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업 준비로 밤늦게야 돌아온 아빠는 수척해진 얼굴로 침대 위에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으어어. 공주야.”
“응!”
“내일 조제프 아저씨 보러 갈까?”
“오잉?”
조제프를, 나랑 같이?
나는 당황해서 아빠의 얼굴을 살폈다.
딸은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며 사업-이라고 쓰고 반란이라고 읽는-에 관심도 못 두게 하려던 아빠 아닌가?
“응? 우리 공주, 조제프 아저씨 꽤 좋아했잖아.”
“그, 그렇긴 해.”
조제프를 만난다면 분명 사업에 관한 얘기를 할 텐데, 나를 데려가겠다니.
의도가 있나 싶어 아빠의 표정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일이란 말이지?’
아빠랑 조제프의 대화를 들을 수만 있다면.
혹시 아나?
내가 도와줄 일이 생길지도.
“응! 나도 갈래!”
“그래, 우리 공주! 간만에 바다도 보자?”
“으응? 바다?”
* * *
바다다!
둘은 철저하게 교류를 숨길 생각인지, 접선지로 남부 해안가 영지를 골랐다.
관광지로 유명한 이곳은 해수욕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 아빠! 나 바, 발 안 닿아!”
“아하하! 괜찮아, 괜찮아. 아빠 있잖아.”
햇살이 내려앉아 눈부신 바다 위.
오늘도 변장한 제임스 브라운 씨는 노란색 오리 튜브를 타고 동동 떠다니는 내 옆에 꼭 붙어있었다.
“우리 공주 이제 저쪽으로 더 가면 상어 있다! 공주 잡아먹는다!”
“아, 안 돼! 멈춰!”
아빠는 킬킬거리며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밀고 갔다.
그래 봤자 아빠 배 정도까지나 차는 깊이였지만.
“으항항!”
재밌다! 나는 오리 튜브에 팔을 걸치고 짧은 다리를 열심히 굴렀다.
“어? 조제프 아저씨다!”
한참 동동 떠다니는데, 모래사장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조제프가 보였다.
반소매 하와이안 셔츠를 차려입은 조제프는 누가 봐도 피서 온 관광객 같았다.
“가자, 가자!”
아빠가 해안가로 등을 밀어줬다.
나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배에 오리 튜브를 단 그대로 달려갔다.
“아저씨이이!”
“리리스!”
조제프는 반갑게 달려오는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이쿠, 뭐 이렇게 많이 컸어?”
“으항항!”
조제프가 내 뺨을 꼬집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오랜만!”
“잘 지내셨습니까.”
아빠와 조제프는 내가 안 본 사이 엄청 친해져 있었다.
“아래쪽을 그새 많이 포섭하셨더군요. 놀랐습니다.”
“말도 마. 요즘 그것 때문에 잠도 못 잤어.”
오케이, 사업 얘기 시작.
‘아래쪽이라면 지방 영주들부터 꼬시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조제프의 품에 안겨 바다를 구경하는 척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 슬슬 신전 쪽을 건드려야 할 땝니다.”
“신전이라.”
역시 조제프. 그래, 이쯤 신전이 나와 줘야지.
“아시다시피 신교파가 세를 장악하고 있는 한 황제의 입지는 굳건할 겁니다. 긴 시간을 들여야겠지만, 구교파의 세를 키워야 하지요. 최후의 순간에는 대신관 자리에 구교파 인물을 올려놔야 합니다.”
아빠가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구교파 사정은 암담합니다. 존속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할 정도지요. 공작님께서 여기에 힘을 좀 실어 주시지요.”
“어떤 식으로?”
“당장은 신도들 입에 풀칠부터 해 주십시오. 굶어 죽어 망할 수준이니까요.”
“그렇게 하지. 몰래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출처도 모를 지원을 받아 구교파 재정 상태가 나아지면 분명 수상하게 여기는 눈들이 나올 테니까.”
“맞습니다. 귀족들이 신전에 기부하는 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니, 기부금을 명목으로 대놓고 재정 지원을 하시면 됩니다.”
조제프가 웃으며 덧붙였다.
“공작님 성정이야 모르는 이들이 없으니, 구교파를 도와도 이상해 보일 일이 없지요. 다만 구교파 쪽만 살핀다는 느낌이 없게, 양쪽으로.”
나는 뭔가 어려운 말을 술술 하는 아빠와 조제프가 멋져 보였다.
‘짱이다. 주인공과 책사의 대화를 실시간 관람하고 있다니….’
내가 비밀을 숨긴 어린이가 아니었다면 못 알아들을 대화겠지.
“좋아.”
아빠가 갑자기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착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구교파 신전에 찾아가서 도움을 주라는 거지? 그래서 나중에는 구교파 신전에서 대신관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하는 거고?”
……?
뭐지. 왜 갑자기 설명봇?
“제도에 구교파인 세라프 신전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되겠어! 하지만 세라프 신전만 도와주면 이상해 보이니까, 나쁜 사람들이 모인 파빌 신전에도 똑같이 기부금을 내면 되는 거군!”
조제프가 눈을 껌뻑거렸다.
“아아. 예, 뭐. 그렇죠?”
