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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93)화 (94/261)

‘그, 그걸 왜 챙겨 다녀요?’

당황스러웠다.

인장을 챙겨 다니다니.

그것도 땀에 젖은 훈련복 앞주머니에 소중히?

마치 오늘 일어날 일을 항시 대비라도 하고 있던 사람 같았다.

“하하하하!”

아빠는 곧 주변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리고 악시온의 어깨에 팔을 척 두르고, 옆에 서 있던 후작을 놀리듯 보며 말했다.

“역시 우리 부단장! 아~주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니까?”

“알았으니까 비켜.”

아빠를 떼어 낸 악시온이 창구로 걸어가 서명만 올라 있던 서류 위에 인장을 쾅, 쾅 덮어 찍기 시작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창백한 표정으로 그걸 지켜보던 후작이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루빈슈타인 공작! 이게 대체 무슨 행패입니까?”

“행패? 거 말이 좀 이상하네?”

“나는 체시어의 친부입니다! 저 애에게 계급을 물려준 장본인이요!”

후작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악마도 이런 짓은 안 합니다! 친부인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이렇게 아이를 빼앗아 간다고요?”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지, 전부 숨죽이고 지켜보는 직원들을 향해 호소하듯 덧붙였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눈앞에서 생이별시키는 이 상황이, 정말, 맞느냐고요!”

“쇼 중에 미안한데.”

아빠가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아이를 돌본 건 나야. 그리고 좋은 양부가 되어 줄 사람을 구해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로 아이를 입적시키고 있지.”

울먹이며 땡고함이나 치는 후작과 달리 아빠는 냉정하리만치 이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에 친부가 있는데도 고민 하나 없이 아이가 서류에 자기 이름 쓴 것만 봐도 답은 나오지 않나.”

아빠는 픽 웃으며 덧붙였다.

“욕심만 많아서 자기 입으로 애를 학대한 사실까지 술술 불어 놓고는.”

“…….”

“뭐가 자랑이라고 나잇값 못 하고 질질 짜면서 없어 보이는 수작질이지? 여기서 동정표라도 모으면 되는 줄 아나?”

청산유수 같은 아빠의 말을 듣고 있던 직원들이 동의하는지 소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더 추잡해지지 말자고. 정 그놈의 친부 노릇, 해 주고 싶거든.”

아빠는 후작에게 바짝 다가섰다.

“애 앞에 다시는, 그 역겨운 낯짝 들이밀지 마.”

덧붙이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주변은 정적.

후작은 눈물이 고인 눈에 핏발을 세우며 아빠를 계속 노려보았다.

“저…, 입적 승인되었는데요.”

고요를 깬 건 우리 창구 직원의 목소리.

그녀는 싸한 분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소심하게 짝짝짝, 박수 쳤다.

“새,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그 말에, 무서운 표정을 단숨에 푼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체시어와 악시온을 향해 팔을 벌렸다.

“자, 그럼 이제 집에 갑시다!”

* * *

밖으로 나오자마자 리리스는 체시어를 붙잡고 물었다.

“체시어! 너 정말 이걸로 괜찮아? 나한테 계속 가족은 싫다 그랬으면서… 삼촌은, 삼촌은 된다구?”

리리스는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체시어도 마찬가지.

해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미 입적을 다 마친 마당에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된 순서였지만….

“공주야, 체시어를 이해해 줘. 다 아빠 잘못이야. 지금까지 아빠가 체시어한테 훈련을 너무 혹독하게 시켰거든. 해도 해도 너무했던 거지.”

“지, 진짜 그 이유라구?”

이해할 수 없다는 리리스의 표정.

체시어는 에녹을 보았다. 그는 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마 아저씨는 다….’

에녹은 눈치챈 것 같았다.

리리스와 친남매가 되는 걸 이상하게 느끼는 자신을.

결국, 체시어는 에녹에게 미안한 눈빛을 한 번 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

충격받은 리리스의 눈이 커졌다.

거짓말하는 속이 못내 시끄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눈 안 감게 조심하자.’

눈을 질끈 감는 실수만 안 하면 안 들키겠지.

거짓말할 때마다 얼굴에 티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푸헤헤. 너 방금 거짓말이지?”

“뭐, 뭐?”

“사실 너 다 티 나. 거짓말 완전 못해. 거짓말할 때 눈 질끈 감는다? 몰랐지?”

양성소에 있을 때 리리스가 말해 줘서 알았다.

그러니까 눈만 안 감으면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줄 것이다.

바로 지금도.

“세상에! 모야! 아빠 나빠! 대체 몰 어쨌길래!”

리리스가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에녹의 무릎을 퍽퍽 쳤다.

“아하하하! 아니, 그래도 어쨌든 잘됐잖아. 악시온 삼촌은 좋은 사람이야. 아빠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고, 아빠처럼 체시어를 막 굴리지도 않을걸.”

“그, 근데 그럼 체시어는 이제 어디서 지내?”

리리스의 질문에, 정적.

“아, 그건.”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악시온이 체시어에게 말했다.

“내 눈치 볼 필요 없이 너 편한 대로 해라.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원래 살던 곳이 익숙하겠지.”

“저, 공작님 집에 방… 있나요?”

“뭐?”

“어디든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잠만 잘 수 있으면 돼요.”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악시온이 쓱 눈을 세웠다.

“집에 방 많아.”

“아, 그러면….”

“들어올 거냐?”

“네. 감사합니다.”

“그래라. 그럼 짐 챙기러 가자.”

