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악시온은 멍하니 서서 체시어를 끌어안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체시어가 능력자의 사생아임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가문인지는 몰랐다.
‘아. 오닉스 핏줄이었나 보군.’
난데없이 웬 후견이냐 물었을 때 에녹이 했던 말.
“그대로 놔두면 애가 죽겠더라고. 별수 있나.”
그는 긴말하지 않았지만,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남은 말을 대신했다.
아이는 학대당했을 것이다.
능력자와 비능력자 사이에서 난 사생아.
당연히 하위 계급에, 가문의 이미지만 실추시킬 존재라 여겼을 테니까.
‘그런데 까 보니 도스였고.’
체시어의 소문은 단 이틀 만에 제도를 뒤덮었다.
전례 없던 도스의 탄생.
비능력자 혼혈이 1계급을 받은 것은 실로 기함할 만한 일이었으니까.
‘음, 그래. 좀 알겠군.’
악시온은 한없이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학대하던 아비가 이제 와 저러는 속내가 빤했다.
사생아건 뭐건 아이의 계급이 도스이니 헐레벌떡 다시 가문에 들이려는 속셈이다.
“이야.”
그들의 사정을 짐작한 순간, 악시온은 무심코 오만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양심이라는 게 없네….”
그 순간, 정적.
조용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자 모두 악시온을 돌아봤다.
오닉스 후작도, 체시어도, 리리스도.
“하던 거 마저 해.”
악시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몇 번 헛기침하던 후작이 다시 체시어를 쳐다보았다.
“잘 지냈느냐. 보고 싶었다.”
“…….”
체시어는 혼란한 표정이었다.
지켜보던 악시온이 쯧쯧 혀를 찼다.
“뭐 그런 걸 굳이 묻나. 당연히 잘 지냈겠지. 여기서는 아무도 안 패니까.”
후작이 돌아보았다.
“…리브르 공작 각하?”
“아아, 혼잣말이오. 마저 하지. 감격의 부자 상봉.”
“흠.”
다시 체시어를 쳐다본 후작이 웃음 지었다. 표정만은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였다.
“네가 집에 없으니 못 해준 것만 떠올라서 마음 아팠다.”
“패고 굶긴 것만 떠올라서 마음 아팠다―가 아니고?”
또 일제히 모두의 시선이 악시온에게 왔다.
“혼잣말, 혼잣말.”
악시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또 능청 떨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널 데려가고 싶지만, 시간이 좀 필요하겠구나.”
“아저씨!”
그때, 듣고 있던 리리스가 체시어와 후작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체시어를 왜 데려가요! 아저씨가 뭔데요!”
“공녀?”
“맨날 깜깜하구 냄새나고 쥐도 나오고 그러는 방에 체시어 가둬 놨으면서! 밥도 안 주고! 때리고! 욕하고!”
소리치는 리리스의 눈이 빨개져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악시온은 슬슬 화가 났다.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군. 공녀,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겠는데.”
“그럼 진짜지 거짓말이에요?!”
리리스를 내려다보는 후작의 시선이 싸늘했다.
아니, 싸늘함 이상이었다.
고작 일곱 살 어린애를 죽일 듯 노려보는 눈을 발견한 악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윽고 후작이 리리스를 옆으로 툭 밀어냈다.
“리리스!”
체시어가 놀랐다.
‘이 미친놈이 돌았나.’
악시온이 휘청이며 넘어질 뻔한 리리스를 얼른 붙잡았다.
황당했다. 뭔 패기로 공작가의 금지옥엽을 이렇게 대하는지.
‘아.’
그러나 악시온은 곧 그 이유를 깨닫고는 코웃음 쳤다.
4급, 옥타바인 리리스의 소문을 들었을 거다.
에녹이 아무리 무서워도….
‘벌써 자식 덕 볼 생각이나 하고 있군.’
체시어는 젊은 세대의 도스다.
에녹 루빈슈타인만큼 성장할 거라 예상되는 유례없는 능력자.
체시어가 가문의 수장이 된다면 오닉스 후작가의 입지는 어마어마해질 터.
권력의 판도가 뒤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아들아.”
후작이 체시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탁―!
쳐내는 체시어의 손길이 매서웠다.
“안 가요.”
멈칫한 후작의 눈빛이 묘해졌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
냉정한 거절에도 후작은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체시어를 빤히 바라보다 또 웃었을 뿐.
“아비가 너무 늦게 와서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구나.”
제멋대로 말한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웃기지도 않은 쇼였다.
“곧 또 오마.”
후작은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바로 쥐며 걸음을 돌렸다.
“그때는 웃으면서 보자.”
떠나가는 후작의 뒷모습을 보며 모두 말문을 잃었다.
“으허엉.”
“…….”
“…….”
후작이 떠나간 자리.
악시온은 엉엉 우는 리리스를 안으며 체시어를 보았다.
열한 살.
아직은 어린 나이.
혼란함, 그리고 분노.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아이는 한참 몸을 떨었다.
* * *
“후아아아.”
나는 공부방 의자에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늘어져 있었다.
“왜 그러고 있냐?”
“으앙, 스승님!”
