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다.
정말로, 아빠야.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성수들의 사체를 넘어온 아빠의 흑색 군마가 멈췄다.
가까워진 아빠의 눈은 오롯이 나를 향해 있었다.
“아빠….”
말에서 내린 아빠가 멍하니, 한 걸음씩 다가왔다.
“삼촌!”
레온이 검을 내던지고 소리치며 먼저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는 힘없이 웃으며, 레온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잘했다. 애썼어.”
“흑. 삼촌….”
그리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와 무릎 꿇었다.
“리리스….”
“아, 아빠. 으아아앙…!”
나는 겨우 일어나, 팔을 여는 아빠 품에 안겼다.
나를 안은 아빠의 팔은 떨리고 있었다. 쿵, 쿵.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까지….
“…괜찮아, 이제.”
내 등을 다독여주는 아빠의 손은, 나보다 더 떨고 있었다.
“흐윽. 아, 아빠….”
“괜찮아. 괜찮아, 우리 딸.”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었을까 봐.
영영, 헤어지게 될까 봐.
“리리스….”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것도 무서운 게 없을 줄 알았던 아빠인데….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아빠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리리스….”
“흑. 으허어엉.”
아빠는 그렇게 떨면서도, 한참 나를 품에 안고 달래 주었다.
* * *
그 시각.
제도에 있던 에녹 루빈슈타인의 책사, 조제프 뤼트먼은 불안한 맘을 애써 달래며 생각했다.
‘리리스는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다. 노르딕 님도 있고, 공작님도…. 어떻게든 아이를 구해낼 테니,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돼.’
옥타바 능력자들이 끌려갔다.
황제는 분명, 이 난데없는 성수 사태를 이용해 에녹의 유일한 약점인 딸을 건드릴 생각이었을 거다.
‘신의 계시 때문에 초조해졌겠지. 절대권력에 금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대륙 통일이 더 간절해졌을 테고.’
대륙 통일을 완성한다면 황제의 위상은 더없이 굳건해진다.
하지만, 에녹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
‘마음이 급해 어떻게든 공작님의 목줄을 쥐어 보려고 했나 본데, 너무 섣불렀지.’
조제프는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할 궁리를 시작했다.
병역의 의무가 없는 옥타바들에게까지 출정 명령을 내렸으나, 제도가 위협받는 전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 전에 현역들에게 전원 출정을 명하여 제도의 방비를 취약하게 한 것만은, 황제의 명백한 실책.
‘최고 사령관으로서는 치명적인 전략 오판이다.’
절대권력의 최상위 포식자라고는 하나, 책잡을 수 있는 근거가 한둘이 아니다.
이 사태를 이용해 제도 분위기를 선동하면….
“꺄아아악!”
“으아아!”
그러나.
생각도 못 했던 일이 일어났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성수들이 제도 입구에 모여든 것이다.
그때, 황제는.
맨발로 거리에 뛰쳐나왔다.
그리고 단 한 명의 희생도 없도록 제도를 방어하고 성수들을 처리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의 제국민들이여! 그대들은 무사할 것이다!”
조제프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제도까지 위협하는 성수들이라니.
‘대체 뭐야, 이게?’
제도에 남아 있던 이들은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겠지만, 이로써 성수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을 거다.
처음 성수가 출몰한 남부에, 병력 전원을 투입한 황제의 판단.
그것을 마냥 실책으로 몰고 갈 수 없게 되었단 뜻이다.
“성수 사태가 심각하여 병력을 전부 지원했으나, 제도가 비었어도 하나 걱정할 것이 없다! 내가 있으니!”
전능한 프리메라의 보호.
“내 목숨을 다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들을 지킬 것이다!”
제도에 남은 이들은 안심했다.
‘이럴 수가.’
황제가 이 시점에, 이런 퍼포먼스를 해 버린다면….
‘하,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조제프는 황제의 힘에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성수들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제도에 있는 이들이 안전한 것은 기뻐할 일이나….
‘이거 뭐, 성수들한테 지능이라도 있나? 왜 황제에게 판을 깔아 주는 것 같지?’
조제프가 좌절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머리는 재빠르게 회전했다.
‘그렇다면 플랜 B다.’
쯧 혀를 찬 조제프가 뒤돌았다.
‘이 좋은 성수 사태를 써먹지 않을 순 없어.’
조제프 뤼트먼.
그는, 가능성이 없는 판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뛰어들었다면 결코 실패한 적이 없는 자였다.
* * *
에녹은 위르겐의 상황을 빠르게 수습했다.
성수들이 30분을 주기로 새로이 튀어나왔기에, 또 새로운 무리가 나타나리라 생각했지만….
“아빠, 괴물 이제 안 나올 것 같아. 애들 먼저, 빨리 집에 보내 주면 안 돼?”
리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왜, 안 나올 것 같은데?”
“으응, 그게….”
아이는 한참 말을 고르며 머뭇거렸다. 그러다 조용히 속삭였다.
“화, 황제 폐하 나쁜 사람이자나…. 황제 폐하가… 괴물들 부른 걸지도 몰라….”
그 말에, 에녹은 멍해졌다.
그리고 곧 일련의 상황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성력을 지닌 괴수.
프리메라는 아무래도….
인간은 물론, 성수들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리리스는 그걸 아빠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아이가, 더는 성수가 날뛰지 않을 거라 확신한 이유.
‘황제가… 계획대로, 원하는 것을 다 얻어냈기 때문이다.’
황제는 성수를 조종해 일부러 이 사태를 만들었을 것이다.
리리스를, 에녹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언제고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그러니 황제는, 아이의 죽음까지는 바라지 않았겠지.
