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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99)화 (100/261)

가만히 라몬의 말을 곱씹던 니콜라스가 피식 웃어 보였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계시가 알려진 뒤 많은 귀족들이 놀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앞다투어 세라프 신전에 기부금을 내고 있고요.”

“그래, 그렇겠지.”

파빌리온 제국에서 신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능력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곧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나라이니까.

“보좌관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 저도 믿지는 않습니다. 겁도 없이 대체, 언제 적에 사라진 계시를 들먹이는지….”

“뻔하지 않은가. 사정이 막막하니 입에 풀칠이라도 해 보려는 얕은 수작질이겠지.”

니콜라스가 비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신은 사라졌다.

확실했다.

다음 대의 프리메라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니콜라스는, 신이 드디어 황실마저 버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계시는 무슨 계시.

“우습군. 배가 고파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사정이 참 딱하기는 한데.”

창가로 다가간 니콜라스가 매섭게 밖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 거짓말로 나의 위상에 흠집을 낸다면 곤란하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신이 없는 이 세계에서, 절대자는 황제인 자신이다.

약하고 쓸모없는 인간들은 언제나 계급제가 굳건할 수 있도록 가장 낮은 곳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녀야 한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정의다.

“오히려 잘되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신을 사칭했다면,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겠지. 이 기회에 세라프 신전 놈들을 싹 죽여버려야겠군.”

“예?”

라몬이 흠칫했다.

“폐, 폐하의 뜻에 반하는 이들이라지만, 그래도 구교파의 라미사 주신관이나 몇몇 사제들 전부 고위 능력자인데….”

“그래. 그래서 지금까지.”

니콜라스가 빙글, 몸을 틀었다.

“이단이라고 돌 맞으면서도 아득바득,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어 다닐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라고 왜 제도의 구교파를 치워버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능력자가 우대받는 제국.

고위 능력자를 명분 없이 죽였다가는 도리어 황실의 권위에 금이 간다.

하여 눈엣가시 같은 것들을 그저 내버려두었는데….

‘오히려 기회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의를 감히 위협하는 족속들을 짓밟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하,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니콜라스의 눈이 번뜩였다.

“감히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기만하였으니, 가장 신실한 부하들이 직접 그들을 심판해야 하지 않겠나?”

“가장 신실한….”

중얼거리던 라몬이 물었다.

“성기사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괘씸한 이단들을 심문할 수 있게 성기사들을 모아라.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은 니콜라스가 뱀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심문관은 우리 에녹 경이 맡으면 그림이 참 좋겠지.”

“아! 명민하신 결정입니다, 폐하!”

“보름 후라.”

니콜라스의 눈이 아직 차오르지 않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 계시가 새빨간 거짓임이 확인되는 순간에, 감히 신을 기만한 버러지들을.”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성기사단장의 손으로 직접 화형대에 올리게 해라.”

* * *

<몇백 년 만에 내려온 신의 계시!>

<귀족들, 앞다투어 세라프 신전에 기부금과 구호물자를 보내다.>

<계시의 주인. 세라프 신전의 소년 사제, 자드키엘 테롯.>

<보름달이 뜨는 밤, 정말로 신은 기적을 보여줄 것인가?>

제도는 떠들썩했다.

신이 말한 ‘기적’을 앞두고 모두가 세라프 신전을 주목했다.

* * *

세라프 신전.

계시의 주인, 소년 사제 자드키엘 테롯은 오늘도 어김없이 병자들을 돌보던 중 뜻밖의 방문객들을 맞게 되었다.

척, 척, 척.

대열을 맞춰 신전에 들어서는 일곱 명의 성기사.

푸른 망토와 은빛 갑옷으로 성스럽게 무장한 그들의 분위기에는 한껏 날이 서 있었다.

‘계시 때문인 걸까?’

자드키엘은 긴장으로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눌렀다.

성기사들의 중심에는, 전과 달리 날카로운 눈빛을 한 에녹 루빈슈타인이 있었다.

“사제, 자드키엘 테롯 맞습니까?”

에녹의 왼편에 있던 주황 머리의 성기사가 물었다. 자드키엘이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제가 받았다는 계시와 관련하여 본 성기사단이 조사를….”

“그만.”

에녹이 팔을 들어 기사의 말을 끊었다.

“내가 따로 얘기하지.”

기사들이 당황했다.

자드키엘은 에녹이 무서워 떨고 있는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음을 알았다.

둘은 신전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시를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사제.”

에녹이 곧바로 물었다.

전에 본 다정함은 없었다. 냉철한 성기사의 눈빛에 자드키엘은 덜컥 긴장했다.

“…예. 사실입니다.”

“계시는 이미 몇백 년 전에 사라졌다. 나는, 미안하지만 신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자드키엘이 숨을 삼켰다.

“사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나. 그런데 갑자기, 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적 같은 계시가 내려왔다….”

“…….”

“사제는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에녹은 믿지 않고 있었다.

사실, 많은 이가 에녹처럼 계시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 계시 소동을 벌인 자드키엘 그 본인마저도….

“쇠락하는 신전의 부상을 위해 이런 짓을 벌였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어.”

