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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97)화 (98/261)

뭐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10sec

―진짜 10초.

나는 멍해져서 계속 팔찌를 쳐다봤다.

‘왜? 왜 이것밖에 안 들지?’

놀라워하는데, 아빠가 말했다.

“그냥 딸애랑 기도나 할 겸 왔는데, 주신관이 이렇게 편찮은 상태인지는 몰랐군요. 인사한다고 괜히 불편하게 해 미안합니다.”

“콜록. 아, 아닙니다. 전혀요. 콜록.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기도실이 변변찮아서….”

“괜찮습니다. 기도야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 아, 그리고 기부금을 좀 내고 싶은데.”

“네?!”

듣고 있던 자드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정말이십니까, 각하?”

“제키! 콜록, 콜록….”

주신관은 대번에 눈을 번뜩이는 자드키엘에게 눈치를 주며 말렸다.

하지만, 저 천사 같은 눈동자가 기부금 소리에 번뜩이는 이유는 탐욕 때문이 아니다.

병든 사람들에게 죽이라도 한 그릇 먹일 수 있고, 깨끗한 이불이라도 덮어 줄 수 있게 되어 흥분한 눈이겠지.

그걸 아는 아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부 증서가 있으면….”

“이, 있습니다! 가져다드릴게요! 잠시만요!”

잽싸게 어딘가로 간 자드키엘은 곧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과 펜을 가져와 아빠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허리가 끊어져라 몸을 접어가며 연신 아빠에게 인사했다.

아빠는 종이를 댈 곳이 변변찮아 다리를 꼬고 허벅지 위에 증서를 올렸다.

그리고 펜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0이 한 개, 두 개, 세 개….

무심코 그걸 보던 나는 천만 언저리까지 읽다가 세는 걸 관뒀다.

제임스 브라운 씨의 재력이란….

“여기.”

“정말 감사합니다!”

아빠의 멋진 서명까지 올라간 기부 증서를 받고, 자드키엘이 또 인사했다.

“어, 저기…?”

그러다가 기부금 액수를 확인하고 눈을 깜빡깜빡했다.

“각하, 그… 액수를 잘못 쓰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맞아.”

자드키엘의 놀란 토끼 눈이 귀여웠는지 아빠가 웃었다.

“네, 네? 저, 정말이요?”

“그래.”

자드키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내 큼지막한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찼다.

“이게, 이게….”

“밖에서 보니까, 신전 건물을 좀 보수해야겠더라고. 그리고.”

아빠가 아랫단을 기워 입은 자드키엘의 사제복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덧붙였다.

“사제들 옷도 좀 새로 지어 입는 게 좋겠군. 정기적으로 들러 기부할 테니, 괜히 아낀다고 사제들은 뒷전으로 하지 말고 편히 써.”

“아….”

꾹 다문 자드키엘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그는 곧 터진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아내며 인사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각하!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 * *

세라프 신전의 기도실.

5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비좁게 앉아 아빠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나는 옆에서 그런 아빠를 한참 보다,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신상이 보였다.

여성의 모습을 한, 주신 프리메라.

‘응, 난 기도 안 해.’

신은 없으니까.

아니, 있었어도 지금은 튀었다.

이 정신 나간 나라를 보고 있으면 한숨만 나올 테니.

‘나라도 튀고 싶었을 거야. 이해합니다, 프리메라 님.’

튀기 전에 그래도 마지막 구원이라고 던져둔 게 어쩌면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신은.

‘이미 방 뺀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면, 옛날에는 있었다는 ‘계시’가 여전했을 거다.

뭐, 몇백 년 전에는 신관들의 꿈에 신이 나타나 이 나라의 대소사를 알려줬단다.

이를테면 큰 가뭄이 올 테니 대비하라― 라든가.

어디에서 마수가 나타날 테니 막을 준비를 하라― 라든가.

신의 계시를 받은 신도는 당연히 추앙받았고, 제국을 대표하는 신관 중 제일인 ‘대신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이미 몇백 년 전의 일.

이제는 계시도 없고 대신관 자리도 썩어빠진 놈들만 해 먹는다.

“공주는 기도 안 해?”

기도가 끝났는지 아빠가 물었다.

“응, 나는 안 해.”

“왜?”

“신 안 믿으니까. 신 없어. 있어도 나쁜 신이야.”

“어어, 공주야.”

신전 기도실에서 하기에는 상당히 불경한 언사에, 놀라 두리번거리던 아빠가 웃으며 입술 위에 검지를 붙였다.

“조금 조용히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응, 알겠어.”

“아하하. 우리 공주, 왜 그렇게 생각해?”

“음…. 신이 진짜로 있으면 나쁜 귀족들이 막 평민들 때리구 그러면 혼내줄 거 아냐? 근데 안 그러잖아.”

“오, 그러네?”

“그니까 없지. 만약에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하고 있으니깐 나쁜 신이구.”

아빠는 나를 빤히 보다가 이내 픽 웃었다.

“…그래. 공주 말이 맞네.”

“아빠!”

“응.”

“우리 사제님 쫌 도와주구 갈까?”

“응?”

