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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03)화 (104/261)

* * *

10월 초, 어느 날.

나는 우리 집 연무장에서 테오를 구경하고 있었다.

“흐음.”

쉬이익―

새카만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쉬이익―

이번에는 새파란 검기가 나갔다.

“…큰일 났네.”

소년병들에게는 월례행사와도 같은 마수 토벌을 앞두고, 테오는 근심이 많았다.

‘에궁. 어떡해.’

와중에도 내 얼굴 본다고 우리 집에 와서 훈련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오라버니이이!”

“으응, 리리스.”

테오가 내게 터덜터덜 다가왔다.

“오라버니 괜찮아?”

“아니. 오빠 큰일이야. 어떡하지?”

“검에서 파란색 슝슝 안 나가서?”

“응. 나 저번 달 토벌 때도 갑자기 까만색 나가서 괴물 못 잡았어.”

테오는 성력과 마력의 양이 50 대 50인 기이한 체질이다.

성력계인지 마력계인지 확실히 구분 지을 수 없었고, 능력도 제멋대로 발현되었다.

어떨 때는 성력을 입힌 푸른 검기가.

또 어떨 때는 마력을 담은 새카만 검기가.

“에휴.”

그건 꽤 큰 문제였다.

‘마수 잡을 때는, 마력계 능력은 비효율적이니까.’

하지만 소년병 출정은 그리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소년병들은 훗날을 위해 전쟁터에 적응할 수 있도록 출정할 뿐.

그들을 지휘하는 현역들이 함께 가는 것이 원칙이고, 위험한 곳에는 배치되지도 않으니까.

“이번에도 오빠 까만색이 자주 나가면 어떡하지, 리리스?”

나는 축 처진 테오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괜찮아, 오라버니. 내가 파란색만 슝슝 나가라구 기도할게. 그리고 오빠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라고도 기도할 거야!”

“으하하.”

위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환히 웃은 테오가 나를 안고 내 뺨에 자기 뺨을 비비적댔다.

“고마워, 리리스. 오빠 씩씩하게 갔다 올게.”

* * *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힘의 섭리에 따라, 아래 세대의 프리메라는 결코 위 세대의 프리메라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한쪽은 상대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황제 니콜라스는, 두 프리메라의 싸움에서 명백한 약자이자―

궁지에 몰린 쥐였다.

* * *

신이 기적을 보여준 지 한 달.

제도는 술렁였으나 아직 황제에게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대륙 통일이라는 황제의 오랜 염원이 더욱 멀어져 버린 상황.

궁지에 몰린 쥐는,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보좌관.”

니콜라스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뺨을 쓸어내렸다.

“예, 폐하!”

오늘도 그가 분노할 만한 보고를 가져온 라몬은 절로 몸이 떨렸다.

“나 늙은 것 같나?”

“예, 예?”

니콜라스가 돌아보았다.

여전히 황제는 젊고 아름다웠으나 며칠 새 나이가 든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또 뭔 짓 했나.’

라몬은 생각했다.

황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뭔가 능력을 쓴 모양이지.

“아닙니다. 여전히 젊고, 정정하십니다.”

“그래?”

니콜라스가 다시 거울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황제는 미쳐버린 걸까?

제도가 뒤집힌 와중에도 태연한 모습이 이상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폐하, 매우 상심하실 만한 일이나.”

라몬이 마른 입술을 한번 쓱 훑고 말했다.

“일주일 전, 남부 올덴으로 성수 토벌을 나갔던 토벌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입니다.”

“뭐라?”

니콜라스가 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라몬은, 왜인지 놀란 기색 하나 없어 보이는 니콜라스가 의아했다.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전멸?”

“예, 예…. 사령관은 도스 마검사단장 사이언 경이었습니다. 그 포함 도스 마검사단 5인, 그리고 2군 콰르토 마검사단과 3군 셉티마 마검사단도 전부….”

“이런 비극이 있나!”

…뭐지? 기뻐하는 건가?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달리, 니콜라스는 희열을 느끼는 듯 보였다.

“성수들이 그렇게 강한가?”

니콜라스가 침통한 척 물었다.

성수(聖獸).

