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스….”
체시어는 떨리는 팔을 들어 리리스를 마주 안았다.
서럽게 우는 리리스를 안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가, 가지 마…. 히끅. 헤어지기 싫어. 너 없으면 이상할 것 같아….”
“…….”
나도야.
나도 네가 옆에 없는 하루하루가 어색할 것 같아.
체시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면 눈물이 날까 봐 참았다.
“자주… 보러 올게.”
그가 살아온 날 중 리리스와 함께였던 날은 아주 일부였다.
하지만, 온통 흑백이었던 무채색의 삶에서 오직 빛이 나던 나날들은―
“데리러 왔어.”
그래.
네가 내 손을 잡아 준, 그날 이후부터였다고.
“나 한 번만 믿어 줘….”
“어차피 어디든, 이 지옥보단 나을 거야.”
체시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주, 헤어지는 거 아니니까….”
상처받기 싫었던 소년은 앞으로 그 누구도 믿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결국 또 실패했다.
“계속, 너랑….”
하지만 이번에는 후회가 없었다.
앞으로도 후회할 일은 없겠지.
“너랑 살아갈게….”
아주 조그맣게 속삭인 말을 리리스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큰 울음소리에 묻혔을지도 모르겠다.
“으허어엉.”
결국, 고였던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체시어는 소매를 들어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에고.”
둘을 지켜보던 에녹이 한숨과 함께 웃으며 다가왔다.
“공주야. 그만 울어.”
“아바아아…. 나 쪼, 쪼끔만 사, 꺽, 삼촌 집에 가가지구….”
“아이고, 우리 공주. 이러다 숨넘어가겠다.”
난처해하던 에녹이 리리스를 바로 세우고 마주 보았다.
“그러면, 공주야. 오늘 삼촌 집에 가서 따악 한 밤만 자고 오자.”
“하, 한 밤?”
“응. 가서 앞으로 체시어가 지낼 집 좋은지도 보고, 맛있는 거 많이 있는지도 보고.”
“끅. 끄윽.”
“그러고 나서 우리 공주 안심할 수 있으면, 이제 울지 말고 씩씩하게 집에 돌아오는 거야. 알았어?”
“…….”
리리스는 딱 하룻밤이라는 게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훌쩍거리며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치겠네, 진짜.”
에녹이 웃음을 참으며 리리스를 안고 일어났다.
* * *
나는 아빠와 함께 떠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악시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내 눈은, 너무 많이 울어서 화가 난 복어 배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킁. 그런데 삼촌 집 코앞이넹….”
“가깝다고 했잖아.”
내가 머쓱하게 말하자 악시온이 웃었다.
마차로 딱 5분.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 젖혔던 게 살짝 민망한 거리였다.
“우아! 삼촌 집 크구 좋다!”
일단 크기는 통과. 환경은 쾌적.
우리 집만큼은 아니어도, 리브르 공작저는 제법 웅장한 맛이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머나, 우리 공작님도 오실 줄은 몰랐네?”
젊은 나이의 집사 한 명.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 한 명.
악시온 집의 사용인들은 그 둘이 다였다….
‘와, 리코가 왜 여기에는 스파이 못 심었다고 한 줄 알겠다.’
나는 리코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제가 미처 길드원을 투입하지 못한 유일한 곳이 있습니다. 리브르죠. 거기는 무슨 일인지 사용인을 뽑질 않아서….”
거기에 더해, 집은 큰데 몹시 휑했다.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난달까.
“자주 좀 오세요, 공작님. 네?”
“마사, 오랜만입니다. 이제 체시어 때문에 들를 일 많겠죠, 뭐.”
마사라는 아주머니는 우리 아빠와도 친해 보였다.
오기 전에 듣기로는 악시온이 어릴 때부터 돌봐주던 유모랬다.
“세상에나! 둘 다 어쩜 이렇게 인형 같담?”
“아주머니! 우리 체시어 잘 부탁드림니다!”
나는 마사 아주머니에게 공손히 허리를 접어 인사하며 부탁했다.
“맛있는 거 많이많이 해 주세요. 체시어는 토마토 넣어가지구 빨갛게 끓인 고기 스튜를 제일 좋아해요.”
“어머?”
