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92)화 (93/261)

* * *

체시어는 후작이 또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하려고 준비해두었던 말을 했다.

“아버지.”

후작은 다정한 호칭에 반색했다.

“저를 자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질문이 그러냐. 당연히 내 자식이지. 내 아들.”

“그럼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요.”

체시어는 바랐다.

언젠가 리리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엄마니까. 나를 키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낳은 사람이니까.”

그래.

그래도, 아버지니까.

길러주진 않았어도, 그래도….

간절한 부탁 하나쯤은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지금 여기에서 지내는 게 행복해요. 어머니랑 살 때도, 아버지 집에서 지낼 때도… 한 번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

“계속 여기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안 될까요.”

체시어는 간절한 눈으로 덧붙였다.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시면. 원래 없었던 자식인 셈, 쳐 주시면.”

“…….”

“죽을 때까지, 아버지 잊지 않겠습니다. 낳아 주셔서 감사한 마음 가지고 살게요.”

후작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체시어를 빤히 바라볼 뿐.

한참 만에 열린 후작의 입에서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너를 도스로 태어나게 해 준 게 누구냐? 너한테 그 피를 물려준 것이 누구라고 생각해?”

“…….”

“널 주워다가 제 딸 놀잇감 시킨 루빈슈타인 공작도 아니고, 네 천한 비능력자 어미도 아니다.”

“…….”

“바로 나야. 나.”

후작의 눈은 광기로 빛났다.

“내가 너에게 손이라도 한 번 올린 적 있느냐? 그래도 자식이라고 안 죽이고 살려 두었지. 심지어 먹여 주고 재워 주기도 했잖느냐?”

“…….”

“집에 가면 네 형이 있으니 싫은 게냐? 네가 그놈 얼굴 보기 껄끄럽다면 당장 내쫓으마. 지금껏 당했던 걸 갚아 주고 싶으면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된다.”

체시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복형 조나단….

후작에게는, 천한 사생아인 저와 달리 그가 진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후작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조나단을 내쫓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나와는 정이 없어 어색한 게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야. 어디 좋은 곳에 가서 얘기라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자꾸나.”

후작은 금세 다정해진 표정으로 체시어의 팔을 붙잡았다.

탁―!

체시어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안 갑니다.”

후작은 그런 태도쯤은 예상했다는 듯, 품 안에서 뭔가 꺼냈다.

황실 직인이 찍힌 종이.

“너와 이틀에 한 번, 세 시간씩은 얼굴 볼 수 있는 권리증이다. 공작이 네 얼굴 보는 걸 방해하니 내 하는 수 없이 황실에 친히 요청해 받아왔단다.”

체시어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공문서까지 가져온 후작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리리스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자꾸나. 좋은 곳에 가서, 같이 식사라도 하자.”

체시어는 결국,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지금 어디 가나?”

악시온이 다가왔다. 후작은 능청스럽게 면접교섭권을 다시 보이려 했다.

“아, 리브르 공작 각하. 훈련 중에 죄송합니다만….”

“응? 어디 가냐고.”

그러나 관심도 없는지, 악시온은 체시어의 어깨에 척 팔을 두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들아.”

……?

체시어는 제 귀를 의심했다.

놀란 것은 후작도 마찬가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아, 후작은 몰랐나? 소문이 늦네. 이 애, 내 아들 삼기로 했는데.”

“뭐라고요?”

후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그런 것도 예상 못 했나? 얘가 요즘 제도 제일의 유명인사인데. 오랜만에 나온 도스. 심지어 성도 가문도 없는.”

“아니, 뭔!”

“침 질질 흘리는 귀족들이 얼마나 많다고. 하필이면 루빈슈타인 공작이 후견인이니 대놓고 손은 못 뻗었지만….”

악시온은 능청 떨며 덧붙였다.

“…나는 친하잖아. 내 밑에 들이겠다고 했더니 친히 허락해 주더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이 애의 아버지는 바로 납니다!”

“오, 증거 있어?”

“예, 있지요! 지금 황실 신변관리국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검수 중입니다!”

“그렇군. 결과 언제 나오는데?”

“그, 그건….”

악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난 오늘 입적 서류 제출하러 갈 건데?”

입양은 서로의 동의만 있으면 서류 제출 하루 만에 통과된다.

후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그걸 왜, 왜 마음대로…. 아이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고!”

“의견?”

어깨를 으쓱한 악시온이 체시어를 내려다봤다.

“너 내 아들 하기로 했어, 안 했어?”

체시어는 황당했다.

뜬금없는 이 상황에 대체 어떤 식으로 장단을 맞춰야 하는지….

“아.”

멍하니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리리스가 보였다.

대화를 다 들었는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악시온의 바짓자락을 꼭 잡고 빼꼼 얼굴을 내민.

눈물이 고인 큼지막한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예….”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하나만은 확실히 알았다.

지금 어떤 답을 해야 하는지.

“맞습니다, 아버지.”

체시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라고? 아버지이?!”

후작이 빽 소리쳤다.

시체처럼 창백해진 후작을 보고 악시온이 비웃었다.

“이, 이게, 이게…!”

한참 허둥거리던 후작이,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잽싸게 떠나갔다.

아마도 먼저 관리국에 가 보려는 것이겠지.

꽁지에 불붙은 새 같았다.

“사, 삼촌!”

리리스가 흥분으로 두 발을 마구 굴렀다.

“이게 몬 소리예요? 그냥, 그냥 후작 아저씨 쫓으려구 한 말이에요?”

