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91)화 (92/261)

에녹은 계속 웃었다.

“하하하하.”

“…….”

“하하하….”

“…….”

그러다가 입술을 모으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별로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이 안 될 건 또 뭐냐.”

“진짜 정신 나갔네. 나 쟤 오늘로 세 번, 아니―”

인상을 찌푸린 악시온이 체시어가 나간 문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네 번. 네 번 봤다.”

“양자로 들여서 앞으로 더 많이 보면 되지.”

“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악시온이 막무가내인 에녹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에녹이 길게 한숨 쉬었다.

“애가 불쌍하지도 않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하아. 여태껏 패고 굶기고 못된 짓은 다 한 아버지가, 이제 와서 애를 다시 데려가겠다는데….”

“…….”

“그게 진짜 마음 고쳐먹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애 계급 보고 이용할 생각으로 말이지.”

그래. 딱했다.

양심은 저세상으로 보낸 오닉스 후작을 보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악시온은 대체 왜 자신이 에녹과 이런 대화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는 결혼도 안 할 거잖아. 당연히 후계자도 없고.”

“뭐 어쩌라고.”

“너 죽으면 리브르는 사라지는 거 아니냐?”

“어. 상관없는데? 내가 나 죽고 난 후에 내 가문 사라지는 것까지 생각해야 하나?”

죽으면 끝인데, 뭐.

단호한 악시온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에녹이 또 한숨 쉬었다.

“우리 부단장…. 나이 먹고 이제 은퇴하고 늙어서 병들면 누가 옆에 있어 주나.”

“…….”

“자식도 없는데. 혼자 쓸쓸히 죽어가겠지….”

“야.”

악시온이 지그시 눈을 감고 이를 갈았다.

그러건 말건, 에녹은 계속 말했다.

“한평생 외롭게 살다가 결국 무덤 들어갈 너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친구야.”

“후.”

“아니, 잠깐. 무덤 파 줄 사람은 있으려나 모르겠다?”

악시온이 벌떡 일어났다.

에녹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개소리 그만하고.”

“악시온.”

톡톡.

악시온이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소년병 입단 서류를 두드렸다.

“업무 태만한 단장님께서 떠넘긴 일 처리. 여기 다 해 왔으니까 확인해 보고.”

“진짜 생각 좀 해 봐. 입적이야 서류만 내면 하루 만에 통과니까.”

“공무 아니면 나 부르지 마라. 그럼 이만.”

“야, 야!”

악시온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그를 잡으려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던 에녹이 다시 털썩, 몸을 앉혔다.

“아오.”

고개를 젖힌 채 마른 얼굴을 쓸던 에녹이, 체시어를 떠올렸다.

아저씨만 아니면 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대충 눈치챘다.

“이거 참.”

에녹이 허허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미치겠네.”

* * *

“하아아.”

이러다 땅 꺼지는 거 아냐?

연무장 한쪽 구석에 앉아 나뭇가지로 흙장난을 치던 나는 입을 톡톡 때렸다.

한숨 그만 쉬어야지.

‘아니, 그치만!’

답답해 죽겠는데 어째.

체시어는 완강했다.

다시 후작가에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이 집 아들 할 마음은 없다고 했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원작대로만 간다면 염두에 둘 필요도 없었을 문제가….

‘달라진 건 나. 나 하나뿐인데?’

그런데 또 나 때문인 건 아니다.

설마 체시어가 나를? 하고 민망한 상상을 했는데, 아니라고 아주 못을 박아 줬으니까.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악시온이었다.

그는 연무장을 두리번거리다 내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하냐.”

“그냥 생각이요….”

“왜. 체시어 때문에?”

“네에. 체시어 아빠가 체시어를 데려가려구 하니까요. 그 사람 나쁜 사람인데….”

“…….”

악시온은 나를 물끄러미 보며 답이 없었다.

나는 또 한숨을 쉬며 우리 가문 사병들이 한창 훈련 중인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삼촌은 왜 여기 있어요?”

“체시어 어디 있냐.”

“모르겠어요. 또 어디로 사라졌어요.”

“하아.”

웬 한숨? 쪼그려 앉은 채로 악시온을 올려다보는데, 그가 말했다.

“리리스.”

“넹.”

“…너 혹시 나중에 내 무덤 파 줄 수 있냐?”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람.

인상을 찌푸리자 악시온이 허둥거리며 덧붙였다.

“아니, 뭐. 네 아버지 것 파면서 같이 파 줄 수도 있잖아.”

“네에?”

도무지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네.

의아했지만, 정말로 무덤 파 줄 사람 없어서 걱정하는 표정이라 착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알겠어요.”

“파 준다고?”

“네, 모.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아빠꺼 파면서 같이 팔게요….”

“그래. 고맙다….”

악시온은 내가 약속해 줬는데도 뭔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는 서로 앞을 보며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후우.”

* * *

그로부터 눈 깜짝할 새 흘러버린 일주일.

나는 리코의 편지를 받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오닉스 후작이 제국민 신변관리국에서 면접교섭권을 받았습니다.

친자 증명 진정서의 검수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마음대로 아이를 만나기 힘드니, 임시로라도 면접교섭권을 신청한 모양이더군요.]

이제 오닉스 후작은 언제든 우리 집에 찾아와 체시어를 만날 수 있단 얘기다.

진정서 검수 결과가 나오면 합법적으로 체시어를 데려갈 수도 있을 테고.

