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1/261)

* * *

도망치듯 뛰쳐나온 체시어는 그길로 숨어들었다.

숨어 봤자 마구간 뒤편의 담벼락 곁이었지만.

‘바보같이….’

완전히 착각했다.

‘가족 하자’는 리리스의 말을.

언젠가 이 집 아들이 되라고 자꾸 권해서 가족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했을 때.

리리스는 말했었다.

“아아, 그래. 그거 말구. 네가, 너의 의지로 만든, 너만의 가족.”

“네가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구 상상해 봐. 그럼 결혼을 하겠지?”

“여보, 체시어. 사랑해요. 나는 너무 행복해. 우리 가족 이렇게 평생 행복하도록 해요.”

“…어때? 내가 말한 건, 바로 이런 가족이야.”

정말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자식도 낳고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 꼭, 사랑을 하자. 체시어.”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 리리스를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여전하다.

그런데….

‘대체 왜 착각했지? 멍청하게.’

뜬금없이 연무장에 찾아와서 가족 하자는 리리스의 말을, 그래.

부끄럽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때 말했던 그 가족으로 오해했다.

“여보, 체시어. 사랑해요….”

“아!”

쾅―!

머리를 세차게 흔든 체시어가 벽 위로 주먹을 내질렀다.

얼굴이 뜨거웠다.

생각해 보면 리리스는, 자길 이 집에 데려온 첫날부터 한결같지 않았던가.

‘우리 아빠 아들 하라’면서―

‘네 가족이 되어 줄게’ 했고.

“하.”

뒤돌아 벽에 기댄 체시어가 주르륵 무너져 앉았다.

리리스에게 자신은 아마 레온과 테오―그 애들과 비슷한 느낌이겠지.

순수하게 자길 친오빠 삼고 싶어 했을 리리스를 두고, 혼자 바보같은 착각을 해 버렸다.

‘그래도, 다행이네.’

에녹의 제안을 거절한 것.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리리스가 친동생이 된다면….

‘아, 이상해.’

그래, 뭔가 이상해도 한참은 이상하니까.

들키지 말자. 체시어는 착각했던 걸 꼭꼭 숨기기로 다짐했다.

혹시라도 들키면….

놀라서 질색할 리리스를 상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잠깐.”

“가족이 이 가족을… 말하는 거였어?”

체시어는 자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꽉 물었다.

“젠장.”

그런 말은 하지 말걸.

눈치 빠른 리리스이니 아마 그 말을 곱씹어보며 충분히 짐작할지도 모른다.

“하아.”

고개를 젖힌 체시어가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그러다 문득, 착잡해졌다.

상상도 못 했던 계급을 받게 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요즘.

이 집에 있어도 전보다 눈치 보이지 않았고, 리리스와 함께 있을 때도 훨씬 마음이 편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평온함이었는데….

“아들아.”

한 지붕 아래 있던 반년 동안 이름을 불러준 적도, 따뜻한 눈길 한 번 준 적도 없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이제 와서 다정한 척 아들 소리를 해 댄다.

그가 체시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은 맞았다. 친자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고….

또, 돌아간대도 전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되진 않을 거다.

그는 이제 아버지에게, 숨기고 싶은 사생아가 아니라 가문을 빛내줄 도스니까.

‘싫어.’

하지만 싫었다.

여기 있고 싶었다.

멋지고 다정한 에녹….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안 돼. 이상하잖아.’

리리스….

다시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계속 생각해 봐야 결론은 똑같을 것 같았다.

체시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체시어어어!”

나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체시어를 뒤쫓았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튀었다.

‘아니,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생일 때였나.

아무튼, 체시어가 울 아빠 아들 하기도 싫고 내 오빠 하기도 싫다 말하고 도망친 후.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가족이 이 가족을… 말하는 거였어?”

다른 가족은 뭘까?

그러다 생각났다.

내가 전에 체시어에게 로맨스를 수혈해 주려고 했던 말을.