“사제님 불쌍해. 아까 보니까, 아픈 사람들 막 머리에 수건도 갈아주고 다리도 주물러 주고 하던데. 혼자 하고 있는 거 힘들어 보여. 온 김에 우리도 쪼끔 도와줄까?”

아빠는 또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웃었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막 비비적거렸다.

“울 공주는 진짜 천사라니까.”

* * *

마법 종류에 따라 소모되는 생명력은 천차만별이다.

공격 마법에 생명력이 가장 많이 드는 반면, 치유 마법은 생명력 소모량이 적은 편이다.

그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프리메라의 힘은 이타적이다.

이미 튄 듯하지만, 프리메라는 좋은 신이었을 것이다.

이 좋은 능력을 쓰레기 빌런 황실에게 허락한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아푸지 마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3sec

“목마르세요? 제가 물 가져다드릴게요!”

1sec

“빨리 나으세요….”

4sec

나는 구호 막사에서 자드키엘을 따라 사람들을 돌보며 간간이 손목의 팔찌를 확인했다.

이들을 낫게 하는 데에 생명력이 얼마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우와, 놀랍네.’

10초를 넘기는 이들이….

한 명도 없다.

‘대충은 알 것 같아.’

아예 손쓸 수 없는 불치병에는 당연히 생명력이 많이 든다.

죽을 운명인 사람을 살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곳의 병자들은 아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세계관.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 아니라 속이 아픈 사람들이니 변변한 진찰을 못 받을 뿐.

‘21세기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 만나면 싹 고칠 수 있는 병들이라는 거지.’

아마도, 그래서다.

생명력이 조금밖에 들지 않는 이유.

“앗! 누워 있으세요! 제가 닦아 드릴게요!”

나는 기침하는 아주머니에게로 달려가 수건을 적셔 입가의 피를 닦아 주었다.

“귀하신 분들이 왜 이런 궂은일을 하고 계세요…. 힘드신데….”

아주머니는 저 멀리서 망치질 중인 아빠를 힐끔거리며 놀랐다.

아빠는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 손을 댈 수 있는 신전 건물의 곳곳을 직접 보수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설프게 세워 놓은 구호 막사를 옮기려고 옆에다 새로 뼈대 세우는 중.

“아니에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저랑 아빠보다는 사제님이 훨씬 더 힘드실걸요?”

나는 1분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돌보느라 정신없는 자드키엘을 바라보았다.

돈 없는 평민들은 아프면 세라프 신전을 찾아왔다.

성력 빵빵한 자드키엘이 돈 한 푼 안 받고 치유 마법을 써 주기 때문이다.

마법이 들지 않는 내상 환자들은 이렇게 막사에 들여 돌보고 있고.

‘아직 열네 살이랬나. 진짜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원작대로라면, 지금부터 주인공의 지원을 받고 겨우 호흡기를 단 구교파는 조금씩 성장한다.

지금이야 황제의 뜻과는 정반대의 교리를 내세우는 구교파에 기부라도 하면, 눈총 받기 십상이지만….

‘울 아빠 사업(?)이 커지면서 곧 여기 신도들도 늘어나지.’

에녹 루빈슈타인이 차근차근 이 나라를 바로잡아가는 동안 눈치 보는 사람들은 줄어든다.

구교파 신도들은 하나둘 늘어나고….

끝내는 혁명을 앞두고, 대신관의 자리에는 자드키엘이 오르게 된다.

한… 십 년?

제국민들 태반이 황제는 곧 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이 나라에서, 신전의 권력을 뒤집는 과정은 꽤 오래 걸린다.

하지만.

‘한 번에, 빠르게 뒤집어 보자.’

나는 막사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팔찌를 확인했다.

15min

세라프 신전에 있는 병자들 모두 고치는 데 드는 내 생명력, 딱 15분.

기적을 일으키는 값이라기에는 싸도 너무 싸다.

‘신은 없지만….’

신이 있는 척은 할 수 있다.

이미 사라진 ‘계시’.

그 계시가,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구교파 신전에 내려온다면 어떨까?

“공녀님!”

때마침, 땀이 흥건한 얼굴로 자드키엘이 내게 달려왔다.

그는 깨끗한 물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아 줬다.

“에고, 어떡해요. 힘드시죠? 땀이 많이 나요.”

“저는 원래 더위를 잘 타가지구 그래요! 괜찮아요!”

“그래도요. 진짜 저 혼자 해도 괜찮으니까, 공녀님은 이만 쉬세요. 아, 물도 좀 드시고요.”

나는 자드키엘이 손수 대 주는 물잔에 입을 대고 꼴깍꼴깍 마셨다.

병자들만 봐도 바쁠 텐데, 그는 10분마다 한 번씩 와서 나까지 꼭 챙겼다.

그냥 물만 마셨을 뿐인데 대견한 동생 보듯, 자드키엘의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근데요, 사제님….”

“네!”

나는 뭔가 망설이는 표정을 연기하며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러자 자드키엘이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왜 그러세요?”

“혹시요…. 음. 잠깐만 귀 좀.”

“넵!”

자드키엘이 허리를 숙여 내게 귀를 빌려줬다.

나는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 이거 진짜진짜 비밀인데요. 제가….”

자드키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예?”

이윽고 그가 화들짝 놀라 비틀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