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아빠는 내 입이 열리기를 언제까지고 기다려주겠다는 듯 침묵했다.
그리고―
‘와, 어뜩하지?’
난리가 난 내 머릿속은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방심했다!
조제프가 혹시라도 아빠 아닌 다른 줄을 잡았을까 봐 초조해진 마음에 그만….
‘큰일 났네. 아빠는 전에도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 분명히 다짐하지 않았던가.
괜히 나대다가 똑똑하고 눈치 빠른 주인공에게 걸리지 말고, 그냥 한발 뒤에 물러나 있자고.
‘아니, 그런데. 책사를 포섭 못 하면 시작부터 게임 오버잖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음.”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몬 소리야?”
일단 모르쇠로 간다.
“…….”
아빠는 또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봤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아하하!”
이내 아빠는 막 웃더니 벌렁,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가 헷갈렸나 봐.”
“그래?”
나는 주춤주춤 아빠 따라 누워 이불을 덮었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한참 말이 없었다.
‘걸렸다. 백 퍼다, 이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예리한 주인공의 추적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었을 거다.
“공주야.”
“으응.”
나를 돌아본 아빠가 턱을 괴고 말했다.
“공주 입소하고 나서 며칠 후에 조제프 아저씨가 아빠 보러 왔어.”
“아, 그랬구나.”
“아빠랑 친구 해 주겠다고 하더라?”
“와, 좋았겠네.”
“응. 그런데 아빠랑 조제프 아저씨랑 친구 한 거,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되거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언더커버 작전이었구나.’
조제프 뤼트먼은 이미 왕년에 이름 날린 인물.
권력 좀 잡아 보고 싶은 수많은 귀족이 그를 곁에 두었었다.
그런 조제프가 대놓고 아빠 옆에 붙어 있으면?
에녹 루빈슈타인이 뭔가 큰 뜻을 품었다는 게 알려질 수 있다.
황제도 아빠를 경계할 테고.
“조제프 아저씨가, 그래서 아빠 말고 다른 아저씨랑 친구인 척하기로 했거든.”
“으응.”
그리고 지금 아빠가 이런 말을 내게 다 하는 이유는….
‘진짜 걸렸네. 완전 알고 있네.’
에녹 루빈슈타인 공작은 들어라!
―로 시작하며 아빠의 혁명을 충동질한 편지의 주인이 나임을 확신한 게 분명했다.
“하암. 졸리다. 우리 공주는 안 졸려?”
“나두 졸려.”
“그럼 얼른 자자.”
아빠는 나를 끌어안으며 뺨에 쪽 굿나잇 키스를 남기고는 금세 잠들었다.
물론 나는 한숨도 못 잤다.
수상한 딸을 눈치챘으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 주인공의 저의를 가늠해 보느라 말이지.
* * *
나는, 아빠가 분명히 내 뒤를 캘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아주 평범한 일곱 살 귀족 어린이처럼 지냈다.
먹고, 자고, 싸고, 놀고.
제티와 쥰을 통해 리코와 연락하던 것도 일시 중단했다.
그러다가 간만의 외출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으히힛.”
―는 당연히 안 되고.
나는 제과점 창밖으로 보이는 우람한 호위들에게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다들 나를 귀여워해 주는 호위 아저씨들.
콧김 뿜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준다.
‘리코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로 오라고 했을까? 의심받을 짓 하면 큰일인데.’
생각하는데―
“아가씨, 주문하신 초코 마카롱이랑 코코아입니다.”
“으앙! 감사합니… 뚜와이씨!”
예쁜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디저트를 내 온 제과점 직원은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리코!
그의 양옆에는 해맑은 웃음을 걸친 여직원도 둘 있었다.
“밖에 호위죠? 표정 관리하시고, 같이 좀 놀아 달라는 느낌으로 저를 잡으시겠습니까? 옆의 직원들도 함께요. 저희 길드원이니 걱정 마시고.”
“오오, 글쿠나. 네.”
역시 리코는 똑똑해.
나는 자연스레 리코를 앉힌 다음 창밖을 살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리코와 두 언니는 심심한 귀족 아가씨가 말동무로 앉힌 것처럼 보일 거다.
“우선, 양성소 졸업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당.”
“의외의 계급이시더군요.”
“네에. 그렇게 됐어요.”
“마카롱 드셔 보세요.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오?”
궁금해서 얼른 먹어 봤는데 맛이 좋았다.
다재다능한 리코….
“일이 복잡하게 됐습니다.”
“머선 일이여?”
우물거리며 말하자, 리코가 한숨 쉬었다.
