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01)화 (102/261)

그대로 걸어 들어온 에녹이 니콜라스의 앞에 서서 말했다.

“폐하께서 명하신 신전 조사를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

“주신 프리메라의 계시가 실제로 이루어짐에 따라, 저희 성기사단은 세라프 신전을 이단으로 조사할 명분이 없게 되었습니다.”

“…뭐?”

순간, 멍해졌다.

니콜라스는 한참 침묵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돌려 에녹의 뒤에 선 보좌관 라몬을 바라보았다.

벌벌 떨고 있다.

그 반응을 보니,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계시가… 이루어졌다고?”

니콜라스는 아주 느릿느릿, 눈을 껌뻑였다.

“예. 대신전에서 해석한 대로, 금일 세라프 신전에서 돌보던 225명의 병자가 나았고 지병이 있던 주신관까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

“축하드립니다, 폐하.”

축하? 니콜라스의 입이 가만 벌어졌다.

“여전히 신이 건재하심이 증명되었으니.”

에녹은 웃으며 덧붙였다.

“영광스러운 이 제국의 주인이신 폐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까.”

“하, 하하하…. 그래, 그렇지….”

건방진 놈.

웃는 얼굴로,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

니콜라스는 새하얘진 시야를 바로잡으려 눈을 부릅떴다.

“그랬단 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서서히 현실을 자각해가는 동안 분노가 치솟았다.

“…수고, 했군. 이만 가 보게.”

“예, 폐하.”

에녹이 작게 묵례하고 나가자―

쨍! 쨍! 쨍!

동시에 주체 못 한 화가 넘쳐 유리창이 깨져 나갔다.

“폐, 폐하. 고정하시지요.”

보좌관 라몬이 허둥지둥 엎드렸다.

“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지?”

한계까지 치뜬 니콜라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계시가 실현되었다고?

신이 사라지지 않았단 말인가?

“허어, 허, 하아….”

목이 죄이는 느낌이었다. 목깃을 꽉 쥔 니콜라스의 눈이 책상 위에 놓인 신상에 닿았다.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주신 프리메라상.

“…하, 하하하, 하하.”

알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황실에 나오지 않는 프리메라.

보란 듯 구교파 신전에 기적을 내린 신.

신은 여전히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나, 다만 황실을 버린 것이었다.

“이, 빌어, 먹을….”

니콜라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상을 쥐었다.

쨍―!

이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벽에 내던진 신상이 산산이 조각났다.

“빌어먹을 년….”

발치에 굴러와 나뒹구는 신상의 목을 노려보며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신으로부터 자신의 정의가 부정당했다.

이제는 하나둘씩, 그토록 굳건히 지켜온 정의를 의심하기 시작할 테지.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 * *

세라프 신전의 병자들이 말끔히 나은 지 일주일째.

제도는 술렁거렸다.

신이 건재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많은 사람이 기뻐했고, 몇몇 귀족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도 세라프 신전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우헤헤.”

“뭘 그리 음흉하게 웃고 있냐?”

“엇, 스승님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공부방에 등장한 오스카가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네가 했냐?”

“네?”

“뭘 또 모르는 척 되물어?”

아하. 이번 계시 소동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넹.”

“똑똑하네.”

“정말요? 저 잘했어요?”

“어.”

오스카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눌렀다.

“황제를 속일 꾀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겠던걸. 이 스승님의 마음이 아주 뿌듯하다.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꼭 말하고 다녀라.”

“오잉. 황제 폐하를 속여요?”

무슨 소린가 싶어 묻자, 오스카가 쓱 눈썹을 세웠다.

“뭐야. 노린 거 아니었어?”

“네?”

“다음 프리메라가 계속 안 나오고 있잖아. 황제가 대가리 달린 놈이면 언제든 의심하지 않겠냐. 혹시 다른 데서 프리메라가 태어난 건 아닌지, 하고 말이야.”

“아, 그렇죠! 맞아요.”

프리메라가 황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래서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내 존재를 의심받지 않고 버티는 중이지만….

‘맞아. 언제든 황제가 의심할 수 있지. 그래서 난 무서운 거고.’