체시어의 뺨이 붉어졌다. 아무래도 그는 극성 학부모처럼 구는 날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사 아주머니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래 봬도 못하는 음식이 없거든요. 우리 도련님도 내 음식 아니면 손도 안 대신다니까?”
다행이다!
마사 아주머니는 주부 9단인 모양이었다.
“하하하, 이제야 집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좀 나겠네요.”
그때 우리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젊은 집사가 말했다.
“저는 카론입니다.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전 앞으로 도련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죠?”
“…안녕하세요.”
체시어를 흐뭇하게 보던 카론이 갑자기 울상 지으며 덧붙였다.
“도련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우리 주인님께서 일주일 내내 저를 얼마나 닦달하셨는지 아세요? 방 꾸며 놔라,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거 사 놔… 우부붑!”
“쓸데없는 소리, 진짜.”
악시온이 황급히 카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나는 카론의 말을 다 들었다.
‘뭐야, 뭐야. 삼촌 완전 체시어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나는 음흉하게 눈을 접으며 히죽 웃었다.
아빠를 보니,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악시온을 쳐다보는 표정이 나랑 똑같았다.
“편한 대로 하라더니. 체시어 안 왔으면 어쩔 뻔했냐? 서운해서 울었겠다?”
“뭔 소리야. 방은 2층.”
악시온은 놀리는 아빠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먼저 2층으로 향했다.
“자, 우리도 얼른 갑시다!”
아빠는 체시어의 짐을 양손에 든 채 우리를 먼저 앞세웠다.
나는 악시온의 든든해 보이는 등을 따라가며 겨우 안심했다.
‘그래, 체시어한테 울 아빠 말고 다른 아빠가 있어야 한다면 솔직히 삼촌만 한 사람이 없지!’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은근히 다정한 스타일!
후작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나 기사 작위를 받은 이후 수많은 전공을 세운 잘나가는 성기사!
7년 전 공작 위(位)를 하사받고 새로운 성을 직접 만든 리브르 가문 1대 가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심의 여지 없는 주인공의 편!
한결 편안해진 맘으로 나는 악시온을 따라 방에 들어섰다.
‘헐.’
그러나 들어오자마자 경악.
방은 바깥보다 더 휑했다.
크기만 크면 뭐 해? 1인용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와, 홀애비 냄새 무슨 일이야?”
뒤따라온 아빠도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들어오자마자 훈련복을 반쯤 뒤집어 깐 악시온이 황급히 다시 옷을 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뭔데 여기까지 따라와? 여긴 내 방이야. 애 방은 옆이다.”
“아하. 진작 말할 것이지. 어쩐지 홀애비 냄새 풀풀 난다 했다.”
“아니, 지는 홀애비 아닌가?!”
아빠는 씩씩거리는 악시온을 무시하고 우리를 데리고 옆 방으로 갔다.
“우, 우, 우와!”
세상에!
나는 체시어의 방을 보자마자 뺨을 붙잡고 탄성을 터뜨렸다.
‘완전 왕자님 방이다!’
악시온 방과는 딴판이었다.
성인 남자 다섯 명이 굴러도 모자람이 없을 법한 거대한 침대.
널찍한 책상과 책이 가지런히 꽂힌 책장.
탁 트인 통유리 창에는 새로 사서 단 듯한 파란색 커튼이.
“내, 내 방보다 더 좋아!”
색깔 맞춰 깔아놓은 하늘색 러그 위에는 큼지막한 1인용 소파와 테이블까지 있었다.
“이야. 체시어, 너 여기 안 온다고 했으면 진짜 우리 부단장 울었겠다.”
아빠가 혀를 내둘렀다.
나는 너무 좋아서 방방 뛰며 체시어의 손을 잡고 방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그러다가 침대 옆 협탁에 세워둔 뭔가를 발견했다.
“어?!”
그건… ‘용사 루이의 마검’이었다!
남자아이들이 선호하는 장난감 랭킹 1위!
“으항항! 체시어, 이것 봐! 삼촌이 너 주려구 샀나 봐!”
내가 이미 선물하긴 했지만.
체시어는 용사 루이의 마검을 보며 부끄러운지 뺨을 붉혔다.
그도 악시온의 마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히힛, 진짜 좋다. 그치? 삼촌 완전 최고야.”
“…응.”
돌아보니,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온 악시온이 문가에 기대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호다닥 악시온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삼촌! 삼촌이 최고예요!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요!”
