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00)화 (101/261)

* * *

라미사 주신관의 손을 잡은 자드키엘은 초조한 표정이었다.

잠든 주신관은 말이 없었다.

그때.

“사제님! 어, 얼른 나와 보세요! 기적이, 정말 기적이 일어났어요!”

허드렛일 돕는 아이가 울면서 달려 들어와 하는 소리에, 자드키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내 그가 허둥지둥 달려나갔다. 놀란 걸음이 몇 번이고 휘청였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람!”

“어이, 자네도 멀쩡해?”

“나는 말도 못 했는데 멀쩡하게 자네랑 대화하고 있는 거 보면 몰라? 하하하하!”

“진짜 기적이 일어났어!”

“우리 아가! 괜찮니? 이제 안 아파?”

자드키엘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날까, 잠도 못 이루고 기대하고 있던 병자들 전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있었다.

몸도 못 가누던 이들이 평온해진 안색으로 웃고 떠든다.

“아.”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신이 기적을 보여주셨다.

“어머, 어머니.”

자드키엘은 다시 허둥거리며 라미사 주신관의 방으로 달려갔다.

잠들었던 주신관은 어느새 일어나 앉아있었다.

“어, 어머니! 괜찮으세요?”

“제키….”

주신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목과 가슴을 더듬거리며 두어 번 숨을 마시고 또 뱉었다.

그리고는 눈물을 지었다.

“그래, 느껴지는구나. 신께서 내게 기적을 내려 주신 것이….”

“아아.”

자드키엘은 비틀거리며 주신관의 품으로 다가가 무너졌다.

그리고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정말이었어. 정말로 공녀님께, 신이 기적을 약속해 주신 거였어.’

자드키엘은 리리스를 떠올렸다.

웃는 얼굴이 꼭 아기 천사처럼 맑고 사랑스러웠던 분.

‘어쩌면 진짜 천사가 아닐까?’

그래, 이곳을 보살피라 보내 주신 신의 사도일지도 모른다.

자드키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 * *

‘흠, 이제 사제님도 마음 편히 잘 수 있겠지?’

아직 어린 자드키엘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랑 한 약속 지킨다고 꿋꿋이 버텨 줬네.’

믿고는 있었지만, 새삼 고마웠다.

이 미친 세계에 한 줄기 빛 같은 사람….

‘어쩌면 진짜 천사가 아닐까?’

나는 보름 전, 자드키엘과의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 * *

문제의 그날.

“꾸, 꿈에서 신을 만나셨다고요?”

“네!”

“그건 계시입니다! 공녀님, 그건. 그건 가장 신실하고 선한 자에게만 내려오는 신의 축복이에요!”

자드키엘은 벅찬 표정으로 웃었다.

“신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계셨다니!”

아뇨, 튀었을걸요….

“지금까지 계시가 없었던 건, 신도들의 신앙심이 부족하고 마음속 깊이 선함을 갈고닦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자드키엘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공녀님이 선하고 신실하신 분이라 신께서 찾아와 계시를 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태어나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아, 아니 모 그렇게까지….”

일곱 살 꼬맹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감격하는 착해빠진 사람.

그에게 거짓말해야 하는 마음이 참 괴롭구나….

콕콕 찔리는 양심을 모른 척하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사제님! 그럼 기억나는 대로 여따가 써 보께요!”

“네!”

나는 발로 흙바닥을 쓱쓱 쓴 다음, 머리에 힘을 빡 주고 고민했다.

지금이야말로 전생 소울대 출신의 재능을 조금 꺼내 써야 할 때!

참고로 전공 역사학에 부전공 국문학이었다.

‘믿을 만하게. 있어 보이게. 그럴싸하게. 일곱 살 어휘력으로는 절대 지어낼 수 없는, 진짜 계시를 받은 것처럼.’

나와라, 부전공 국문학도의 영혼아!

<나의 신실한 종들의 믿음이 하늘 위 성전에 닿았다.

핍박받으면서도 나의 뜻을 묵묵히 지켜왔던 세라프의 종들에게 축복을 내리노니.

내가 다녀간 이후, 하늘의 달이 처음으로 가득 차오를 때.

세라프의 종들이 아껴 돌보던 모든 병자가, 동시에 씻은 듯이 낫고 자리를 털며 일어날 것이다.>

즉석에서 지어낸 내 그럴싸한 거짓 계시를 읽은 순간.

자드키엘은 굳었다.

“마, 말도 안 돼.”

“신님이 그러시는데, 여기 있는 아픈 사람들 싹~ 다 낫게 해 주신댔어요!”

“아아.”

입을 막고 비틀거리던 자드키엘이 끝내 털썩, 주저앉고는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 사제님? 울지 마세요….”

“감, 흑, 감사합니다. 공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자드키엘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한참을 더 울었다.

중간중간 어머니,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렸다. 주신관이 회복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감격인 모양이었다.

“저, 근데. 사제님. 저랑 하나만…. 약속해 주시면 안 돼요?”

“흡. 무엇을요?”

