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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06)화 (107/261)

“노르딕 님의 전언입니다.”

아버지?

에녹은 사병이 건네는 편지를 급히 열어 읽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뭐라고….”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지?”

악시온이 묻자, 아직 채 숨도 못 고른 사병이 헐떡이며 답했다.

“중부 위르겐에 오염된 성수들이 출몰했습니다. 위르겐을 거의 점령하고 제도 쪽으로 빠르게 습격 중이라고 합니다. 위급 상황이라 제도 내의 소년병 전원이 출정 명령을 받았고….”

사병이 울컥하며 덧붙였다.

“…병력이 부족하여, 옥타바 능력자들도 지원군으로 소집됐습니다. 황제 폐하의 친위대가 공작저에 직접 찾아와 공녀님을 데려갔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오르디아가 벌떡 일어났다.

주변이 웅성거렸다.

삐이이―

그러나 에녹의 귀에는 전에 없던 이명만이 가득했다.

난데없이 날뛰는 성수들.

만약 위르겐도 이곳 올덴만큼이나 심각하다면.

출정 경험도 부족한 소년병들은 사지에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리리스가, 끌려갔다.

“…녹! 에녹!”

오르디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녹은 휘청거리며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부릅떴다.

“정신 차려!”

오르디아가 소리쳤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그리고 은색 갑옷 차림.

귀부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장에서도 누이는, 혼란에 빠진 자신과 달리 유독 단단해 보였다.

“에녹!”

짝―!

오르디아의 손이 매섭게 에녹의 뺨을 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

“네가 지금 이렇게 정신 놓고 있을 때야?”

“어어, 여보야. 사령관 뺨을 냅다 갈기면 어떡해. 이거 하극상이야.”

알렉세이가 오르디아의 팔을 당겨 제 뒤로 보냈다.

그리고는 에녹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처남, 나를 봐.”

“…….”

“지금 당장 위르겐으로 가. 처남이 가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지금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데, 일어나지 않을 일이야.”

알렉세이는 침착하게 덧붙였다.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애들….”

“…….”

“리리스랑, 우리 쌍둥이랑….”

에녹을 진정시키려는 그도.

아닌 척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겁에 질려 있었다.

사랑하는 자식이 사지에 내던져진 상황에 그 어떤 부모가 침착할 수 있을까.

“무사히, 구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돌아와. 여기는 우리가 어떻게든 버텨볼게.”

위르겐으로 간다면?

지금 이곳 올덴은, 한 번에 성수 삼백여 마리가 출몰하는 상황이다.

그중 절반은 에녹이 한 번에 쓸며 겨우 전투가 시작된다.

그런 에녹이 자리를 비운다면.

남은 부하들은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안 돼. 그래도 가야 해. 우리, 우리 공주….’

당연히 부하들을 버리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에녹은.

군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매형,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

“위르겐 쪽을 수습하고, 이곳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기다릴게.”

남은 이들을 뒤로하고, 에녹은 바람같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 * *

같은 시각.

레온은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출정 명령을 받았을 때도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리스를 본 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

레온은 벌레 한 마리도 못 잡을 듯한 작고 약한 동생을 내려다보며 손을 벌벌 떨었다.

두려운지 리리스의 큰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얘를, 얘를 데리고 어떻게….’

그때, 체시어가 레온의 팔을 강하게 휘어잡았다.

“형.”

“어, 어어.”

“정신 차려.”

체시어가 레온의 어깨를 꽉 잡고 눈을 맞췄다.

체시어는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리 떼를 써 봤자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고, 리리스까지 함께 사지로 가야 했다.

그렇다면.

“리리스는 뒤로 보내면 돼. 우리가 앞에서 다 잡고, 한 마리도 뒤쪽으로 안 보내면. 그러면 괜찮아.”

“…….”

“시간이 없어. 옥타바들 포함해서 전열 다시 짜야 해. 제발, 정신 차려.”

“그래…. 그러자, 그래.”

레온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바로 옆을 보았다.

가장 능력치가 좋은 도스들은 고작 여섯.

자신과 테오, 체시어, 제라드.

그리고 방어 계열인 두 명의 능력자가 있었다.

전부 선봉에 세우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너.”

레온이 성력계 검사, 제라드 슈미트를 가리켰다.

“네.”

혼란한 눈으로 리리스를 힐끔대고 있던 제라드가 대답했다.

“네가 옥타바들을 데리고 후방을 맡아. 되도록 한 놈도 뒤로 안 보낼 거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네.”

“절대, 절대 아무도 다치게 하지 마.”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다 나 따라서 앞으로….”

말하던 레온이, 테오를 가리켰다.

“너도! 너도 뒤로 가.”

“뭐? 왜?”

“성수들이잖아! 너 검에서 마기 안 나오면 쓸모없어. 괜히 짐만 돼.”

테오는 성력과 마력이 50 대 50의 비율로 공존하는 능력자.

성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력계 검기가 발현된다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스가 여섯 명뿐인데 둘을 다 뒤로 보낸다고?”

“야, 테오.”

레온이 벌벌 떨리는 입술을 혀로 훑으며 테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옆에 선 리리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네가 꼬맹이 지켜 줘야지. 조금도 눈 떼지 마…. 절대 다치게 하지 마. 알았지….”

“…….”

“제발. 말 들어.”

레온이 울컥했다.

거칠게 소매로 눈가를 훑어내는 레온을 보며, 테오도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 너도…. 너도, 죽지 말고.”

“…응.”

레온이 테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쌍둥이.