악시온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리리스를 빤히 응시하다, 이내 체시어를 돌아봤다.

“아들, 준비해.”

“…예?”

“얼른 가야지, 우리도.”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나와 체시어, 악시온, 그리고 아빠까지.

우리 집 마차를 타고 황실 신변관리국으로 가는 중.

“내가 진짜 뭐 하는 거지….”

악시온은 영혼이 떠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고.

“…….”

그 옆의 체시어도, 이 얼떨떨한 상황이 이해 안 되는 것 같았다.

“아하하하! 빨리 가자, 빨리!”

아빠만 입이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달려, 달려!”

아빠는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나를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말… 우리는 달렸다!

황실 공무부.

“으앙! 아, 아빠! 천천히이…!”

“아하하하!”

아빠는 뒤에서 내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은 채 달랑 들고, 허공에 번쩍 내보이며 달렸다.

공무부 직원들과 방문객들 전부 놀라 우리를 쳐다봤다.

‘쪽팔려! 이게 뭐야!’

신변관리국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 딱 20분.

아빠는 끼이이익, 걸음에 제동을 걸고 창구 하나를 차지했다.

“입적 신청하러 왔습니다.”

나를 내려놓은 아빠는, 체시어와 악시온을 관리국 직원에게 보이며 재빨리 말했다.

“이름은 체시어. 저는 아이의 후견인이고, 이쪽이 아이를 입적할 가문의 가주입니다.”

나는 그때, 공교롭게도 우리 바로 옆 창구에 서 있던 오닉스 후작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입을 떡 벌리며 놀라더니 직원을 재촉했다.

“이보시오! 빨리 좀!”

“예에….”

공무에 시달린 모양인지 눈 밑이 시커먼 직원은,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느릿느릿 읽었다.

“일전에 제출하신 친자 증명 진정서에 추가 진술 서류 제출하신다고 하셨죠…. 어디 보자…. 아이를 숨겨 키웠던 이유가… 사생아였고, 폭행의 흔적이 있어서 내보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니! 그걸 왜 소리 내서 읽는 거요?!”

후작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하. 빨리 검수해 달라 하려고 결국 사실대로 말하는구나.’

이미지고 뭐고 발등에 불 떨어졌으니 저 선택이 이해는 된다.

“에녹 루빈슈타인 님?”

그때.

머리를 단정히 묶은 우리 창구의 여자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서류 네 장을 내줬다.

“여기 후견인 동의서 한 장, 입적 아동 신상명세서 한 장, 입적 가문 가주님 신상명세서 한 장, 그리고 입적 사실 확인서 한 장. 총 네 부 서류 작성하셔서 제출해 주시면 되세요.”

“제출하면 바로 통과됩니까?”

“네. 입적은 보호자의 신분만 증명되면 서류 제출 이후 별도의 절차 없이 승인됩니다.”

“어휴, 수고하십니다. 일 처리가 빨라서 참 좋네.”

아빠가 그 자리에서 펜을 들었다.

멍하니 그걸 보고 있던 후작이 손을 휙 뻗었지만―

“에헤이.”

―아빠는 얄밉게 웃으며 서류를 허공으로 들었다.

“이, 이이….”

씩씩거리던 후작이 담당 직원을 재촉했다.

“그놈의 검수는 언제 끝나는 거요!”

“아, 좀 기다리세요…. 방금 검수부에 추가하신 서류 내고 왔잖아요….”

“내가 지금 며칠을 기다렸는데!”

“저 재촉하신다고 빨리 검수되는 거 아니세요.”

“이이익!”

나는 열심히 양쪽 창구를 번갈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우리 쪽은 5분도 안 되어 서류 작성이 끝났다.

그런데.

“어머.”

서류를 확인하던 직원이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쩌죠, 악시온 리브르 님? 여기 서명이 아니라 인장을 찍어 주셔야 하거든요.”

악시온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 두 장이 반려당했다.

“물론 얼굴을 모르는 분은 아니시지만, 입적은 별도의 승인 절차 없는 업무라 보다 확실한 신분 증명을 위해 서류에 공증된 인장만 받고 있습니다.”

아빠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에서 헐레벌떡 바로 온 길이었다.

누가 인장을 챙겨 다니겠는가?

악시온은 땀에 젖은 검은 반소매 훈련복 한 장만 덜렁 입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한순간에 여유를 잃어버린 아빠와 달리, 옆에서 우리를 훔쳐보고 있던 후작은 반색했다.

나도 덜컥 초조해졌다.

‘후, 후작 쪽 서류가 먼저 처리되면 어쩌지?’

일촉즉발의 상황.

빠르게 결정을 내린 아빠가 몸을 돌렸다.

“일단 너희 집 가서 인장을….”

그러나 척, 악시온이 팔을 가로로 쭉 뻗어 나서려는 아빠를 막았다.

아빠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너 이 자식, 여기까지 와서 생각 바뀌었다고 할 건 아니지.”

“…….”

나는 긴장하며 둘을 지켜봤다.

모르긴 몰라도, 둘 사이에 이미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듯하다.

‘삼촌은 싫은데, 아빠가 체시어를 입양하라고 억지로 시킨 걸까?’

아무래도 악시온은 영 내키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체시어….

체시어도 초조한 듯 둘을 지켜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려 버렸다.

“집에 갔다 올 필요 없다.”

“뭐?”

한숨을 한 번 쉰 악시온이, 입고 있던 훈련복 가슴팍에 달린 앞주머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그가 꺼낸 것은, 금색 빛이 나는 작은….

‘인장?!’

그걸 본 아빠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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