겨우 울음이 멎은 자드키엘이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나는 난처한 척 말했다.

“제가 꿈꾼 거는 비밀로 해야 해서요….”

“예? 왜죠? 계시를 받은 것은 평생에 다시없는 축복입니다. 대신관님이 계신 파빌 신전에 가서 공녀님이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얼른 알리셔야 해요.”

자드키엘은 내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모두가, 신께 선택받은 공녀님을 사랑하고 우러러볼 겁니다.”

“헉! 아녀, 아녀! 그런 거는 됐구요. 이거, 꿈, 사제님이 꾸신 거로 해 주세요!”

“…예?”

멍하니 멈춰 있던 자드키엘이 곧 손을 힘차게 내저었다.

“절, 대!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요! 감히 신께 닿지도 못한 제가, 공녀님께 온 계시를 가로채라니요?!”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욕심 많은 대신관 할아버지라면 모를까.

자드키엘은 콩만 한 일곱 살 꼬맹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를 넘겨준다는 걸 날름 받아먹을 인성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덧붙였다.

“어? 근데 신님이 꼭 그렇게 하라구…. 세라프 신전에 있는 자드키엘 사제님한테 이렇게 말하라구 하셨는데…?”

이미 튄 신쯤이야 백 번은 더 팔아도 되지, 뭐.

순진한 자드키엘은 내 말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예? 그, 그게 정말인가요?”

“네에. 제가 꿈꾼 거는 꼬옥 비밀로 해야 한다구. 안 그럼 축복도 안 주고, 저도 혼내신다구 했어요.”

“오, 대체 왜.”

나는 자드키엘의 팔을 잡고 흔들면서 재촉했다.

“사제니임. 비밀 꼭꼭 지켜 주실 거죠?”

“…….”

철석같이 내 말을 다 믿던 그는 이제야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사실 의심은 진작 해야 했다.

신이 정말 계시를 주고 싶었다면 직접 자드키엘의 꿈에 나왔으면 될 일.

굳이 한 다리 건너 거짓말하라고 시킬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저 계시를 봐, 대박임! 저런 말이 꼬맹이 입에서 나오겠냐고!’

자드키엘의 시선이 흙바닥 위의 계시로 향했다.

역시 일곱 살 꼬맹이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눈빛에 묘한 확신이 찼다.

‘됐어!’

나는 틈을 노려 한 번 더 보챘다.

“사제님? 비미일….”

“아아, 네! 그럼요! 공녀님이 혼나시면 안 되니까, 비밀은 당연히 지켜드릴게요. 하지만 제가, 제가 감히 신의 계시를 가로챌 수는 없는데….”

“가로채는 거 아니에요! 신님이 자드키엘 사제님을 콕 찝어가지구 꿈을 주라고 하셨다니깐요?”

자드키엘은 입술을 물고 또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심이 섰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녀님.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얼마나 가슴 졸였을까.

계시는 자기가 받은 것도 아니지, 그런데 내가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무장한 성기사들이 틈만 나면 찾아와서 거짓말이면 잡아간다! 하고 겁을 주지….

일곱 살 꼬맹이 말을 너무 섣불리 믿은 건 아닐까? 의심하는 마음은 타들어 가지….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사제님!’

나는 속으로 인사하고 마음 편히 눈을 감으려다, 아직도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빠.”

“어어.”

돌아본 아빠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몇 분 새 또 얼굴이 반의반 쪽이 되어 있었다.

“어휴. 일케 잠 한숨 못 자면 낼 어쩌려구? 아픈 사람들 싹 나은 거 보러 가야 하잖아.”

“응, 자야지. 아빠가 뒤척거려서 신경 쓰였어? 미안해. 공주도 얼른 자자.”

“아냐. 글구 아빠, 걱정하지 마.”

나는 아빠 품으로 파고들었다.

“사제님은 착한 사람이니까, 진짜 신이 기적을 주셨을 거야. 그니까 걱정 말고 코 자구 내일 사제님 보러 가자.”

“…….”

잠시 대답이 없던 아빠는, 곧 작게 웃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래, 그러자.”

* * *

이튿날.

황제, 니콜라스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곧 이단 심문관인 에녹이 보고를 하러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그 입바른 소리만 해 대는 잘난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겠지.

버러지들이 화형대로 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진 못할 성정이다.

어쩌면 그들을 살려 달라 자신과 협상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야 고맙지.”

고개를 젖힌 니콜라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목숨 몇 개 살려주는 대가로 에녹에게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자신은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장사였다.

그때.

“폐, 폐, 폐하!”

얼마나 다급했던지, 보좌관 라몬이 집무실 문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열고 쳐들어왔다.

“뭐지?”

니콜라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사색이 된 라몬의 표정.

그걸 본 순간, 니콜라스는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무슨―”

똑똑.

라몬이 입을 열기도 전.

활짝 열린 집무실 문을 노크하며 누군가 기척을 냈다.

에녹이었다.

‘왜….’

수십 번 상상했던 표정이 아니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분명, 그 잘난 얼굴이 뭉개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에녹은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작게 묵례하며 말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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