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261)

“흠흠.”

신랄한 말투에 후작이 멋쩍은 듯 헛기침했다.

착,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은 에녹이 후작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왜. 애가 도스라서?”

“설마요. 제 핏줄이지 않습니까. 제가 거두는 것이 맞지요.”

“아하.”

뻔뻔한 대답에 에녹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귀족들은 이런 게 싫다. 뻔히 속 보이는 짓을 하면서도 의미 없는 체면치레를 못 놓는다.

전에는 뒷말이 두려워 아이를 죽여 달라고 했던 놈이 이제 와 제 자식이니 거두겠다고….

‘한 대 패 버리고 싶네, 진짜.’

에녹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울컥 올라온 충동을 삼켰다.

“글쎄. 아이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온종일 골방에 가둬 놓고 패고 굶긴 아비 얼굴이 보고 싶을지 모르겠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하, 진짜….”

에녹이 웃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간 아이를 맡아 주신 공께는 감사한 마음입니다. 어차피 아이 친모를 찾는 대로 황실에 친자 증명 진정서를 넣을 생각이고.”

후작이 가지고 온 서류 몇 장을 꺼내 보이며 덧붙였다.

“친모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저와 아이의 관계 증명은 어렵지 않으니 시일이 좀 걸릴 뿐 아이 소유권은 입증될 겁니다.”

“소유권?”

“…양육권.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진짜 팰까? 에녹은 주먹을 꽉 쥐며 후작이 내민 서류를 살펴보았다.

“오.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용인들의 증언이라. 그러니까 후작의 학대에 동참했던 범죄자들이 돈 몇 푼 받고 다시 애를 지옥에 집어넣는 데 가담했다는 말이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뭐, 그래. 좋아. 아이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세상 빛 보게 해 준 것 빼고 아버지 노릇이라곤 해본 적 없는 후작을, 정말 아버지라고 생각하는지 말이야.”

“아이도 만족할 겁니다. 가문을 물려줄 생각이니까요. 확실한 자기 위치가 필요한 법이지요.”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일어났다.

“계급이 좋긴 좋네. 사생아라고 눈칫밥 먹던 아이가 적자 치우고 후계자까지 되고.”

“아이를 미리 데려가도 되겠는지요.”

“아니. 아이 의견이 먼저야. 그리고 진정서인지 뭔지 내고 정식으로 권한이 생기면 그때 다시 찾아오도록 해.”

에녹이 싸늘하게 후작을 내려다보며 턱짓했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 봐. 역겨워서 더는 마주 보고 있기 싫으니까.”

* * *

“아빠, 아빠, 아빠!”

“어어, 공주야!”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급히 아빠를 찾았다.

“마침 공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응? 왜?”

“공주한테 먼저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멀?”

머뭇거리던 아빠가 나를 집무실 소파에 데려가 앉혔다.

“공주야.”

“응.”

“체시어 좋아?”

“좋지, 그럼!”

“그래. 그럼 체시어가 공주 오빠 되면 어때?”

“…응?”

“사실 조금 전에 오닉스 후작 아저씨가 찾아왔어. 체시어의 아버지 말이야.”

“그, 그랬구나….”

진짜 양심도 없는 XX! 그새를 못 참고 우리 집까지 와서 체시어를 데려가려고 한 모양이다.

나는 허둥거리며 말했다.

“왜, 왜 왔는데? 설마 체시어 다시 데려가려구?”

“맞아.”

“체시어는 싫을걸!”

“응. 아빠 생각도 그래. 물어보겠지만, 체시어도 별로 반기지 않을 것 같아.”

“그럼 어떡하지?”

“그런데 그 후작 아저씨가 체시어를 데려가려고 하면 아빠는 별수가 없어. 그래서.”

아빠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보여줬다.

나는 그게 뭔지 바로 알아봤다.

입적 동의서.

올 것이 왔구나.

“체시어를 양자로 들이려 해. 그럼 아무리 후작 아저씨라도 체시어를 마음대로 못 데려가거든.”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입적 서류.

‘역시 아빠네.’

아빠는 체시어가 도스 배지를 달고 돌아온 날 이미, 다 예상한 모양이었다.

후작이 뻔뻔하게 찾아와서 체시어를 내놓으라고 할 것을.

“그런데 공주한테 먼저 물어봐야 하잖아. 공주한테 갑자기 오빠가 생기는 거니까.”

“으응. 그렇지.”

물 흐르듯 원작대로 진행되는 중이다.

언제고 체시어가 아빠의 양자가 되고, 나와 남매가 될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망설이는 거야? 이게 맞는데?’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공주,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라?”

“아니라….”

고개를 갸웃하는 아빠 얼굴을 보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에녹 루빈슈타인.

그리고, 체시어 루빈슈타인.

세상을 구한 주인공들.

혈연보다 더 진한 관계였던 부자(父子).

원작의 빌런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둘 사이 이물질이나 다름없다.

내 마음이 왜 이리 싱숭생숭한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 가는 대로 굴어서는 안 된단 얘기다.

체시어를 양자 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도 없고.

“응.”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해. 나는, 난 좋아….”

* * *

“체시어.”

“응. 왜?”

체시어가 옷 아랫단을 들어 땀을 닦으며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양성소에서 돌아온 후 체시어는 하루 절반 넘게 검 수련에 매진했다.

오늘도 연무장으로 오니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있자나.”

“응.”

“너 나 좋지?”

“…….”

뜬금없는 질문에 체시어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한참 만에 대답했다.

“응.”

“맞아. 나도 너 좋아.”

본론을 꺼내야 하는데….

손만 꼼지락대는 나를 체시어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줬다.

“너!”