자드키엘을 설득하려는지, 에녹은 전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버려진 신전에 계시가 내려왔으니 신도들은 늘어나겠지. 귀족들이 너도나도 기부금과 구호 인력을 보내는 것도 알아.”

“…….”

“사제가 믿는 교리는, 이 나라의 절대자인 황제 폐하의 뜻에 반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폐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라프 신전을 돕고 있지.”

“…….”

“이유가 뭔 줄 아나.”

에녹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계시가 사실이라면 정말로 낮은 자들을 보듬는 것이 신의 뜻일 테니 황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고.”

“…….”

“설사 거짓이라 해도, 그저 믿은 죄는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아, 압니다.”

“이 사태를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건 사제야. 그리고 사제의 어머니인 라미사 주신관. 또 이곳 세라프에 있는 사제의 형제, 자매들.”

벌벌 떠는 자드키엘의 모습을 보고, 에녹은 그의 거짓을 확신했다.

안타까웠다.

자드키엘이 왜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 계시를 퍼뜨릴 수밖에 없는지, 그 마음을 잘 아니까.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사실대로 말해야만, 내가 사제를 도울 수 있어.”

“…….”

“다시 한번 묻지.”

떨고 있던 자드키엘이 고개를 들어 에녹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계시를 받았나?”

꼭 불꽃처럼 타오르는….

청명하고 굳건한 눈빛.

푸른 눈동자.

자드키엘은 그것을 보며 그의 딸을, 리리스의 맑고 푸른 눈을 떠올렸다.

‘약속했잖아. 믿기로.’

이내 떨리는 입술이 열렸다.

“예, 맞습니다. 정말로 저는 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

단호한 자드키엘의 눈빛은 몇 번을 물어도 똑같은 대답을 할 것 같았다.

“…하, 젠장.”

에녹이 입술을 짓씹었다.

* * *

세라프 신전에 계시가 내려온 후 15일이 지났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

신이 말한 기적이 일어나는 날이었다.

“아아.”

“아아아아!”

“이이.”

“이이이이!”

“아이고. 잘하네, 우리 공주.”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이를 닦아주는 아빠의 반쪽이 된 얼굴을 가만 살폈다.

‘와. 설마 아빠를 이단 심문관으로 삼을 줄은 몰랐다. 황제 놈, 잔인해.’

내가 이 계시 소동을 일으키며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게 있다면.

바로 황제 놈의 인성.

황제는 계시가 거짓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옳다구나, 이것을 계기로 눈엣가시였던 세라프 신전을 아예 찍어낼 계획을 세운 듯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라프 신전 사람들 전부 이단의 낙인을 찍어 화형대로 보낼 생각이란다.

그리고 그 형을 집행할 사람으로 우리 아빠를 골랐다.

‘나쁜 놈, 진짜….’

자기 말 지지리도 안 듣고 평민들 싸고도는 우리 아빠를 충격요법으로 길들이려는 속이 빤했다.

“자, 이제 잡시다.”

아빠가 웃으며 나를 안고 침대로 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노랗게 꽉 차서 떠오른 보름달에.

“아빠, 무슨 생각 해?”

“응? 아아, 아무것도.”

“거짓말. 아빠 사제님 생각하지? 오늘 아픈 사람들 싹 다 낫는 날 아니야?”

“응, 맞아.”

“히히. 정말 다 나을까?”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

“응. 근데 아빠 표정은 왜 그래? 설마 사제님이 거짓말했다구 생각해?”

아빠는 힘없이 웃으며 침대에 나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다.

“공주는 어떤데?”

“난 사제님 믿어. 엄청 착한 사람이잖아. 거짓말 안 할걸.”

“응, 착한 사람은 맞지. 그런데 공주는 신 안 믿는다며.”

“사제님 말이 사실이면 이제 믿어야지, 모.”

나는 헤헤 웃으며 덧붙였다.

“정말로 아픈 사람들 다 나으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많아지겠지? 사제님 있는 신전에 사람들 막 바글바글! 기부도 많이 하구!”

“그렇겠지…. 그럼 참 좋겠네….”

아빠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이불 속에 꼬물꼬물 들어왔다.

‘미안해, 아빠.’

나는 15일 동안이나 마음고생했을 아빠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구교파의 세력을 천천히 키워 끌고 가야 하는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에게, 이번 소동은 그야말로 대참사다.

뭐, 세력을 키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화형대 위에서 한 줌 재로 사라지게 생겼으니까.

‘응, 근데 그럴 일 없어!’

나는 이불 위로 빼꼼, 눈을 빼고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를 바라봤다.

11시 59분.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초침.

‘카운트다운 들어간다!’

* * *

그 시각.

자드키엘은 어두운 방 안에 앉아, 라미사 주신관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신이시여, 제발….’

그날.

어린 공녀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너무 섣불리 믿어버린 건 아닐까?

“어머니, 부디.”

자드키엘이 질끈 눈을 감았다.

* * *

뎅- 뎅- 뎅-

시계가 자정을 알린 순간.

잠도 못 자고 뒤척이다가 종소리에 흠칫한 아빠의 등을 보며, 나는 슬쩍 손목 위의 시계를 확인했다.

15min

쇼 타임이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