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10)화 (111/261)

* * *

윌로우 챔버 후작.

에녹 루빈슈타인의 책사, 조제프가 대외적으로 ‘돕는 척’하는 자다.

“앗, 도련님!”

챔버 후작의 집무실로 가고 있던 조제프는 그의 아들 브루스 챔버를 발견했다.

“오, 조제프!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나요? 이번에 위르겐에 성수 토벌 나가셨죠? 어디 다치신 데는 없고요?”

조제프가 걱정하자, 브루스가 우쭐하며 웃었다.

“내가? 어휴, 조제프가 그날 나를 봤어야 했어. 애들 다 울고불고 도망치는데, 나 혼자 앞에서 성수들 다 잡았잖아.”

“오오!”

거짓말이다.

브루스는 성력계 능력자.

성수를 상대하기에 비효율적이니, 사령관 레온은 그를 안전하게 후방 배치해 주었다.

레온과 체시어가 다 했고, 사실 브루스는 무기도 안 써봤다.

그리고 조제프는 바보가 아니라 그걸 안다.

‘쯧쯧. 어린 게 아주, 지 애비 닮아 허세 하나는 알아줘야 해. 성능력자가 성수들을 어떻게 잡아? 지가 에녹 루빈슈타인도 아니고….’

그러나 겉으로는 비위를 잘 맞춰 준다.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이러다가 나중에 성권사단장까지 하시는 거 아닙니까?”

“뭐어? 하하하! 그러려나?”

뿌듯해진 브루스가 아버지의 집무실을 가리켰다.

“아버지 보러 왔지? 같이 가자!”

“예.”

문을 열자 챔버 후작, 윌로우가 뚱뚱한 몸으로 반갑게 달려와 조제프를 맞았다.

“오, 조제프 왔는가!”

“제가 요새 자주 못 들렀죠? 제도 분위기를 좀 살피느라.”

“아닐세, 아닐세. 어서 앉게.”

조제프가 윌로우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권력 짱짱한 고위 귀족.

계급제의 수혜자.

그는 황제의 절대권력과 이 나라에 뿌리 내린 계급제가 언제까지고 굳건하길 바라는 자다.

다시 말해, 혁명의 걸림돌.

그리고 같은 부류의 중심에서 권력 놀음을 하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조제프는 그들 틈에 파고들어야 했다.

후에 그들이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아주 천천히, 속에서부터 입지와 권력을 무너뜨려야 하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사태를 이용해서 이놈들을 써먹어 보자고.’

조제프는 몰래 씨익 웃었다.

황제와, 황제파인 이들 사이를 이간질할 것이다.

그것이 조제프의 플랜 B였다.

“후작님, 이번 성수 사태를 어찌 보십니까?”

“응? 뭘 어찌 봐?”

말하려던 조제프가, 집무실 한쪽 구석에 그림처럼 서 있는 윌로우의 젊은 집사를 쳐다봤다.

조제프의 시선을 느낀 윌로우가 허허 웃었다.

“아아, 뷔엘? 괜찮아, 괜찮아. 저 녀석 귀머거리야.”

“예? 그럼 상당히 불편하실 텐데, 곁에 두십니까?”

레몬빛 머리카락이 특이한 집사, 뷔엘은 나이도 어려 보였다. 눈빛도 영 맹했고….

그러나 뚫어져라 윌로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 빤히 쳐다보는 거 보이지? 종일 내 표정만 살피면서, 말 안 해도 필요한 거 알아서 척척 대령하는 놈이야. 듣지 못하니 말 샐 일도 없어서 얼마나 쓸모 있다고.”

“오, 그렇군요.”

정말로 표정을 읽는 모양.

제 칭찬을 하는 윌로우를 알아보았는지 뷔엘이 웃으며 고개 숙였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뭐?”

“아아.”

치밀한 조제프는 혹시나 뷔엘이 제 입 모양이라도 읽을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심각한 척 말했다.

“아무래도 황실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 같아서요.”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옥타바 징병 때문에 그래? 그건 별수 없는 일이었지. 제도에 남은 병력이 없었으니까.”