“응.”

“나랑 가족, 하고 싶어?”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어, 어때?”

“…….”

마주 보던 체시어는 앞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간 걸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어떠냐니까….”

대답을 재촉했지만, 체시어는 한참 망설였다.

애꿎은 머리를 막 당기다가 더운지 목깃을 흔들기도 하고 입술을 꼭꼭 씹기도 했다.

그리고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어. 좋아.”

“아.”

대답에, 나는 멍해져서 가만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그렇구나.”

전에 물었을 땐 가족 같은 거 필요 없다던 체시어는, 이제 우리 아빠도 나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와.’

그런데 나는 큰일 났네.

“그래, 체시어…. 우리 꼭, 가족… 하자.”

“응.”

어떡하지, 진짜.

* * *

도스 성기사단 부단장, 악시온 리브르는 제국군 입단 서류를 들고 루빈슈타인 공작가를 찾았다.

“앗! 리브르 공작 각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그래.”

체시어가 연무장에 있다는 소릴 듣고 찾아오니 사병들이 반겼다.

워낙 교류가 잦은 터라 다들 아는 얼굴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체시어 입단시키러 왔다.”

서류를 흔들자 사병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저희 공작님이 하실 일 아닙니까?”

“그래, 맞아.”

양성소를 졸업한 1급부터 3급까지의 능력자들은 곧바로 소년병으로 입단한다.

이때 각 계급군 총지휘관이 직접 능력자들을 찾아가 입단을 돕는 것이 원칙.

1계급 도스군 총지휘관은 에녹 루빈슈타인이다.

하지만 그는….

“공주 퇴소해서 당분간 바빠질 예정이니까, 거 뭐냐, 소년병 입단 처리는 네가 좀 해라.”

그걸 부단장인 악시온에게 떠넘겼다.

딸이 퇴소했는데 왜 네가 바빠지냐고 물었더니, 같이 놀아줘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위계고 뭐고 한 대 칠 뻔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악시온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애 어디 있나.”

“앗! 체시어 저쪽에 있습니다!”

보니, 연무장 한쪽에 리리스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흐에에에. 정말 보기 좋다.”

“공녀님 귀여워….”

헤벌쭉해진 사병들이 도란도란 얘기 중인 두 아이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악시온이 들고 있던 서류를 돌돌 말아 사병들 머리를 한 대씩 가볍게 때렸다.

“턱 빠지겠다. 좀 다물고. 그만 놀고 하던 거 다시 해.”

“에이, 잠시 휴식입니다.”

“공녀님이 연무장 나오시는 거 귀하단 말이에요…. 눈에 넣고 있어야 해….”

“너무 귀여워. 나도 딸 낳을래.”

중얼거리던 사병 한 녀석이 “아!” 손뼉 치더니 악시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각하는 결혼 안 하세요? 얼른 장가가셔서 우리 공녀님처럼 귀여운 자식 보시는 건?”

“안 해.”

“왜요? 이렇게 잘생기시고! 돈도 많으시고! 잘나가시는데!”

“그 귀여운 자식 보는 게 싫어서, 안 하는 거야.”

“아아.”

사병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고위 능력자들이 자신의 계급과 병역의 의무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

그래서 전장의 참상을 겪어본 능력자 중에는 악시온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누구처럼 딸 데리고 탈영하기 싫다.”

“음, 그 마음 이해합니다.”

“그치만 아시죠? 공녀님 옥타바이신 거?”

악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놀랍기도 하지.

“그래. 들었다.”

“어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공녀님 저, 으, 저 봐. 저 쪼꼬만 팔다리 뽀작뽀작 움직이는데 저걸, 어우. 군인은 좀 아니지.”

“커억! 저기 봐! 공녀님이 손 흔들어 준다!”

“우어어어!”

멀리서 리리스가 손을 흔들자 사병들이 마주 손을 흔들며 짐승처럼 포효했다.

질색하며 그들을 한번 흘겨준 악시온이 둘에게로 다가갔다.

“삼초오온!”

리리스가 호다닥 달려와 반갑게 제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고목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쬐끄만 게 달라붙어 방긋방긋 웃는데.

“으항항. 어쩐 일이세요?”

그래, 뭐. 좀 귀여운 것 같다.

통실통실 발그레한 뺨도.

저 작은 것도 입이라고 오물거리는 입술도.

“업무 태만한 네 아빠가 떠넘긴 일, 대신 하러 왔다.”

“네? 몬 일이요?”

“체시어.”

악시온이 손짓하자 뒤에 있던 체시어가 다가왔다.

“아아! 체시어 이제 입단하는구나….”

리리스가 악시온의 손에 들린 서류를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너 마력계고. 계속 검 잡을 거 맞지.”

“예.”

악시온이 대충 선 채로 서류 위에 펜을 휘갈겼다.

구경하던 리리스가 물었다.

“잉. 안에 들어가서 앉아가지구 천천히 하시지.”

“싫어. 귀찮고 시간 없어. 얼른 쓰고 슈미트 공작가에도 가야 해. 다시 말하지만, 이거 네 아빠 일이다. 나한테 떠넘겼어.”

“킁.”

리리스가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그때였다.

“저어… 각하. 잠시만요. 체시어 찾는 분이 있어서.”

“뭐?”

악시온이 돌아보았다.

사병 둘이 누군가를 이쪽으로 안내해 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오닉스 후작.

‘저자가 여긴 왜 왔지?’

의아해하는데, 후작이 악시온을 지나쳐 체시어에게로 다가갔다.

어쩐지 체시어도, 리리스도 땡 굳은 표정.

‘뭐야.’

이윽고 후작이 체시어를 끌어안았다.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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