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95)화 (96/261)

* * *

맴- 맴- 맴-

매미들이 귀 아프게 울어대는 8월 중순의 어느 날.

한여름 날씨는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게 쥐약이었다.

“허억. 헉.”

나는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나무 그네에 매달려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리리스! 괜찮아?”

“뭐야, 꼬맹이. 말라버린 해파리가 됐잖아?”

“빠, 빨리 그거 주구 그네 밀어 조…!”

쌍둥이 오빠들의 손에는 시원한 얼음을 동동 띄운 과일 주스가 들려 있었다.

레온은 얼른 내게 주스를 건네고 그네를 밀었다.

“흐아아아.”

“어때! 좀 살 것 같아?”

“으으응! 오빠 최고!”

테오가 잽싸게 옆자리에 올라타 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줬다.

“진짜 더위 많이 타네? 힘들겠다.”

“응, 나 죽게써….”

나는 아예 테오의 무릎에 누워버렸다.

나무 그늘과 간간이 부는 바람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와, 에어컨 바람 쐬고 싶다.’

과학이 발전한 21세기 지구 신문물을 경험해 보지 못한 몸이었다면 모를까….

죽을 만큼 덥다 보니 절로 에어컨 생각이 났다.

“그런데 삼촌은 어디 가셨어?”

“아빠? 아빠 요즘 바뻐.”

주인공은 원작을 진행하느라 한창 바쁘다.

본업인 마수 토벌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있겠지.’

‘반’으로 시작해서 ‘란’으로 끝나는 그 사업 말이다.

아빠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딸은 간만에 머리에 힘을 주고 원작을 떠올려 봤다.

‘이쯤이면 슬슬 신전 쪽에 손을 뻗칠 때가 됐을 텐데. 울 아빠, 벌써 작업 들어갔으려나?’

원작이 시작하기도 전에 주인공이 미리 양념을 쳐 뒀던 곳이 바로 신전.

뭐, 당연했다.

이 나라는 황제의 뜻이 곧 신의 뜻이라며 정신 나간 신권정치를 일삼아 독재하니까.

황실의 힘을 죽이려면 신전의 힘을 죽여야 하는 법.

참고로 제도에 오자마자 만났던 ‘파빌 신전’의 호호백발 대신관 할아버지는 빌런이다.

‘프리메라인 황제 폐하는 곧 신과 같다!’를 염불 외고 다니며 빵빵한 기부금으로 배때기에 기름칠하느라 정신없는 노인네.

그리고, 에녹 루빈슈타인이 파빌 신전의 대항마로 고른 게―

‘자드키엘 대신관이 지금 몇 살이지? 체시어보다 한두 살 많았던 것 같은데….’

* * *

세라프 신전.

가난한 평민들이 모여 사는 제도 외곽 세라프 거리에 터를 잡은 이곳 신전은 언뜻 처참하게 보였다.

낡아빠진 1층짜리 건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고 바깥에 만든 구호 막사 아래에서는 매일 병자들이 앓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자드키엘 사제님! 게르텔 자작께 보냈던 편지에 답신이 왔어요!”

세라프의 소년 사제, 올해로 열네 살인 자드키엘 테롯은 막사 아래서 병자들을 살피다 말고 환한 웃음과 함께 달려 나갔다.

봄꽃처럼 흐드러진 분홍 머리칼이 여름 햇살 아래 반짝였다.

‘제발 좋은 소식을 보내주셨으면 좋겠는데!’

턱 밑에 흐른 땀을 닦으며 자드키엘이 급히 답신을 열었다.

[세라프 신전 보시오.

답할 가치도 없는 뻔뻔한 요청이었지만, 또 같은 말을 하면서 나를 귀찮게 할까 봐 회신하오.

기부금?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제도 귀족이 거기에 기부금을 내지?

그쪽과 이리 편지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신께서 진노하실 거요.

애먼 사람 이단으로 몰아 화형대 보낼 생각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연락 마시오!]

“에고.”

자드키엘이 곤란한 듯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기부금을 부탁했던 수 명의 귀족 중 어느 곳에서도 긍정적인 답이 오질 않았다.

“사제님! 바쁘세요?”

“앗! 아닙니다!”

구호 막사에서 자드키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다시 막사로 달려갔다.

수십 명이나 되는 병자들은 전부 평민.

원인 불명의 내상을 앓고 있지만, 별다른 조치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쿨럭!”

병색이 완연한 중년 여성이 피를 토하자, 자드키엘이 놀라며 그녀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예, 예. 사제님….”

피를 닦고 이마 위에 물수건을 새로 얹어 준 자드키엘이 뻣뻣한 여성의 팔을 주물렀다.

“힘을 내세요. 곧 나으실 거예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기도뿐이지만….”

“아니에요, 사제님. 쿨럭. 사제님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여성의 인사에 자드키엘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 소년 사제 자드키엘은 특출한 양의 성력을 타고났다. 오랜 공부로 치유 마법에도 능했다.

자드키엘은, 신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자신을 태어나게 하셨다고 믿었기에 기꺼이 병자들을 고치고 돌보는 데 제 능력을 아끼지 않았다.

“제가 조금 더 쓸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치유 마법은, 기본적으로 외상에만 든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내상에는 쓸모가 없었다.

구호 막사에 누워 앓는 이들은 전부 내상 병자들이었다.

