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게 무슨….”
“쉿!”
나는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그리고 멀리서 망치질 중인 아빠 눈치를 보며 소심히 중얼거렸다.
“사제님한테만 말해야 하는데….”
“네에? 저에게만이요? 아, 이게 무슨 일이지. 잠시만요. 이걸, 이걸 어떻게…. 아.”
자드키엘은 머리를 붙잡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고, 공녀님. 이쪽으로.”
비장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 * *
신전 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
아빠가 기특한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공주, 오늘 고생했네.”
“아냐. 나는 하나도 안 힘들었어. 아빠가 더 고생했지, 모. 아빠 대단해. 신전이 하루 만에 이뻐졌어.”
“아하하! 그러엄, 당연하지. 아빠 힘 완전 세잖아!”
“맞아! 으항항, 아빠 최고야!”
“공주도 최고야! 우리 천사! 움움움움~!”
기분 좋아진 아빠가 나를 붙잡고 뺨에 쪽쪽쪽쪽 뽀뽀했다.
이렇게 얼굴을 찐빵처럼 찌그러뜨리는 뽀뽀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봐준다.
왜냐면 지금 내 기분도 아빠처럼 최고니까!
‘이거, 이거. 내 활약으로 혁명이 적어도 5년은 앞당겨지는 거 아냐?’
나는 히죽 웃었다.
이번 신전 방문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안겨 주었다.
“아, 맞다. 공주야!”
“응?”
“아빠 오늘 악시온 삼촌 집에 가야 하는데. 체시어 훈련 있어서.”
“우아, 정말? 나도 갈래!”
“안 피곤하겠어?”
“응응! 나도 체시어 볼 거야!”
간만에 본다! 나는 들떠서 주먹을 꽉 쥐고 붕붕 흔들었다.
“…모야? 왜 그래?”
그런데 아빠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흉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또 뭐지.
“모야….”
체시어 얘기에 너무 좋아했나.
나는 민망해져서, 좋아하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창밖을 봤다.
* * *
리브르 공작저.
나는 연무장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훈련하는 아빠와 체시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체시어는 언제쯤 아빠처럼 소드마스터가 될까?’
체시어야 지금도 강하지만, 더 더 강해져야 한다.
정확히는.
‘우리 아빠를 이길 수 있을 만큼 말이지.’
마침 체시어가 땀을 닦으며 내게 다가왔다.
“체시어어!”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잽싸게 물을 건넸다.
“마셔! 오늘도 열심히 하네?”
“고마워.”
“으히히.”
나는 턱에 꽃받침을 하고, 내 옆에 털썩 앉는 체시어를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으항항. 아냐, 아냐.”
최종 빌런인 황제의 목을 날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이 세계에 끝내 해피엔딩을 가져다줄 주인공.
“히히. 좋아.”
나는 대뜸 옆에 앉은 체시어의 팔을 끌어안고 달라붙었다.
“아.”
물론 1초 만에 칼같이 내쳐졌다.
“…미안. 냄새나. 땀 많이 흘렸어.”
“안 나!”
“나….”
쳇. 그냥 나랑 붙기 싫은 거면서.
나는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너 그런데 울 아빠가 훈련 너무 많이 시켜서 싫다 그랬으면서 왜 이렇게 열심히 해?”
“…….”
체시어는 왠지 흠칫하더니 한 템포 느릿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해야지. 아저씨가 일부러 와 주시는데.”
“흐음.”
뭐, 아빠한테 배워야 빨리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을 테니 좋은 일이지만.
“근데, 체시어.”
“응.”
“소드마스터는 어케 해야 소드마스터가 되는 거야?”
“뭐. 아저씨처럼?”
“응.”
“나도 잘은 모르는데.”
체시어가 내게 반문했다.
“아저씨한테 처음 붙은 말이라며. 너는 몰라?”
“뭐? 소드마스터가?”
“응.”
“진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판타지 소설에 단골 출연하는 그 소드마스터가 이 세계관에서는 에녹 루빈슈타인이 최초였던 모양이다.
‘이건 또 몰랐네.’
역시 능력치며 스포트라이트며 온갖 좋은 건 다 주인공에게 몰빵한 소설답다.
“그렇구나.”
나는 턱을 괴고, 연무장에 있는 아빠를 바라봤다.
체시어를 한참 가르치고도 체력이 남는지 악시온네 사병들 검도 봐 주고 있었다.
신전에서도 일이란 일은 다 하고 왔으면서 피곤한 기색 하나 없다.
저… 괴물!
‘체시어 울 아빠 이길 수 있겠지?’
나는 갑자기 착잡해졌다.
원작의 결말부.
황제에게 먼저 검을 겨누는 것은 우리 아빠다.
황제는 죽지 않으려면 선택지가 없었고, 결국 남은 생명력을 탈탈 털어 아빠를 세뇌한다.
그리고 한 번에 폭삭 늙는다.
‘다 아빠가 짠 판이었지.’
생명력을 다 소모하게 만들어야 프리메라가 허튼짓할 수 없으니까.
결국, 세뇌당한 아빠와 체시어는 서로 싸운다.
무사히 아빠를 제압한 체시어가 황제를 죽이면 끝.
그게 바로 체시어가 소드마스터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아빠만큼 강해야 아빠와 싸우고, 또 아빠를 안 죽이고도 제압할 수 있으니까.