‘진짜. 설마. 혹시. 체시어도 나랑 남매 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 아냐?’

살짝 기대하는 나를 오스카 스승님이 봤다면 ‘와, 진짜 너 좋을 대로 생각한다.’라며 비웃을 것 같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일단 직접 물어보자!’

얼른 체시어를 잡아다가 너 대체 무슨 가족 생각했던 거냐고 물어봐야 했다.

“아, 쫌! 거기 서 보라… 어어!”

철퍽―!

이 빌어먹을 짤뚱한 다리 같으니.

스텝이 한번 꼬인 순간 여지없이 넘어져 버렸다.

“아고고.”

쓰라린 무릎을 쓱쓱 쓸며 일어나는데―

“괜찮아?”

―저 멀리까지 도망쳤던 체시어가 놀란 눈으로 내 앞에 와 있었다.

‘와. 앞으로 얘 도망치면 넘어지는 척해야겠다.’

그럼 쉽게 잡겠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벌떡 일어났다.

“우리 얘기 좀 해!”

“…….”

체시어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이게 뭐라고 긴장되지.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아까 내가 가족 하자구 했을 때는 한다구 했잖아…?”

“…….”

“호, 혹시 너 그때 무슨 가족 생각했어?”

체시어는 곧바로 되물었다.

“가족이 뭐 다른 가족이 있어?”

“응?”

“가족이 가족이지, 무슨 가족이냐는 건 뭔 소린데.”

“어어?”

“나더러 아저씨 아들 하라는 소리 아니었어? 네가 항상 말했었잖아.”

“어, 응! 맞아. 나는 그 말이긴 했거든? 근데 너는….”

“나도 그렇게 이해했어.”

“아.”

파스슥.

뭔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음흉한 한 조각의 기대였을 것이다….

“그, 글쿠만.”

나는 멋쩍어져서 뺨을 긁적이다가, 곧 소리쳤다.

“그러면!”

그럼 대체 왜?

“왜 아까는 가족 한다구 했다가 갑자기 싫다는 거야?”

“네가 그냥 입버릇처럼 그런 말 하니까, 알겠다고 대답한 거야. 진짜 아저씨가 날…. 그럴 줄은 몰랐어.”

“아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럼 어뜨케, 체시어….”

“…….”

“방법이 없잖아…. 너 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가구 싶어? 양심에 털 난 후작 아저씨한테 아빠 소리 할 거야?”

힘없이 체시어의 팔을 붙잡고 묻자, 그는 한참 침묵했다.

그러다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 * *

“으어어어.”

소년병 입단 서류를 전달하러 온 악시온은, 시체처럼 늘어진 에녹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잘생긴 얼굴이 어째 거무죽죽했다.

“진짜 못생겼네.”

시비를 걸어 봐도 에녹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는데.”

악시온이 소파에 털썩 몸을 앉히며 물었다.

“야, 악시온.”

“뭐.”

“체시어 아버지가 찾아왔어.”

“오닉스 후작? 나도 봤다. 양심도 없는 새끼.”

“그놈이 애 데려가는 꼴을 어떻게 보냐. 그래서 체시어를 우리 가문에 입적시키려고 했거든.”

“오. 괜찮은 방법이네.”

악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체시어가 싫대.”

“……?”

“아저씨 아들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나갔어.”

“왜?”

“난들 아냐.”

“너 애 팼냐?”

“미쳤냐?”

에녹이 대번에 인상 썼다.

“그럼 뭐가 문제지? 네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럴 거 아냐.”

악시온의 질문에 에녹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라….

곧 에녹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걸 본 악시온이 픽 웃었다.

“뭐 있네.”

“내가… 애를 좀, 굴려서 그런가.”

에녹이 머리를 붙잡았다.

체시어에게 검을 가르치던 날들이 떠올랐다.

놀라운 재능을 가진 아이였다.