혁명이 원작보다 빨리 진행됐으면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얼른 황제가 사라져야 나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으니까.

“다음 프리메라가 안 나와서 안 그래도 신이 황실을 버렸네 어쩌네 말 많은데, 때마침 황실의 가르침을 싹 부정하는 신의 계시가 내려왔잖아.”

오스카가 킬킬거리며 덧붙였다.

“누가 봐도 신이 돌아선 상황 아니냐? 황제도 아마, 신이 자기를 버린 거라 생각할걸. 설마 다른 집에서 나온 프리메라가 이 소동을 일으켰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말이지.”

“오오! 그럼 황제 폐하는, 신님이 화나서 이제 프리메라가 완전 사라졌다구 착각한다는 거네요?”

“바로 그거지. 아니, 그런데 너.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거 아니었냐고.”

“아, 모. 딱히 그걸 노린 거는 아니구….”

고작 생명력 15분으로 아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겸사겸사 혁명도 앞당길 수 있으니 벌인 일이다.

“그럼?”

“으음.”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그냥 아픈 사람들이 나으면 좋으니까요. 근데 갑자기 나으면 쫌 이상하니까 사제님이랑 거짓말 친 거구….”

그렇게 대답하자, 오스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왜요?”

“길 가다 아픈 사람들 보이면 다 고쳐 주고 넌 내일모레 무덤 들어갈래?”

“아, 아녀…. 보니까 고치는 데 쫌밖에 안 들더라구여. 딱 15분만 썼어요.”

“지금 적고 많고가 중요해? 너, 자라는 거 티 안 날 정도라면 얼마든지 더 썼겠다?”

“…….”

“다음부터 이딴 짓 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오스카의 표정은 아주 무서웠다.

하지만.

‘이거, 나 걱정하고… 있는 거지?’

언젠가부터 오스카의 속내는 투명하게 보였다.

“책 펴.”

나는, 금세 기분이 상해버린 오스카의 표정을 살피며 고민했다.

‘한번 도와달라고 말해 볼까?’

원작에서 오스카는 끝까지 아빠를 돕지 않았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오스카가 힘을 보태 준다면 아빠는 훨씬 더 빨리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거다.

“책 안 펴?”

“아아, 네!”

나는 얼른 책을 펼치고 소심히 오스카를 쳐다봤다.

“뭘 봐?”

“화나셨어요?”

“어.”

“제가 사람들 살리려구 생명력 써서요? 그치만 저 어차피, 안 들키려면 조금씩 능력 써서 얼른 커야 하는데….”

“그러다 그딴 짓에 익숙해지는 게.”

오스카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싫은 거야.”

“…….”

“네 아빠가 가정교육 어떻게 하는지는 잘 아는데, 적당히 걸러 들어.”

“…….”

“배고픈 놈한테 네 빵 쥐여 주고 추운 놈한테 네 옷 벗어 주면, 넌? 굶어 죽고 얼어 죽기밖에 더 해?”

“아, 네에. 알겠어요.”

“이제 진짜 책 펴.”

“네, 스승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펜을 끼적이며 또 슬쩍 오스카의 눈치를 봤다.

그는 내가 문제를 풀고 있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 거만한 포즈로 다리를 착 꼰 채 무심한 눈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할 말 있음 해라.”

“헉.”

눈이 옆에도 달렸나.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책으로 돌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혹시요. 혹시… 황제 폐하 좋아하세요?”

“아니.”

“그럼 싫으세요?”

“어.”

그 대답에 나는 흥분해서, 번쩍 고개를 돌려 오스카를 봤다.

“그, 그럼 우리 아빠는요?”

“황제보다 더 싫어.”

“네에에?”

황제 싫단 소리에 기대했는데.

우리 아빠가 더 싫단 대답에 나는 축 늘어졌다.

“그런 건 왜 묻는데.”

“우리 아빠 왜요? 우리 아빠 엄청 착한 사람인데. 아빠는….”

“어. 그래서 싫어. 나랑 안 맞아.”

오스카는 단호했다.

