표정이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 나는 덜컥 겁을 먹었다.
고모부는 내 배지를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