“뭐? 네 아빠는?”
“아빠는 두 번째요! 삼촌이 제일제일 최고예요!”
“…공주야?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야?”
“하하하하!”
“으항항!”
정말정말 최고야!
* * *
우리는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
마사 아주머니의 요리는 훌륭했고 카론의 입담은 개그맨 저리 가라였다.
원래는 매일 셋이 같이 식사한다는데 꼭 가족 같았다.
이제는 체시어도 함께겠지?
‘우헤헤.’
나는 스튜를 두 그릇이나 먹고 꼭 올챙이처럼 톡 튀어나온 배를 문지르며 펜을 잡았다.
‘오늘의 일기!’
체시어의 책상에 제일 처음 앉는 영광을 누린 건 나였다.
원래는 한 며칠 머물면서 쓰려고 챙겨 온 일기장이었는데….
‘이제 걱정 하나도 안 된다!’
하룻밤만 자고 돌아가도 마음이 놓일 듯했다.
“하아암. 공주야, 뭐 해?”
아빠가 하품을 하며 나를 불렀다.
“나 일기 써!”
“일기?”
“응, 다 썼어!”
나는 일기장을 탁 덮고 돌아보았다.
잠옷 차림의 아빠와 체시어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침대는 아주 컸다.
“다 썼으면 얼른 와. 자게.”
“잠깐만!”
나는 호다닥 달려 나가 악시온의 방 문을 두드렸다.
“삼촌, 벌써 자여?”
“아니.”
“들어갈게여?”
“그래라.”
문을 열어 보니 악시온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쪼르르 그의 앞으로 갔다.
“삼촌!”
“왜?”
“우리 체시어 방에 가서 같이 자요!”
“뭐? 싫어.”
악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힝. 안 돼요?”
나는 부탁하듯 두 손을 꼭 잡고 입을 삐죽거리며 필살기를 날렸다.
“하.”
성공!
결국, 느릿느릿 눈을 껌뻑이며 한참 나를 쳐다보던 악시온이 한숨과 함께 베개를 챙겨 일어났다.
“으항항!”
“하아. 내가 진짜….”
나는 악시온의 손을 꼭 잡고 체시어의 방으로 돌아갔다.
체시어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아빠는, 베개를 가지고 온 악시온을 보자마자 질색했다.
“뭐야? 여기 좁아! 그 덩치로 어딜 와?”
“안 쫍아아!”
“네 딸이 오라고 했거든?”
나는 호다닥 달려가 아빠와 체시어의 사이에 누웠다. 악시온은 체시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으항항!”
“내가 진짜 뭐 하는 짓인지….”
악시온은 중얼거리며 곧바로 눈을 감았다.
나는 체시어와 마주 봤다.
“오늘 진짜 좋았다. 그치? 마사 아주머니가 해 준 스튜도 맛있었구.”
“응.”
“체시어, 행복해?”
묻자, 체시어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 살짝 웃었다.
“응, 행복해.”
“히히. 나도 네가 행복해서 행복해.”
뒤에서 아빠 웃음소리가 들렸다.
악시온도 눈을 감은 채로 웃는 게 보였다.
흠흠. 조금 민망한걸.
그래서 다음 말은, 체시어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그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있잖아, 우리 쭉 행복하자. 나도 너랑 계속 같이 살아갈 거야.”
“계속, 너랑 살아갈게….”
우는 나를 달래면서 체시어가 해 줬던 말.
나는 그 말을 똑같이 해 줬다.
체시어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헤헤. 그럼 체시어, 잘 자! 삼촌도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도 좋은 꿈 꿔!”
“오냐.”
“우리 공주도 잘 자.”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정말, 최고의 하루였다.
* * *
[7월 28일 리리스의 일기
날씨: 햇님이 너무 강함.
체시어 리브르.
체시어에게 드디어 성이 생겼다.
집도 생기고, 왕자님 같은 방도 생겼다.
악시온 삼촌은 체시어에게 아주 좋은 아빠가 되어 줄 것 같아서 맘이 놓인다.
마사 아주머니도 카론도 좋은 사람들이라 다행이야.
집도 코앞이니까 체시어 보러 자주 놀러 와야지.
체시어는 행복할 거다.
그리고 삼촌도 행복하겠지?
왜냐면 이제 삼촌에게는 무덤 파 줄 아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