“그런 건 왜 묻냐니까?”

“스승니임.”

“뭐.”

“그럼 혹시… 울 아빠가 나중에 스승님한테 가서 몬가 부탁하면, 그럼 안 들어주시겠네요?”

책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오스카가 픽 웃었다.

“안 들어주실 거죠? 그쵸?”

“어. 뭐가 이쁘다고 들어줘.”

“하아아.”

“부탁하고 싶으면 네가 해야지.”

……?

축 처졌던 나는 번뜩 눈을 떴다.

“제 부탁은 들어주시는 거예요?”

“어.”

“우와! 무슨 부탁을 해도 다요?”

“어.”

“스, 스승님! 그러면 제 부탁은요. 스승님이 우리 아빠가 나중에 몬가 부탁하면 들어주시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정말?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오스카를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무슨 부탁이든 다?”

“알았어.”

“정말이죠? 약속하신 거예요?”

“알았다니까.”

잔뜩 흥분한 나를 보며 또 웃은 오스카가 책을 턱짓했다.

“빨리 마저 풀어.”

“네에에! 저 오늘 문제 백 개 다 풀게요!”

무려 그 오스카를 포섭했는데 문제 백 개가 대수랴!

나는 머리에 힘을 빡 주고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리리스.”

“네!”

부르는 소리에 신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오스카는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대답하네.”

“네?”

무슨 소리지.

“저 원래도 대답 잘했는데요?”

“오냐. 마저 풀어라.”

오스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자기 책으로 눈을 돌렸지만.

“…….”

나는, 펜을 다시 쥘 수 없었다.

‘왜일까….’

가끔씩 나를 향해 보이는 애틋한, 아주 오래된 듯한 눈빛.

놀라울 만큼, 내게는 무조건적으로 비치는 호의.

오스카를 만날 때마다 몰라볼 수가 없는, 나를 향한 애정의 이유가 무엇인지….

‘답답해.’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 속 시원히 물을 수는 없었다.

어떤 질문이 그를 속박하는 금제를 건드릴지 모르니까.

‘궁금해. 오스카랑 나는 대체 무슨 사이였는지.’

내 능력으로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오스카에게 어떤 존재였고, 또 오스카는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제발, 알고 싶어.’

나는 팔찌를 보며 이미 수천 번 했던 생각을 또 했다.

-

그러나 언제나처럼, 같은 반응.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스승님.”

“어.”

“저요, 스승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어요.”

오스카가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든지, 언제든지 대답할게요….”

“…….”

“그러니까 많이많이 불러 주세요.”

“…….”

오스카는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한참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웃음이었다.

* * *

나는 능력을 쓰며 많이 자랐다.

양성소에 있을 때 부쩍 컸고.

나와서는 틈틈이 능력을 써 가며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또래와 성장 속도를 맞춰 가는 중이었다.

무사히 내 정체를 숨길 수 있게.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크, 큰일 났어….’

나는 거울 앞에서 입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방문 열리는 기척에 호다닥 침대로 달려갔다.

“공주야! 아빠 왔다!”

“으응.”

잘 채비를 하고 들어온 아빠가 칫솔을 흔들었다.

“자, 우리 공주 치카치카하고 자야쥐!”

“안 해도 돼! 아까 했어.”

“엥.”

“호, 혼자 했어. 깨끗하게 구석구석….”

“…….”

아빠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나 이제 잘래! 졸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아빠는 말이 없었다.

긴장으로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오늘은 싫어! 무섭단 말이야!’

저벅저벅, 다가오는 아빠의 걸음이 느껴졌다.

아빠는 침대에 눕지 않고 내 옆에 선 것 같았다.

계속 말이 없어서, 나는 슬그머니 이불을 내려봤다.

“힉!”

아빠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왜, 왜…?”

“우리 공주.”

나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아빠! 오늘만은 눈치 없는 주인공 해 줘!’

아빠는 음흉하게 씩 웃더니, 이내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말했다.

“이 흔들리는구나?”

“흡.”

…아, 제발 누가 주인공 눈치 좀 뺏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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