[다행인 점은 진정서 검수 기간이 제법 길어질 듯하다는 겁니다.

한 2주 정도?

후작이 진정서에, 아이를 숨겨 키운 이유를 명확히 진술하지 않았거든요.

사생아라 알리기 부끄러웠고 신체적으로 학대하여 몰골을 내보이기 어려웠다고 사실대로 진술만 하면 검수가 빨라질 텐데….

뭐, 그런 진술을 했다간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에게는 2주의 시간이 남았다.

‘리리스, 침착해.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하자. 체시어를 후작 놈에게서 구해낼 방법을.’

나는 손톱을 딱딱 깨물었다.

체시어를 아빠의 양자로 만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응, 없어.’

정말 없다.

있더라도 2주 안에 생각이 날까?

그래서 나는 일단, 일주일 내내 체시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설득 중이었다.

물론 체시어는 철벽이었지만.

“손톱 맛있냐?”

“아, 삼촌!”

훈련하는 체시어를 지켜보며 딱딱 손톱을 물고 있으니 악시온이 다가왔다.

“체시어 끝났어요?!”

“아직.”

“우쒸.”

초조하게 다리를 달달 떠는 내 옆에 악시온이 털썩 앉았다.

“너도 참 정성이다. 쟤는 절대 네 아버지 양자로는 안 들어가겠다는데, 그만 포기하지 그러냐.”

“아니에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구 했어요.”

“그만 찍어. 안 넘어가. 쟤는 네 아버지만 아니면 된대.”

“네에?”

나는 놀랐다. 왜?

악시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가혹하게 굴린 거 모르냐? 애가 질려 버린 것 같던데?”

“헉!”

그런 거였어?

입을 떡 벌린 나를 보며 악시온이 방긋 웃었다.

“너 몰랐구나. 네 아버지 인성 진짜 더럽다.”

“그, 그거는 아닌데….”

“아냐. 정말 더러워. 봐,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뭔데.”

“흠흠.”

악시온은 일주일 내내 우리 집에 출근 중이었다.

소년병이 입단하면 각 군 총지휘관이 일정 기간 개인 훈련을 봐 주는 것이 관례라는데….

‘어휴, 아빠는 왜 자꾸 자기 일을 삼촌한테 떠넘기지?’

그랬다. 이번에 입단한 체시어와 제라드를 직접 가르쳐야 하는 건 우리 아빠였다.

왜인지 악시온이 그걸 대신하느라 일주일 내내 우리 집 연무장에서 체시어와 부대끼고 있지만.

“죄송해여….”

“인성 말아먹은 건 네 아빤데 왜 네가 죄송하냐?”

“흠흠. 그래도 체시어랑 많이 친해지셨더라구여…. 울 체시어 착하죠?”

나는 턱을 괴고, 검 휘두르는 데 여념 없는 체시어를 보며 말했다.

“뭐, 나름?”

“히히.”

그렇게 한참 웃다 보니, 또 시무룩해졌다.

“삼촌, 있잖아요.”

“어.”

“저는요. 체시어랑 헤어지기 싫어요…. 근데 그것보다, 체시어가 후작 아저씨 집에 가는 게 더 싫어요….”

“…….”

“그 집에 가면 나빴던 일이 다 생각날 테니까요. 체시어는 거기서 맨날맨날 맞구, 욕하는 거 듣구 그랬어요. 체시어한테 거기는 지옥이었을 거예요….”

나는 눈물이 날까 봐, 울컥해진 눈 밑을 손가락으로 쭉 당겼다.

“아니, 뭘 또 울기까지?”

“끅.”

악시온이 손가락으로 그렁그렁한 내 눈물을 훔쳐주었다.

제법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러다 문득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

옆을 보니, 악시온이 굳은 얼굴로 체시어를 보고 있었다.

아니, 체시어가 아니라.

“으아아앙, 또 왔어!”

각설이야, 뭐야? 죽지도 않고 또 체시어를 찾아온 오닉스 후작이었다.

나는 폴딱 일어났다.

하지만 멈칫.

그들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후작은 면접교섭권을 들고 왔을 거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가서 말려 봤자 둘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어뜨케….”

후작과 체시어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대화했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갑자기 후작이 체시어의 팔을 강하게 휘어잡았다.

“저게 모야!”

체시어는 그걸 쳐냈다.

그러나 후작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체시어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으앙, 저 나쁜 놈!’

면접교섭권이겠지.

그걸 본 체시어의 고개가 힘없이 내게 돌아왔다.

우리는 멀리서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체시어는, 들고 있던 검을 버리듯 던져두고 천천히 후작의 뒤를 따랐다.

“아, 안 돼! 기다려!”

면접교섭권이라고 해 봐야,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 안 될 거다.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 싫어서….

나는 체시어를 향해 달려갔다.

“체시어!”

그때였다.

악시온이 저벅저벅, 나를 빠르게 먼저 지나쳐 갔다.

‘……?’

그는 둘에게로 향하며 소리쳤다.

“지금 어디 가나?”

후작과 체시어가 돌아보았다.

“아, 리브르 공작 각하. 훈련 중에 죄송합니다만….”

후작이 뻔뻔하게 다시 면접교섭권을 내밀다 멈칫했다.

체시어의 어깨에 척, 하고 팔을 두른 악시온이―

“응? 어디 가냐고.”

씨익 웃으며 친근하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아들아.”

……?

나도, 체시어도, 그리고 후작까지.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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