에녹을 혼란에 빠트리고, 가슴이 뜯겨 나가는 듯한 절망을 느끼게 하고, 아슬아슬하게 딸을 구하게 하는 것.
아마 그것이 황제가 노렸던 상황.
그리고, 뜻대로 이루어졌다.
“정말이네.”
에녹은 힘없이 웃으며 읊조렸다.
위르겐에서는 더 이상 성수들이 출몰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년병과 옥타바들을 데리고 제도로 귀환했을 때.
아버지, 노르딕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황제의 친위대는 퇴역 군인에 대한 예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리리스를 따라가려 했던 노르딕을 붙잡아 두었다.
‘아버지가 리리스를 구하게 해선 안 됐기 때문이겠지.’
에녹만큼이나 애끓었던 노르딕은 파빌 신전에서 리리스를 품에 안자마자 오열했다.
“나 할아버지랑 있을게. 아빠는 얼른 고모랑 고모부랑 삼촌들이랑 있는 데 다시 가 봐…. 아빠 또 옛날처럼 도망친 줄 알면 어뜨케….”
리리스를 노르딕에게 맡겨 두고 다시 남부, 올덴으로 돌아왔을 때.
올덴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에녹이 떠난 뒤로는 성수들이 더 출몰하지 않았다고 한다.
“표정이 왜 그러냐.”
무사히 정리된 상황에도 에녹은 웃을 수 없었다.
“…알잖아. 전장에서 희생은 어쩔 수 없어. 네 탓 아니니 마음 쓰지 마라.”
악시온이 에녹을 위로했다.
그러나 에녹은 전우들의 시신을 보며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이번 올덴 성수 토벌에서 희생된 전사자는 열다섯 명.
전멸한 마검사단까지 포함하면 몇백이 넘어가는 수였다.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이들이다.’
전우들은 나라의 안전을 지키고자 명예롭게 희생한 것이 아니다.
황제의, 한 인간의 탐욕을 위해 슬프게도 희생당했다.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에녹은 괴로움에 홀로 몸서리쳤다.
“…미안하다.”
지금 그가 전우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알량한 사과뿐.
죄책감이 목을 조여왔다.
황제가 탐내는 것이 자신의 능력임을.
이 모든 사태가 자신을 휘두르려는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기에.
“미안해….”
엉망이 된 땅.
망가진 전장에 무릎 꿇은 남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성수 사태는 하루 만에 진압됐다.
그날 저녁.
아빠는 검은 제복을 꺼내 벽에 걸고, 한참 그 앞에 서서 침묵했다.
내일 황실에서는, 이번 사태의 사후 처리를 마친 뒤 전사한 능력자들의 공동 장례와 추모식을 치른다고 했다.
‘아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잠들지 못하고 아빠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아빠가 웃으며 내 옆으로 와 누웠다.
“미안해, 공주야. 우리 공주 얼른 자야 하는데 아빠가 너무 오래 깨어 있었지? 자아, 이만 잡시다.”
아빠는 내게 이불을 덮어 주고 옆에 누워서 다정하게 머리를 넘겨 줬다.
내 얼굴을 찬찬히 훑는 시선에는 애틋함과 안도가 담겨 있었다.
“어휴, 공주야. 아빠 오늘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랬어?”
“응. 할아버지 편지를 딱 읽었는데, 그 순간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야.”
“…….”
“우리 공주 잘못되면 어떡하지? 무서운 괴물이 잡아가면 어떡하지?”
아빠는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내 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주며 말했다.
“아빠는, 아빠가 이렇게 약한 사람인지 처음 알았어.”
“아니야! 아빠가 모가 약해. 아빠가 세상에서 젤로 쎈데?”
“아니야. 공주 다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까, 아빠는 심장이 쿵 떨어져서 바보처럼 아무 생각도 못 했어.”
“…….”
“공주야.”
아빠가 내 뺨을 쓸며 덧붙였다.
“아빠는 공주 없으면 진짜 못 살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공주, 다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건강하게 커야 해.”
“응, 그럴게.”
“절대 위험한 곳에도 가지 말고,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그러면.”
“…….”
“아무것도 하지 말고, 꼭 아빠를 기다려.”
“응….”
“아빠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공주 구하러 갈 테니까, 공주는 꼭 아빠 기다려야 해. 할 수 있지?”
“응.”
“그래, 내 새끼….”
피식 웃은 아빠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자자. 우리 공주, 오늘 너무 힘들었으니까 많이 자. 해님이 인사해도 아빠가 공주 안 깨울게.”
“응, 알았어.”
나는 웃으면서 아빠 품을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아니, 저기요!”
밖이 소란스러웠다.
“잠시만요! 이게 무슨 일이람! 자, 잠시! 멈추셔요!”
집사, 렘 아저씨 목소리였다.
아빠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지?”
쿵쿵쿵, 다급한 두 명의 발소리가 우리 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기요오오!”
렘의 절규와 함께, 문이 벌컥.
그리고 나타난 것은.
‘뭐, 뭐야. 스승님?’
갑자기 오스카?!
나는 혹시 신기루가 아닌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정말 오스카였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
거칠게 몰아쉬는 숨.
왜인지 초점 없이 흐트러진 눈빛까지….
‘오스카가 여기서 왜 나와…?’
나는 재빨리 방 한쪽에 놓인 괘종시계를 쳐다봤다.
시곗바늘은 11시를 넘어가고 있다.
다들 잘 시간이다….
아빠도 황당한지 나와 껌뻑껌뻑 시선을 나누다가, 잽싸게 일어나서 내 앞을 막으며 말했다.
“다, 당신 뭐야…? 싸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