그 깊은 유대가, 겁에 질린 서로의 어린 마음을….

아주 조금, 달래 주었다.

* * *

우리는 워프 게이트를 타고 중부 위르겐으로 향했다.

위르겐의 상황은 처참했다.

이미 영지 전부가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곳곳에서 성수들이 내지르는 포효가 울려 퍼졌다.

“제도로 가는 길목은 이쪽뿐이야.”

어느새 침착함을 찾은 레온이 말했다.

양옆으로 높은 절벽이 솟은 너른 협곡은 꼭 요새처럼 안전했다.

“여기를 넘어가게 해서는 안 돼. 너희 둘은 옥타바들 데리고 여기서 대기해.”

테오와 제라드에게 말한 레온이, 척 검을 들어 멀리 보이는 위르겐 평야를 가리켰다.

저곳에서 성수들이 오고 있었다.

“우리는 저기로 갈 거야. 이쪽으로 한 마리도 못 오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습니다.”

제라드가 대답했다.

이윽고 레온은 출정 경험이 있는 100명 남짓의 소년병들과 이동했다.

“리리스.”

체시어가 떠나기 전 내게 왔다.

“으응.”

“걱정하지 마.”

“…….”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게.”

체시어는 젖은 내 눈가를 닦아 주고는 안심할 수 있게 웃었다.

“너도 다치지 마….”

“응.”

태연해 보여도, 체시어는 아직 어렸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그것을 애써 숨기며, 그는 머뭇거리다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갔다 올게.”

“으응….”

이윽고 후방에는 도스 둘과 옥타바들만 남았다.

아비규환일 앞쪽과 달리 후방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때였다.

“꺄아아악!”

“아악!”

비명이 들렸다.

재빨리 돌아보니, 절벽의 바위틈에 머리를 쑥 내민 괴수가 보였다.

사자의 모습을 한 괴수는 온몸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성수다.

‘왜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오지?’

나는 당황했다.

모여 있던 옥타바들은 갑작스러운 성수의 등장에 전열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멈춰! 도망치지 마! 흩어지면 더 위험해! 가지 말라고!”

제라드가 소리쳤다.

그러나 겁에 질린 옥타바들은 듣지 않았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일단 피하고 보려는지 자꾸만 전열이 퍼졌다.

30min

나는 재빨리 200명이 훌쩍 넘는 옥타바들과 우리 셋의 위로 실드를 씌웠다.

머리 위에 푸른색 실드가 경계선처럼 드리우자 그들은 다행히 도망치는 것을 멈췄다.

크르르릉―

동시에 성수가 실드 위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흠집도 못 내고 미끄러졌다.

“뭐, 뭐…. 설마 A급 실드야?”

제라드가 놀라며 내게 물었다.

“…같은 성력계라 A급 실드 아니면 저렇게 못 막을 텐데?”

“어, 으응.”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와, 리리스. 세상에. 대단하다.”

테오가 웃으며 나를 칭찬했다.

제라드도 웃다가, 재빨리 옥타바들에게 말했다.

“봤지!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니까 괜히 전열 흩트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전투 경험도 없는 옥타바들은 다 그냥 죽으라고 보낸 거네. 이 사람들 전부 살리면서 싸우려면 소년병들에게는 짐밖에 안 될 텐데….’

황제는 전투를 모르는 자가 아니다.

옥타바들을 출정시키는 것이 비효율적임을 분명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 상관 없었던 거다.

옥타바들이 죽든 말든.

옥타바들을 구하며 싸우려다 소년병들이 불리해지든 말든.

‘나쁜 놈….’

생각하는데.

후우우우욱―!

“으앙악!”

우리 쪽으로 온 성수가 실드 위에 푸른 화염을 내뱉었다.

실드는 조금씩 녹았다.

“이, 이런. 잡아야 해….”

그걸 본 테오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제라드라고 했지? 너!”

테오는 혼란해 보였다. 그럼에도 겨우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잡고 있던 내 손을 제라드에게 넘겼다.

“내 동생이야…. 안 다치게 지켜 줘.”

“오라버니!”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냥 안에 있자! 실드는 없어질려구 하면 내가 다시 계속 만들게!”

“안 돼…. 이거 A급이라며…. 그럼 네 마나 금방 닳아서 없어질 거야. 한 마리뿐이니까 괜찮아.”

“그러지 말고, 저도 도울게요.”

제라드가 말하자 테오가 고개를 저었다.

“너 성력계잖아. 마력계 검기 안 나갈 거 아냐.”

“그러는 형은 나가요?”

50 대 50.

능력 발현이 도박과도 같은 테오를 아는지, 제라드가 못 미더운 눈을 했다.

“그래도 너보단 내가 낫지….”

테오는 마른 입술을 한번 훑더니 나를 보았다.

“리리스.”

“오, 오빠….”

그리고는 왼쪽 귀에 항상 달고 다니는 사파이어 귀걸이를 빼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으응?”

아니, 무슨 이런 불길한 데드플래그를 꽂아….

“오빠가 저거 잡고 올게. 너 안 위험하게.”

“자, 잠깐만!”

테오는 말릴 새도 없이 실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실드를 깨려고 계속 화염을 뿜던 성수는, 그런 테오를 발견하고 바로 그를 향해 돌진했다.

“오빠!”

최대한 우리에게서 멀어진 테오가 달려드는 성수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쉬이이익―!

‘제발!’

성력이 넘실거리는,

푸른색 검기.

성수의 가슴팍에 간지러울 정도로 작은 흠집만 남겼을 뿐이다.

테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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