불쑥 시야에 든 오스카의 얼굴.
나는 폴딱 일어났다.
“저 버린 줄 알았자나여!”
오스카가 멍하니 눈을 껌뻑이다 이내 픽 웃었다.
“…내가?”
“네! 스승님 안 와가지구!”
“쓸데없는 걱정은. 바빴어.”
“저 공부 열심히 할게요!”
“오, 진짜? 그럼 오늘 함수 해?”
오스카가 킬킬거리며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신나서 펜을 들었다.
“네! 삼차함수부터 해도 돼요!”
“와. 이제 아주 숨길 생각도 없고.”
“흠흠. 그럼 그냥 일차함수부터 하시져….”
웃으며 책을 편 오스카가 책상 위에 있던 가위를 턱짓했다.
“뭐냐.”
“아. 머리 짜를려구여.”
나는 가위를 들어 수줍게 오스카에게 건넸다.
“해주실래요?”
“…….”
왜인지 깊어진 눈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던 오스카가 가위를 받아들었다.
“나 보고 앉아 봐.”
“으항항.”
마주 보고 앉자, 오스카가 내 앞머리 아래 손을 받치고 가위질하기 시작했다.
“눈 감아.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넹.”
나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사각사각, 머리 잘리는 소리.
“옥타바?”
“아아. 넹. 그렇게 됐어요.”
“대담하네.”
“아니, 근데.”
나는 힐끗 눈을 떴다.
“저 진짜 놀랐잖아요. 그거 마나량 측정하는 마도구….”
“왜 놀랐는데.”
“어케 뜨나 한번 보니까 마나 없다구 비능력자라고 나오는 거 있죠? 걸릴 뻔했어요.”
마탑에서 만든 능력자의 마나량 측정 마도구, 마나포말.
오스카는 내가 거기 들어가면 프리메라임이 들통날 걸 알았을 테다.
그럼 꼼짝없이 개죽음인데.
“스승님은 몬 자신감으로 절 마탑 데려간다구 하신 거예요? 어차피 거기서 걸리면 끝이었는데?”
“야, 네가 머리가 있으면 마나포말쯤은 알아서 조작하겠거니 생각했지.”
오스카가 잘린 머리카락을 책상 위에 버리며 덧붙였다.
“도스 띄우면 마탑에 데려가려 했고.”
“아하?”
“옥타바가 뭐야. 이 거지 같은 나라에서 그 계급으로 살기 얼마나 힘든데.”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얼마나 의심스럽냐?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이 옥타바?”
“그치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건 나도 알아. 근데 진짜 너 앞으로 살기 팍팍할걸.”
“저는 괜찮아요. 이제 울 아빠 황제 폐하 눈치 안 봐두 되니까.”
“…….”
오스카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넌 아빠 대신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네, 머.”
고민도 없이 말하자 오스카가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덥석 내 코를 쥐었다.
“으앙악! 아파! 아파여!”
“아프라고 한 거야! 다시 앞 보고 앉아. 옆 머리 자르게.”
“아퍼….”
나는 코를 쓱쓱 만지며 돌아앉았다.
가위와 함께 챙겨 온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보는데, 앞머리가 제법 가지런히 잘려 있었다.
“오잉. 마법 안 써두 잘하신다. 어떻게 일케 잘랐지?”
거의 미용사급인데.
“많이 잘라 줘 봤어.”
“네?”
궁금해서 돌아봤는데, 오스카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픽 웃었다.
“고개 움직이지 마. 다시 앞에 봐.”
“네엥.”
“그런데 무슨 일 있냐. 왜 말린 오징어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아아.”
“이제 뒷머리 대.”
나는 꼼지락꼼지락 엉덩이를 움직여 오스카에게 등을 내보이며 말했다.
“체시어 있잖아요.”
“어.”
“체시어 아빠가 데리러 왔어요. 체시어 다시 데려가겠다구.”
“아, 걔 도스지.”
“네.”
“그래서? 걔랑 헤어질 생각 하니까 마음이 아파?”
“아니요. 안 헤어져두 돼요. 울 아빠가 체시어 아들 삼아 준다구 했거든요.”
“그럼 뭐가 문젠데?”
“하아아.”
“다 됐다. 봐봐.”
이번에는 내 다리를 잡고 직접 돌려 앉힌 오스카가 뿌듯하게 웃었다.
“이쁘네.”
“하아.”
“왜 한숨이냐고.”
“큰 문제가 생겼거든요.”
“뭔 문제.”
“체시어가 아빠 아들이 되면 저랑 체시어는 남매가 되잖아요?”
“그게 뭐.”
나는 또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있던 펜을 잡았다.
“스승님이 전에 저한테 물어봤는데….”
“내가? 내가 뭘 물어봤었지?”
“이고.”
백지 위에, 나는 하트 모양을 그려 넣었다.
껌뻑껌뻑. 그걸 가만 보던 오스카가 “하?” 하고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흠흠.”
사실 이런 고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스카뿐이었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실토했다.
“실은 제가요. 제가 그만, 그만…. 걔한테 심장이, 심장이 뛰고 말았거든요….”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