“조제프 뤼트먼. 아무래도 다른 줄을 잡은 것 같습니다. 알롱 챔버 후작이라는 자와 한 달쯤 전에 접선했죠.”
“아.”
나는 입에 묻은 초코 크림을 닦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왜죠? 조제프 뤼트먼을 포섭할 생각 아니셨습니까?”
물은 리코가, “여기 덜 닦였네.” 하며 티슈로 내 입을 마저 닦아 줬다.
“아빠랑 붙어 다니면 소문나니까요. 챔버 후작 아저씨는 눈속임이래요.”
“아하.”
리코가 안도하며 감탄했다.
“오오. 조제프, 상당히 치밀한 자군요. 벌써부터 그렇게까지 경계 태세라니.”
당연하지. 조제프 뤼트먼은 작중 최고의 두뇌파였는걸.
“리코리코! 사탕 좋아해요?”
“네? 사탕이요?”
나는 메고 온 토끼 가방에서 사탕 꾸러미를 꺼냈다.
나는 리코와 길드원 언니들에게 꾸러미에서 꺼낸 사탕을 하나씩 먹여 줬다.
“맛있져! 몬 맛이에요?”
“딸기 맛입니다.”
“히히. 남은 거 다 먹어요.”
그리고 남은 꾸러미를 리코에게 건넸다.
“아아.”
리코가 꾸러미 안을 쓱 보더니 웃었다.
사실, 사탕 몇 개 눈속임으로 넣어 온 꾸러미에는 살바시온이 들어 있었다.
“아가씨도 치밀하네요.”
“기본이져. 근데 리코 여기서 일해요?”
“예. 대외적인 직장입니다. 저 의외로 이름 있는 파티셰예요.”
“이야. 치밀하네여….”
“기본이죠.”
나는 내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리코를 보고 쿡쿡 웃었다.
“근데 조제프 아저씨 때문에 저 만나자구 한 거예요?”
“그것도 있고. 아가씨가 알아야 할 것도 있어서.”
“몬데여?”
“오닉스 후작의 사생아가 도스라죠?”
“아, 체시어요. 네.”
“오닉스 후작이 그를 다시 데려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어붑.”
“이런. 안 뜨거워요?”
나는 코코아를 후후 불어 마시다가 놀라서 흘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리코가 턱 아래로 뚝뚝 흐르는 코코아를 닦아 주며 말했다.
“말 그대롭니다. 도스는 희귀하니까요. 어쩌다가 한 명 나오면 가문의 경사죠.”
“사, 사생아인 게 알려져도 상관없대요?”
“당연하죠. 오닉스 후작은 다시 아이를 데려오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리코가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계속 말했다.
“요즘 후작 부인과 매일 다투고 있죠. 적자가 아니라 체시어, 그 애를 데려와 가문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 아니, 체시어는 간다는 말도 안 했는데 왜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야?
양심 어디에 팔아먹었지, 진짜?
나는 어이없어져서 눈만 깜빡깜빡했다.
“아이가 아직 미성년자이고 법적 보호자가 없으니, 후작은 친자 관계만 증명하면 아이에 대한 양육권이 생깁니다.”
“아니….”
“지금 아이의 친모를 수소문 중이고,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용인들에게 증언을 요구해 서류까지 준비하고 있어요.”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릴까.
원작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
심각하게 생각하던 나는 깨달은 게 있었다.
원작과 달리, 양심 밥 말아 먹은 후작이 체시어를 다시 데려가려는 이유….
“보, 보호자. 보호자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예, 맞습니다. 아가씨 아버지가 후견인이라고는 하지만, 친부가 양육권을 주장하면 아이를 보내 줘야 하죠.”
“새아빠가…. 체시어한테 새아빠가 있으면, 그러면 상관없는 거구. 그쵸?”
“예. 이미 다른 가문에 입적되었다면 친자 증명을 해 봤자 데려올 방법이 없죠.”
아빠는 원작에서 체시어를 데려와 지체 없이 입적했다.
그래서 나중에 체시어의 계급이 밝혀졌어도, 오닉스 후작은 뻔뻔하게 나오지 못했던 거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아빠는 지금 체시어에게 그저 후견인인 상황.
‘어, 얼른 입양해야 하는 거구나. 체시어를, 빨리….’
어째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
그 시각.
에녹은 오닉스 후작과 마주 앉아있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지?”
물으면서도 에녹은 딱히 후작의 용건이 궁금하지 않았다.
뻔하니까.
“아이를 다시 데려가려고 합니다.”
후작이 말하자,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인성만 저세상으로 보낸 줄 알았는데 양심도 없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