그는 굳이 다 알아들은 얘기를 입 밖으로 브리핑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이, 이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아냐?’
분명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쉬운 말로 설명봇이 되어 설명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나는 순간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며 아빠를 슬쩍 살펴봤다.
만면 가득 천진한 웃음.
얼굴만 봐서는 어떤 의도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행히 ‘계시’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신교파가 옳은지, 구교파가 옳은지. 신조차도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조제프가 제법 사악한 웃음과 함께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러자―
“아하! 신이 꿈에 나타나 준다는 그 계시 말이군? 옛날에는 계시를 받은 신도가 대신관이 되곤 했지!”
“아, 예에….”
또 설명봇!
“그래, 맞아. 신은 아무 말도 없지.”
―이었다가, 아빠는 일순 날카로워진 분위기로 멀리 바다를 향해 눈을 던졌다.
“그러니까.”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내가 믿는 것이 곧 정의야.”
나는 잘생긴 아빠의 얼굴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다행히 마지막에는 주인공 포스가 풀풀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 * *
아빠는 지체 없이 며칠 후, 나를 데리고 세라프 신전을 찾았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처참한 신전 풍경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낡아빠진 건물.
천으로 얼기설기 세워 놓은 구호 막사 아래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잔뜩 누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짐작은 했지만….’
병든 평민들을 보살피는 신전 상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암담한 수준일 줄이야.
“…….”
나와 맞잡은 손에 힘이 실려서 슬쩍 올려다보니, 아빠는 여길 보고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그때.
“앗!”
큰 대야를 들고 열심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소년이 우리를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어! 자드키엘 대신관이다!’
결 좋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은색 눈동자.
마치 봄꽃처럼 아름다운 소년을 마주한 순간,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자드키엘 대신관.
#선 #희생 #천사의 현신
―등등의 키워드를 달고 있는, 소설 <도스의 반란> 등장인물 중 제일 착한 사람이다.
“호, 혹시 루빈슈타인 공작 각하 아니십니까?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을까요?”
우리 집 마차 인장을 알아봤는지, 자드키엘이 놀라며 물었다.
“반갑소. 세라프의 주신관을 좀 보고 싶은데. 지금 만날 수 있나?”
“아, 주신관님은….”
자드키엘은 문득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리다 곧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자드키엘은 다 쓰러져 가는 건물 안으로 나와 아빠를 이끌며 말했다.
“저는 사제 자드키엘 테롯이라고 합니다. 미리 연락 주셨으면 뭐라도 준비했을 텐데 귀하신 분들께 대접할 것이 없어 죄송합니다.”
“신전은 기도하러 오는 곳이지. 내가 대접받으려고 여기 온 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아!”
아빠가 다정하게 대답하자, 자드키엘이 수줍게 웃었다.
“이쪽입니다.”
자드키엘이 안내한 방에는 낡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그 위에는 시체처럼 깡마른 중년 여성이 누워있었다.
“어머니, 깨어 계셨네요?”
어머니?
“세라프의 라미사 주신관이십니까? 에녹 루빈슈타인입니다.”
자드키엘이 잽싸게 침대 옆으로 의자를 가지고 오자, 거기에 앉으며 아빠가 소개했다.
“공녀님도 여기 앉으세요!”
“헤헤, 감사합니다.”
천사처럼 웃으며 자드키엘은 내 의자도 가져다줬다.
“아아, 콜록. 루빈슈타인… 공작 각하? 여기에는 어쩐 일로….”
“어머니, 어머니! 잠시만요. 제가 일으켜 드릴게요.”
바쁘다, 바빠. 우리 의자를 가져다준 자드키엘은 후다닥 라미사 주신관이 일어나는 것도 도왔다.
“음, 자드키엘 사제와는 모자 관계입니까?”
“아! 아닙니다. 주신관님은 제게 어머니 같은 분이셔서요.”
아빠가 묻자, 자드키엘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신전 앞에 버려진 저를 주신관님이 거두셨습니다. 직접 먹이고, 입히고, 키워 주셨어요. 어머니 같은 분이 아니라 어머니시죠.”
“아하.”
주신관을 바라보는 자드키엘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색이 완연한 주신관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군요.”
“콜록, 콜록. 아, 예…. 이렇게 예의 없이 맞아야 할 분이 아닌데…. 콜록. 무례를 용서하세요.”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아빠의 너그러운 대답에 주신관은 갈라진 입술로도 애써 웃었다.
‘어떡해….’
만나자고 사람을 일으켜 앉힌 게 미안해질 정도로 짙은 병색.
아빠도, 자드키엘도 주신관을 보며 측은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가 아픈 걸까.’
확실히 알 수는 없을 거다.
흔한 내상도 진찰하기 힘든 의료 후진국 세계관이니까.
‘그래도 고칠 수는 있겠지만.’
나는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깊은 병이라면 생명력을 많이 써야 하겠지.
주신관처럼 아픈 사람들은 많고, 그들을 전부 도울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데….
그럼에도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모른 척해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괴로웠다.
‘한번, 얼마 드는지만 보자.’
생각하면서, 나는 오스카의 팔찌를 힐끔 살폈다.
10sec
…엥?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