성력을 지닌 신성한 짐승들이 있다.

오랜 옛날에는 마수를 대적하는 성스러운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성수들은 그 수가 현저히 줄었고 남은 것들은 오염되기 시작했다.

하여 지금에 와서는 그저 성력을 지닌 짐승일 뿐.

지능을 잃고 인간을 공격하며 땅을 파괴하는 마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토벌은 어떻게 되었나? 도스 5인이 전사했는데 토벌에는 성공했겠지?”

“아뇨, 폐하.”

라몬이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피 묻은 종이를 열어 읽었다.

“사이언 경이 전령을 통해 마지막으로 남긴 소식입니다. 여기 적힌 바에 따르면, 성수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합니다. 보통의 성수들과 달리 훨씬 강하고 몸집이 크며,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으나 쉴 새 없이 새로 생겨나고….”

“세상에!”

라몬은 더 보고하지 않고 니콜라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확실했다.

니콜라스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한 사람 같았다.

도스가 다섯이나 죽었는데 아랑곳하지 않는 반응 하며….

일견 제 뜻대로 되어 기뻐하는 듯한 표정까지.

“실로 위급한 상황이 아닌가! 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도스단 수장들을 소집하게! 어서!”

* * *

오염된 성수들로부터 발발한 국가 위급 상황.

전사한 마검사단장 제외, 도스단 수장 9인이 긴급 소집되었다.

“전부 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에녹은 반박했다.

1군부터 3군까지의 현역 능력자들 전부, 남부 올덴으로 향하라.

황제의 상명은 터무니없는 전력 낭비였다.

“도스 5인이 전멸했네. 어디 이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위급 상황인 것은 맞습니다만, 전력 낭비입니다. 제가 지휘를 맡겠습니다. 1군 성기사단, 그리고 2, 3군 마권사단과 마법사단만 데리고 출정하겠습니다.”

“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성수를 토벌하는 데 성기사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모르나?”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무사히 토벌 마치고 오겠습니다.”

“내가 자네의 능력을 모르나?”

니콜라스가 한달음에 에녹 곁으로 다가갔다.

나머지 단장들은 빙 둘러앉아 그저 침묵하며, 둘의 언쟁을 지켜볼 뿐이었다.

“정말 몰라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냔 말일세!”

“…….”

“자네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제국 최고의 전력이야. 나의 가장 소중한 검. 그런 자네가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럴 일 없습니다.”

“내게는 자네의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하네. 지금 올덴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그 사지에 자네를 홀로 보내?”

“폐하.”

“마검사단이 전멸했네. 그렇다면 2군, 3군 마력계 능력자들을 아무리 보내 봐야 의미 없다는 말이지. 결국 자네 혼자, 모든 걸 짊어져야 한단 말일세.”

“…….”

“그 꼴은 절대 두고 못 봐. 나는 자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군대를 꾸릴 걸세. 현역들 전부 데리고 올덴으로 가게.”

“안 됩니다. 그러면 제도가 비게 됩니다. 제도의 위급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병력은 항시 남겨두어야 합니다. 3군들이라도 제도에서 대기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때 도스 마권사단장, 알렉세이 앙트라세는 언쟁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저 미친놈이 무슨 꿍꿍이지?’

황제의 출정 명령은 에녹의 말마따나 정말로 터무니없었다.

마검사단이 전멸한 유례없는 위급 상황이라고는 하나, 그곳에 모든 병력을 쏟아버리다니.

“전부, 출정하게.”

“대체!”

못 참고 벌떡 일어난 에녹이, 두 명의 궁사단장을 가리켰다.

활을 쓰는 능력자들.

그들은 방어에 특화된 수성(*守城:성을 지킴) 병력이다.

“토벌대에 수성 병력인 궁사단까지 포함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폐하?”

“자네를 위해서네.”

“하.”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계엄령이 선포된 국가 위급 상황에서, 최고 사령관은 황제인 나야. 아무리 자네라도 내 결정을 따라야 하네. 더 지체하지 말고 움직이게.”

“…….”

에녹의 어깨가 떨렸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분노였다.

이윽고 에녹이 노한 걸음을 돌려 빠르게 떠나갔다.