따라오기도 잘 따라왔고, 흥미를 보이는 게 대견해서 쉬지 않고 가르쳤다.

좀 쉬라고 해도 더 가르쳐 달라며 의욕을 보이던 체시어였는데….

‘그냥 눈치 보여서 안 쉬고 계속 배우겠다고 한 건가?!’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에녹이 책상 밑으로 다리를 덜덜 떨었다.

의도치 않게 아이를 학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열한 살밖에 안 되었는데, 매일같이 검을 쥐게 하면서….

“젠장! 난 쓰레기야!”

“안다니 다행이고.”

“어떡하지?”

“뭘 어떡해. 애가 싫다는데 억지로 잡아둘 순 없잖아.”

“그럼 양심에 털 난 친아버지한테 애를 다시 보내는 건 괜찮고?”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하, 빌어먹을.”

그때였다.

똑똑.

“아저씨, 저 체시어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어어!”

에녹이 벌떡 일어났다.

“들어와!”

조심히 문을 연 체시어가 들어와 악시온을 발견하고 멈칫하더니 작게 묵례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까 갑자기 나가서 죄송합니다. 당황해서요.”

“오, 아니다. 당황할 만했지. 내가 너무 뜬금없었으니까. 그래서.”

에녹이 꿀꺽,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혼자서 생각을 좀 해 보니 어떠냐. 마음 정했어?”

“네.”

“그래, 역시….”

“정말 죄송합니다. 안 될 것 같아요.”

“왜!?”

체시어가 입술을 물고는 한참 말을 골랐다.

“그냥….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요.”

“아아, 그래.”

에녹이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 갑작스럽겠지. 그런데 차차 적응할 수 있을 거야. 네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우선 입적 서류만 써 놓고….”

“아뇨. 죄송합니다.”

“…….”

에녹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악시온은 소파에 앉아 눈만 양쪽으로 굴리며 둘을 지켜봤다.

“너 그럼… 다시 전에 살던 집에, 가도 괜찮아?”

“달리 방법이 없다면요.”

“체시어!”

에녹이 소리쳤다.

“설마 네 아버지 때문이냐? 그래도 친아버지라고, 같이 살고 싶은 거야?”

“아뇨. 그건 정말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에녹은 답답했다.

물론, 사실대로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체시어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체시어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저씨만, 아저씨만 아니면 될 것 같아요.”

“……?”

에녹의 입이 떡 벌어졌다.

“풉!”

악시온은 웃음이 터졌다.

체시어는 충격받은 에녹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죄송합니다.”

―또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아하하하! 아아, 젠장. 오늘 좋은 구경 하는군.”

악시온이 참았던 웃음을 마구 터뜨렸다.

에녹만 심각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고…?”

“대체 애를 얼마나 굴렸길래 저런 말을 하지?”

“왜, 나만…?”

에녹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참 체시어의 말을 곱씹던 그가 “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참 뭔가를 더 생각하다가, 가만히 악시온의 옆으로 가 털썩 몸을 앉혔다.

“야.”

“큭큭. 왜.”

“너 결혼 안 하냐?”

“갑자기?”

“안 하냐고.”

“안 해.”

“왜?”

“애 낳기 싫으니까.”

“네가 낳는 거 아니잖아.”

“뭐래. 멍청인가? 자식을 만들기 싫다는 말이잖아.”

악시온이 고개를 젖히며 덧붙였다.

“나도 누구처럼 탈영할 것 같아서.”

“음, 그렇지. 그 마음 이해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뭔.”

에녹을 돌아본 악시온이 멈칫했다.

어째 표정이 음흉했다.

“뭐냐?”

“네가 체시어를 입양해라.”

“오!”

악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방법이?”

에녹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떠냐. 괜찮은 생각이지? 애가 나만 아니면 된다잖아.”

“와, 정말.”

“하하하하!”

“하하하하…!”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윽고 악시온이 웃던 얼굴을 싹 굳히며 정색했다.

“…미친놈인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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