윌로우는 웃으며 덧붙였다.

“제도의 방비가 허술해져 일어난 일이긴 하다만, 걱정할 게 뭐 있나? 폐하께서 맨발로 뛰쳐나가 제도를 직접 막으신 것 못 봤어?”

“애초에 성수들이 날뛰지만 않았으면, 안 벌어졌을 일이지요.”

“응?”

“성수가 어떤 존재들입니까? 예로부터 주신께서 마수를 상대하라 내린 신의 사자들입니다.”

조제프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런 성수가 미쳐 날뛰면서 땅을 파괴하고 제도를 공격한다?”

“아.”

“신의 분노죠. 그뿐입니까? 여태 황실에서는 프리메라도 안 나오고 있고, 구교파에 신의 계시까지 내려왔단 말입니다.”

“…….”

“아무리 저라도, 후작님의 권력을 위해 조언 드리고 손쓸 수 있는 것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죠. 제가 신을 어찌 막습니까?”

“…그렇지.”

“황제 폐하가 아무리 전능하셔도, 분노한 신이 돌아섰다면….”

쯧쯧, 혀를 찬 조제프가 슬쩍 윌로우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금세 흔들리고 있다.

꽉 막힌 고위 귀족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신이 하사한 황제의 절대권력.

그것에 이렇게, 아주 작은 흠을 낸다.

이 흠은 곧 커지고 커질 것이다.

그리고, 황제를 위협하겠지.

“벌써부터 제도에 조용히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신이 황실을 버렸고, 분노는 그치지 않을 거라고요.”

물론 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 건 조제프다.

“그렇군….”

“후작님. 굳건하던 황실의 입지가 금세 옛말이 될까 두렵습니다. 마냥 황제 폐하만 따르고 있다가는 어찌 될지….”

조제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윌로우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 * *

정보 길드, <붉은 매>의 본거지.

리코는 부드러운 레몬빛 머리카락 사내의 뒤통수를 보며 다가갔다.

“야.”

“…….”

대답이 없다.

“야!”

또 없다.

리코가 사내의 등을 툭 치며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왜 나한테까지 귀먹은 척인데?”

“아아, 왔냐.”

윌로우 챔버 후작의 어린 집사, 뷔엘.

그는 <붉은 매>의 정보원이다.

“너도 365일 24시간 안 들리는 척하고 있어 봐라. 이렇게 돼.”

“웃기네. 그래서, 뭐 들은 거 좀 있나? 조제프 뤼트먼, 확실히 믿을 만한 거 맞아?”

의심 많은 리코다.

에녹 루빈슈타인의 책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제 이득을 위해 움직이던 조제프 뤼트먼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혹시 딴맘을 품지 않을까 항시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의심 그만해도 될 듯.”

“오오, 왜?”

“볼 때마다 후작이랑 브루스 녀석 똥구멍 빨아주는 데 정신없길래 이놈 진짜 믿어도 되나, 했는데.”

뷔엘은 엿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 알랑방귀도 다 계획이었을 거야. 치밀한 자다. 확실히 우리 편 맞더라고.”

“뭘 보고?”

“이번 성수 사태가 신의 분노라고 하더군. 신이 황실을 버렸으니 곧 황실 입지가 흔들릴 거라면서 후작을 은근히 충동질하더라고.”

“아하.”

“버릴 패 삼으려 했던 고위 귀족 놈들을 이번 사태로 써먹으려는 거 아니겠어?”

“그러네.”

리코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위 귀족 놈들이 돌아서 준다면, 일이 상당히 빨라질지도 모르지.”

“그래야지.”

리코가 뷔엘의 말에 안도했다.

그리고는 리리스를 떠올렸다.

전장에 차출된 옥타바….

황제의 탐욕을 아는 리코는, 그 명령이 리리스를 위험에 빠트리려는 계략임을 눈치챘다.

이 나라는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리리스가 계속 위협당할 수도 있음을 이번 일로 알게 됐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그 아이는 무사해야 한다.