“예.”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대화에, 리리스가 놀라 체시어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 삼촌이 우리 집에 계속 있어도 된다구 했는데 굳이 가야 해…?”

체시어는 리리스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그냥 지금처럼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안 돼.”

“왜 안 되는데?”

한 지붕 아래서 매일 가족처럼 같이 지내면….

그렇게 계속 자라면….

“…그냥 안 돼. 싫어.”

“시, 싫다구?”

체시어는 말주변 없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매일 얼굴 보고 남매처럼 부대끼면서 자랐다가 네가 나를 진짜 친오빠처럼 생각하게 되는 게.

왜인지 내키지 않는다고.

뭐, 그렇게 사실대로 말해?

“공주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리리스를 에녹이 번쩍 들어 안았다.

“체시어가 지금까지 좀 힘들었나 봐. 아빠가 진짜 심하긴 했거든.”

“대, 대체 몰 어쨌길래….”

“그리고 이제 서류 처리도 다 끝나 버렸어. 체시어에게는 리브르라는 성이 생겼지.”

“으응. 그건 그런데….”

“걱정 안 해도 돼. 체시어에게는 좋은 일이야. 악시온 삼촌이 죽으면 삼촌이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이랑 집이랑 다 체시어 거잖아. 미리 삼촌 집에 후계자로 들어가 살면서 눈도장을 쾅쾅 박아 놔야지.”

“저건 말을 해도 꼭.”

듣고 있던 악시온이 발끈했다.

리리스는 준비하지도 못했던 헤어짐에 혼란한 얼굴이었지만, 달래는 아빠 품에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

* * *

체시어가 루빈슈타인 공작저에서 지낸 넉 달 남짓한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체시어가 떠나가는 걸 아쉬워했다.

한 명, 한 명 인사하는 동안 눈물까지 글썽이는 몇몇 사용인들을 보고 체시어는 당황했다.

“자주 와라.”

마지막에 인사하러 간 집안의 제일 큰 어르신, 노르딕까지 못내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체시어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뭐랄까.

자길 반겨 주고, 떠나가는 걸 아쉬워하고, 언제든 돌아오라고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너무도….

행복했다.

눈가가 시큰해질 만큼.

“쌍둥이 집에는 따로 한번 들러서 인사하자. 알겠지?”

“네.”

에녹이 얼마 없는 체시어의 짐을 직접 마차에 실어 주며 말했다.

쌍둥이의 아버지, 알렉세이 앙트라세가 제도로 돌아온 후.

이곳에 머무르고 있던 오르디아와 쌍둥이는 본가로 돌아갔다.

본가라고 해 봐야 제도 내의 타운하우스고 마차로 5분 남짓인 거리라 자주 왔다 갔다 하는 편이었지만….

‘이제 혼자 있어야 하네.’

체시어는 문득 리리스가 걱정되었다.

쌍둥이도, 체시어도 없는 집에서 리리스는 외로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쭉 함께였는데.

‘왜 안 오지.’

체시어는 떠날 준비를 마친 마차 앞에서 두리번거렸다.

돌아오자마자 제 방으로 달려간 리리스는 아무래도 서운해서 울고 있을 것 같았다.

“어라라.”

그때 에녹이 당황하며 말했다.

“우리 딸 왜 저렇게 불안한 차림새로 나오실까.”

무슨 말이지? 하고 돌아봤더니, 리리스가 낑낑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나오고 있었다.

등에는 배가 빵빵한 곰돌이 가방.

옆구리에는 입 뽈록 튀어나온 토끼 가방.

마지막으로 웬 보따리까지 한 짐 손에 들고….

누가 봐도 야무지게 짐 싸서 집 나가려는 모양새였다.

“공주야, 공주야. 우리 공주 어딜 가려고 이렇게 나왔어?”

에녹이 잽싸게 리리스의 앞을 막고 섰다.

“삼촌!”

그러나 리리스는 호다닥 에녹을 피해 악시온에게 달려갔다.

“저도 갈래요!”

“뭐?”

“저, 저도 갈게요. 아무래도 체시어가 걱정되니까….”

“뭔 소리야.”

“아주 가는 게 아니구…. 저도 삼촌 집에서 쫌만 있으면 안 될까요?”

악시온이 눈을 들어 에녹을 봤다.

리리스의 뒤에 서 있던 에녹이 휙휙 고개를 저으며 팔을 겹쳐 X자를 만들어 보였다.

“…안 돼.”

결국 악시온이 거절하자, 리리스가 제 작은 손을 빌듯이 꽉 맞잡았다.

“제발요, 삼촌!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체시어가 적응 못 할지도 모르자나요…. 제가, 제가 같이 옆에 쫌 있어 줘야 해요….”

“아니, 적응을 못 하긴 뭘 못 해. 얘가 신생아도 아니고.”

“으아앙. 제발요. 혹시 집에 방이 없나요? 저 하인들 방이라도 하나 주세요…. 거기서 잘 수 있어요….”

“방 많거든? 우리 집 커.”

“그럼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저 빨래도 잘해요. 삼촌 팬티 빨아 드릴게요….”

“뭐래? 무슨 애가 팬티를 빨아?”

체시어는 난처해하는 악시온에게 달라붙어 울먹이는 리리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끅. 으아아앙!”

운다.

그리고는 한달음에 달려와서 체시어의 허리춤을 잡고 안겨들었다.

“…리리스.”

“으허어엉. 이, 이렇게 헤, 끅! 헤어지, 기 싫어…! 나 놔두고 가지 마아…!”

“아.”

어떡하지.

체시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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