“아니에요, 사제님.”

중년 여성은 갈라져 부르튼 입술로도 애써 웃어 보이며 자드키엘의 손을 잡았다.

“죽기 전에 이렇게 사제님께 보살핌받는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귀하신 분께서 저희 같은 사람들을 지켜 주시니 이만한 복이 없지요….”

“…….”

자드키엘은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구호 막사에는 이 여성 같은 병자들이 수십 명.

이들이 삼킬 묽은 죽이라도 넉넉하다면, 이들을 함께 돌볼 인력이라도 더 있다면….

하지만, 신전의 재정은 사제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에도 빠듯했다.

자드키엘은 제 음식을 병자들에게 내어주고 낡은 사제복을 기워 입으면서 약을 마련했다.

‘신이시여.’

아직 열넷밖에 안 된 소년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운 현실.

그러나 자드키엘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까지 모두 사랑하라.

그는, 그것이 신의 뜻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었다.

* * *

‘자드키엘 대신관은 원작에서 처음 등장한 게 성인일 때라,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만약 어렸을 때부터 신전 생활을 했다면, 그는 지금 세라프 신전에 있을 것이다.

제도에는 두 신전이 있다.

하나는 대신관 할아버지가 있는 파빌 신전.

또 하나는 세라프 신전.

두 신전은 같은 신을 섬기지만, 추구하는 교리는 달랐다.

파빌은, 황제를 꼭 신처럼 받들어 모신다.

당연히 황제의 뜻을 따르니 평민들은 사람 취급 안 한다.

반면 세라프는, 황제는 황제고 신은 신.

신의 가르침은 평민들도 굽어살피는 것이라 말한다.

‘이 정신 나간 독재의 시작은 둘을 구분하는 거였지.’

제국 황실은, 황제를 신처럼 모시는 이들을 ‘신교파’, 나머지를 ‘구교파’로 나누며 독재를 시작했다.

당연히 구교파는 배척당한다.

제도 외에도 지역마다 신전이 있고 신도들이 있지만….

‘자기들이 어떤 교리를 따르는지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

평민도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신도들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 뜻을 밖으로 내비쳤다가는?

철저하게 고립된다.

바로, 세라프 신전처럼.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제도에서 대놓고 평민들을 싸고도니….’

난 안 봐도 암담할 듯한 세라프 신전의 상황을 상상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배 아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레온이 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머리에 힘주던 것을 멈추고 물었다.

“오라버니, 왜? 배 아퍼?”

“너 그러니까 얼음 깨 먹지 말랬잖아.”

테오가 얼음까지 싹 비운 레온의 주스 잔을 보며 말했다.

“쟤 집에서도 자꾸 덥다고 찬 거 먹어서 일주일 동안 고생했어. 맨날 화장실 들락거렸다니까. 똥쟁이야, 똥쟁이.”

아하. 배탈인가 보군.

내 옆에 앉은 레온이 아랫배를 쓸며 인상을 찡그렸다.

보다 못한 테오가 말했다.

“가서 살바시온으로 차나 한잔 타 마시고 와.”

“아, 싫어. 귀찮아. 왜 배 아플 때 낫게 하는 마법은 없는 거야?”

레온이 툴툴거렸다.

‘흠, 그러게. 내상 치료법이 딱히 없는 게 이 세계관의 제일 답답한 점이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과학과 의술이 발전한 전생의 세계는 참 편했다.

아프면 병원 가서 진찰받고 약을 먹거나 수술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곳은 의술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다행히 외상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내상은 아니다.

원인을 확실히 아는 경우만 치료를 시도할 수 있다.

그것도 약물치료가 전부.

만능 치료제인 살바시온이 있다고 하지만, 알다시피 황실이 눈에 불을 켜고 유통을 막고 있고.

“레온 너, 리리스랑 계속 붙어있고 싶어서 그러지?”

“어, 맞아.”

레온이 나를 안고 어깨에 힘없이 제 뺨을 비볐다.

“오랜만에 꼬맹이 보러 왔는데 두 시간뿐이잖아. 약 먹으러 갈 시간이 어디 있어.”

간만의 자유시간이 끝나면 쌍둥이 오빠들은 황실에 훈련하러 간다고 했다.

다음 달에 있을 중부 영지 마수 토벌에 나갈 토벌대로 편성되었다나.

“에휴.”

고작 열두 살에 고생하는 레온과 테오가 안쓰러워서 절로 한숨이 났다.

이 미친 세계….

“우리 오빠 아픈 거 싹 나아라.”

“으하하.”

나는 레온의 배를 살살 쓰다듬어 줬다.

물론 진짜 낫는다.

난 외상이고 내상이고 뭐든 고칠 수 있는 프리메라니까.

1sec

똥 한 번 싸면 괜찮을 수준이라 그런가?

항상 오른쪽에 차고 다니는 오스카의 팔찌에는 고작 1초밖에 안 떴다.

‘후후. 이 정도라면 백 번이라도 더 해 주지.’

레온은 내 쓰다듬을 받다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와.”

“왜 그래?”

“진짜 괜찮아졌어.”

“우왕, 정말?”

“어!”

“으항항. 내 손은 약손이라구~!”

“푸하하! 그러게?”

레온이 킬킬거리며 나를 또 끌어안았다.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