이 길의 끝에서, 살아남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 * *

끔찍했던 성수 사태.

그 후로 보름이 지났다.

“으항항!”

리브르 공작저.

체시어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리리스와 마주 앉아 카드 게임 중이었다.

“1분 동안 보는 거야!”

“응.”

“요이~ 똥!”

1분짜리 모래시계를 뒤집은 리리스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펼쳐진 카드를 살피기 시작했다.

두 장씩 같은 그림이 있는 56장의 카드.

카드의 자리를 기억해두었다가, 짝을 맞춰 골라내는 게임이다.

“1분 끝! 이제 뒤집어!”

“그래.”

리리스와 체시어가 카드를 전부 뒤집었다.

“나부터 한당!”

“응.”

리리스가 재빨리 카드 네 쌍을 찾아 제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다섯 번째에 틀렸다.

“우쒸. 이제 네 차례야.”

리리스가 입을 가리고 말했다.

“…안 가려도 돼.”

“응?”

“이미 다 봤어.”

“흐흠.”

멋쩍은 듯 헛기침한 리리스가 입을 가린 손을 살며시 내렸다.

리리스는 아래쪽 앞니 두 개를 뺐다.

그걸 본 체시어가 픽 웃었다.

“웃어?”

“아니야. 귀여워서.”

“모? 귀여워?”

“응.”

금세 기분이 좋아진 리리스를 보며 체시어가 카드를 뒤집었다.

그러다가 문득….

보름 전, 위르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리리스.”

“웅.”

“미안해.”

“…뭐가?”

“위르겐에서 말이야. 너 지켜준다고 했었는데, 사실 자신 없었어.”

“…….”

“아저씨가 못 오셨으면, 내 힘으로는 널 지켜주지 못했을지도 몰라.”

“체시어….”

리리스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둘의 시선이 맞물렸다.

“너는 왜 그런 말을 쉴 새 없이 카드 까면서 하니…?”

“아.”

무심코 카드를 뒤집다 보니, 벌써 열 쌍 넘게 가져갔다.

당황한 체시어가 멈칫하고는, 틀린 쪽에 일부러 손을 뻗었다.

리리스가 덥석 손을 잡았다.

“야! 자존심 상하거든? 봐주지 마라!”

“아니야. 나 정말로 이거 같아.”

“우쒸!”

체시어가 일부러 틀리고 차례를 넘겨주자, 리리스가 뺨을 부풀리고는 카드를 뒤집기 시작했다.

체시어는 그런 리리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있잖아, 내가 만약…. 진짜, 진짜 만약에 말이야. 완전 무시무시한 악마가 됐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 막 죽이구 그래. 근데, 그런 나를 막을 수 있는 게 너뿐이야.”

“나를 죽이면 돼…. 그럼 넌, 어떻게 할 거야?”

언젠가 리리스는 그런 질문을 했다.

그리고 겁에 질려 말했었지.

“주, 죽이지 마! 죽이지 말구… 절대, 절대 죽이지 말구 혹시, 다른 방법을 찾아줄 수 있어?”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성수 사태 때.

“체시어, 있잖아…. 나, 나 살려 주라.”

“나 절대, 응?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줘야 해?”

“나 절대 죽이지 마….”

그때는, 성수들에게서 지켜달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곱씹어볼수록 이상했다.

“주, 죽이지 마!”

“절대 죽이지 마….”

정말, 이상했다.

리리스는 성수들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체시어, 그에게서 살아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체시어는 궁금했다.

“리리스.”

“미안! 나 빨리 뒤집을게! 쪼, 쫌만 시간을 줘. 아이 씨, 이거 맞나?”

체시어가 재촉한다고 생각했는지, 카드를 보며 한참 고민하던 리리스가 허둥거렸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으응. 뭔데?”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널 죽이지 말아 달라고.”

순간 카드 위에서 방황하던 리리스의 손이 뚝 멎었다.

리리스의 고개가 들렸다.

“양성소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위르겐에서도 비슷한 말… 했잖아.”

“아, 응.”

체시어가 당황한 리리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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