“하아.”
그런데 아빠가 너무 강함….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아빠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데.
“……?”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체시어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넌, 강한 게 좋아?”
“응?”
“그러니까, 아저씨처럼.”
“아아. 모, 쎄면 좋지. 아빠 멋있잖아.”
“…그래.”
밋밋한 대화가 끊기자, 정적.
그러다 체시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너 그런데 아저씨랑은 결혼 못 해.”
“엥?”
“가족끼리는 결혼 못 해.”
“…? 나도 알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람.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거야.”
체시어는 정말 모르는 걸 가르쳐 주는 선생님처럼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나는 어이없었다.
“내가 그걸 왜 몰라? 나 바보 아냐.”
“너, 나중에 커서 아저씨랑 결혼할 거라고 했다며.”
“……?”
뭔 소리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생각하던 나는 이내 깨달았다.
“아아!”
“나는 나중에 아빠랑 결혼할 꼬야!”
―그런 말은 그냥, 아빠와 딸이 으레 하는 입버릇 같은 장난이다.
나도 아빠와 자주 하고.
‘어휴, 이 주접쟁이 아빠. 또 나랑 장난친 거 가지고 울 공주는 나랑 결혼한다고 했네, 어쩌네….’
동네방네 주접떨고 다닌 게 틀림없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는 그냥 장난이지! 나도 가족끼리는 결혼 못 하는 거 알거든? 나 진짜 바보 아냐!”
“…….”
체시어는 어째선지 뚱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훈련하러.”
“너 완전 조금밖에 안 쉬었는데?”
“다 쉬었어.”
“엥. 그러지 말고 우리 푸딩 먹구 나서 하자. 마사 아주머니가 너랑 같이 푸딩 먹구 가랬어.”
“아냐. 너 혼자 먹어.”
체시어는 쥐고 있던 목검을 바로 잡더니 어딘가를 노려봤다.
아빠와 사병들이 있는 쪽이었다.
“빨리 강해질 거야.”
“응? 체, 체시어! 잠깐만!”
그리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다시 훈련하러 가 버렸다.
“우쒸. 푸딩….”
그냥 혼자 먹어야겠다.
간만에 얼굴 보고 알콩달콩 디저트 타임이나 가질까 했더니.
“빨리 강해질 거야.”
빨리 강해지면 좋지, 뭐.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서서, 히죽 웃으며 뒤돌아봤다.
저택의 낮은 담벼락 너머 멀리.
제도 한가운데 우뚝 솟은 크고 높은 황궁이 보였다.
‘곧 난리가 나겠지?’
가장 낮은 곳에 내려온 신의 계시.
평민과 비능력자는 인간 취급도 하지 말라고 역설하던 황제의 가르침이 부정당할 것이다.
황제를 신처럼 받들던 이들은 혼란에 빠지겠지.
이걸 계기로 황제의 절대권력에는 금이 가고, 이내 서서히 무너지게 될 거다.
나는 다시 가벼운 발걸음을 집 안으로 돌렸다.
‘흥, 너만 프리메라냐?’
나도 프리메라다.
* * *
그로부터 사흘 뒤.
황제의 집무실.
“계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바쁘게 서류 위에 펜을 끼적이던 황제, 니콜라스에게 보좌관 라몬이 보고했다.
니콜라스는 눈도 들지 않고 계속 손을 움직였다.
“계시?”
익숙하지도 않은, 아주 케케묵은 단어였다.
그러니까 몇백 년 전에나 있었던 고대 괴담 같은 이야기.
“갑자기 무슨.”
니콜라스가 피식 웃으며 계속 펜을 끼적였다.
“대신관이 철 지난 쇼까지 해야 할 만큼 급한 사정이 있나?”
“그… 대신관에게 내려온 계시가 아닙니다.”
뚝, 한참 움직이던 니콜라스의 손이 멎었다.
그제야 눈을 드니, 보좌관 라몬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뭐지?”
“계시를 받은 것은 세라프 신전의 자드키엘 테롯이라는 소년 사제라고 합니다.”
“세라프?”
세라프 신전이라면 버러지들의 집합소다.
감히 황제의 뜻을 얌전히 따르지 않는 구교파 놈들.
알량한 정의와 희생을 부르짖으며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그러니까, 꼭.
에녹 루빈슈타인처럼 입바른 소리만 하는 것들이 모인 시궁창.
“무슨 계시가 어떻게 내려왔다는 거지?”
“여, 여기 있습니다.”
라몬이 덜덜 떨며 종이 한 장을 니콜라스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나의 신실한 종들의 믿음이 하늘 위 성전에 닿았다.
핍박받으면서도 나의 뜻을 묵묵히 지켜왔던 세라프의 종들에게 축복을 내리노니.
내가 다녀간 이후, 하늘의 달이 처음으로 가득 차오를 때.
세라프의 종들이 아껴 돌보던 모든 병자가, 동시에 씻은 듯이 낫고 자리를 털며 일어날 것이다.]
그걸 읽은 니콜라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대, 대신전에서 이를 해석한 바에 따르면….”
라몬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이달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보름달이 뜰 때….”
“…….”
“…세라프 신전에서 돌보고 있는 병자들이 기적처럼, 동시에 전부, 몸이 낫는다는 계시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