* * *

오염된 성수들을 토벌하러 나갔던 마검사단이 전멸했단다.

위급 상황이었다.

“아, 아빠아.”

나는 집에 오자마자 출정 준비를 하는 아빠의 뒤에 졸졸 따라붙었다.

“어어, 공주야.”

아빠는 답지 않게 초조한 눈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빠 지금, 고모랑 고모부랑 삼촌들이랑 괴물 잡으러 가거든?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어.”

“으응. 아빠 근데, 근데 다치면 어떡해….”

“에이, 아빠가 왜 다쳐. 공주, 아빠 엄청 센 거 알잖아.”

“그건 그런데….”

도스 마검사단장, 사이언 마르텐 경이 죽었다고 한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원작에서 체시어가 마검사단에 정식 입단할 때도, 끝내 혁명을 마쳤을 때도 살아 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

원래는 분명 살아남아야 했을….

“무, 무서워. 몬가 엄청 쎈 괴물인가 봐. 아빠 다치면? 혹시 죽으면 어떡해?”

“아니야, 공주야. 아니야.”

아빠가 벌벌 떠는 나를 꽉 안아 달랬다.

“아빠는 공주 혼자 두고 절대 안 죽어. 다치지도 않을게. 따악, 두 밤만 자고 있으면 아빠가 얼른 괴물 다 잡고 돌아올게.”

“…….”

“대신 아빠 없이 우리 공주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꼭꼭 있어야 해.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있어. 할아버지도 아빠만큼 엄청 세거든. 알았지?”

“응….”

“약속.”

“약속….”

나는 아빠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고 겨우 대답했다.

“내 새끼.”

씩 웃은 아빠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빠 얼른 다녀올게.”

* * *

황제의 명령대로, 제도에 있던 현역 군인들이 전부 올덴으로 향했다.

그 시각.

“아, 정말….”

니콜라스는 거울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보좌관, 라몬은 그 수상한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능력을 쓰고 있는 거람.’

모르긴 몰라도, 멀쩡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은 아닐 것이다.

황제는 그런 인간이니까.

“폐하!!!”

그때, 전령이 다급한 표정으로 방에 들이닥쳤다.

니콜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았다.

“오오, 왜! 무슨 일인가!”

“위, 위급 상황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성수들이 중부 위르겐 영지를 습격하고 제도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합니다!”

“뭐라!”

니콜라스가 비틀거렸다.

중부 위르겐이라면, 제도와 바짝 붙은 지역이다.

“이럴 수가…. 대체 왜 성수들이 각지에서 미쳐 날뛰느냔 말이야! 지금 제도를 방비할 현역들은 모두 남부 올덴에 가 있지 않은가….”

라몬은 중얼거리는 니콜라스를 보며 혼란에 빠졌다.

‘이번에도 전혀 안 놀라는 것 같은데?’

니콜라스가 다급한 척 물었다.

“라몬, 1군부터 3군까지 소년병의 수가 얼마나 되지?”

“소, 소년병이요?”

아직 현역이 아니지만, 위급 상황에서는 소년병도 출정 명령을 받을 수 있다.

라몬은 긴장하며 답했다.

“1군 여섯 명, 2군 서른여덟 명, 3군 쉰아홉 명입니다.”

“오, 이런. 습격한 성수들은 어느 정도고?”

묻자, 이번에는 전령이 답했다.

“삼백이 훨씬 넘어갑니다.”

“신이시여!”

니콜라스가 좌절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흐느꼈다.

라몬은 가려진 니콜라스의 얼굴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니콜라스가 말했다.

“하는 수 없지. 4급 옥타바 능력자들까지 소집하게. 그들까지 있어야 제도를 방비할 수 있겠어.”

“예?”

황당한 니콜라스의 명령에 라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이내 깨달았다.

일련의 상황들로부터 니콜라스가 무엇을 노리는지를.

‘아, 루빈슈타인 공녀구나….’

언제 어떤 식으로든, 네 자식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에녹 루빈슈타인에게 각인시켜 줄 생각이리라.

그리고 끝내 그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함이겠지.

라몬은 흡사 악마와도 같은 니콜라스의 얼굴을 지켜보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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