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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12)화 (113/261)

오스카는 급히 뻗어온 체시어의 손을 막았다.

‘뭐야? 무슨 힘이?’

손에 입힌 마나의 양….

정말로,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일 생각이다.

혹시나 리리스를 죽일까 봐.

광기 어린 눈으로, 집요하게.

“하, 이것 봐라?”

제 방어를 뚫으려는 체시어를 보며, 오스카는 전율했다.

‘…변했구나. 이 새끼.’

웃는 얼굴에 희열이 일었다.

“그만, 그만. 장난이었어.”

“…….”

“아니, 그만하라니까? 장난이라고, 새끼야.”

오스카가 방어하던 손에 조금 더 마나를 실어 체시어를 밀어냈다.

조금? 아니.

거의 제 힘의 반절은 쏟아부어 겨우 막았다.

‘이 나이에 이 정도라고?’

오스카가 혀를 내둘렀다.

“마, 마탑주님! 괜찮으십니까?”

로벨이 놀라며 다가왔다.

“어, 괜찮아.”

주변을 지나던 연구원들도 멈춰 서서 힐끔거리며 놀라고 있었다.

“여어.”

오스카가 그들을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다들 가던 길 가. 구경났어?”

그리고는 여전히 살기를 내뿜는 체시어에게 다가갔다.

“미친놈 아니야, 이거? 너 뭔데 이렇게 앞뒤 생각도 안 하고 덤벼?”

“…….”

“여기서 네가 나를 죽이면? 그럼 너는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냐?”

오스카가 킬킬거렸다.

체시어는 희열을 느끼는 오스카의 표정이 의아했다.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왜지?

“하지만, 아주 좋은 태도다.”

오스카가 체시어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너는 지금 이 감정을 잊지 마.”

“…….”

“리리스를 죽이려는 놈이 있으면, 이렇게. 앞뒤 생각 없이 달려들어서 숨통을 끊어 놔.”

체시어의 눈이 흔들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스카의 눈빛, 그리고 말투에서 느껴졌다.

리리스를 향한 애정, 그 비슷한 무언가가.

‘나는 지금 이 사람을 못 이겨.’

오스카가 제 공격을 방어하는 순간, 체시어는 느꼈다.

아직은 이르다는 걸.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생각이 맞길 바랐다.

오스카가 그저 도발했을 뿐이라고.

리리스를 죽일 생각은 없다고.

“푸하하하!”

체시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오스카는 웃으며 말했다.

“쫄 필요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 그 애가 안전하게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길 바라는 사람이야.”

“…….”

“만약 네 입에서 리리스를 죽이겠다는 대답이 나왔다면, 나는 아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였을 거다. 내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기 전에 말이지.”

오스카가 체시어의 어깨를 두어 번 치고는 지나쳐갔다.

“지켜보겠다. 다음에는 웃으면서 보자고.”

* * *

늦은 밤.

루빈슈타인 공작저.

“으항항! 나 잡아 바~라!”

도도도도―!

리리스가 뒤쫓는 쌍둥이를 피해 웃으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으하하! 야, 꼬맹이! 너 거기 서라!”

우당탕, 쿵쾅―!

레온이 그 뒤를 바짝 따르고.

“하하하! 얘들아, 뛰지 마! 다쳐!”

말리는 척하지만 테오까지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도련님들, 제에에에발!”

“아가씨 이제 주무셔야 한다구요오오!”

말썽꾸러기들을 잡으려는 제티와 쥰이 따라붙었다.

둘의 얼굴은 하루 종일 시달린 탓에 잔뜩 그늘이 져 있었다.

그때.

“너희들!”

2층, 노르딕의 침실에서 나온 집사 렘이, 인상을 쓰며 제티와 쥰을 멈춰 세웠다.

“헉!”

“지, 집사님.”

렘이 소곤소곤 말했다.

“대체 너희까지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하니? 큰 주인님 취침하실 시간인데!”

“그, 그렇지만… 어어…. 도저히, 도련님들 체력은… 으어어…. 괴물이 틀림없어….”

쥰이 제 양쪽 뺨을 아래로 쭉 잡아당기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오늘은 놀러 온 쌍둥이가 잠까지 자고 가는 날.

끽해야 인형을 갖고 놀거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리리스를 돌볼 때와 달리, 쌍둥이가 올 때는….

“으어어. 살려줘요….”

“하녀들의 복지를 보장하라….”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자타공인 육아 베테랑인 제티와 쥰의 얼굴이 하루 새 반쪽이 된 것만 봐도 말 다 했지.

렘이 한숨 쉬었다.

“그래. 너희 고생하는 거 아는데, 큰 주인님 화내실라. 이 저녁에 소란 피우면 안 돼.”

렘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덧붙였다.

“…20분 주마.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랑 도련님들을 잡아서 11시까지는 재우도록 해.”

“네에에.”

“어후우.”

대답하면서도, 둘은 쉬이 걸음을 떼지 못하고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말썽꾸러기들이 내려간 1층 지옥.

여전히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언니가 레온 도련님 잡아라. 난 레온 도련님은 진짜 감당 못 해….”

“얘, 그런 게 어디 있니? 힘 더 센 네가 맡아야지.”

그때.

“놔둬라.”

닫힌 문 너머에서 노르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티와 쥰이 우뚝 멈췄다.

“…애들은 놀아야지.”

그 말에, 셋 다 놀랐다.

렘과 두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뻑거렸다.

뭐지?

의아해하며 서로 눈빛을 나누던 셋은, 이내 풉 웃음을 터뜨렸다.

무서운 사자와도 같은 이 집안의 큰 어르신이지만….

역시,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 * *

“휴, 놀아 주느라 힘들었따.”

나는 방에 들어와 땀을 닦았다.

내일은 아침 먹고 뒷산 가서 말 탈 예정이라, 빨리 자야 했다.

“오라버니들이랑 누가 정상까지 빨리 가나 내기해야지~!”

나의 멋진 애마 제피르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지!

‘음, 근데 자기 전에.’

아빠 없는 틈을 타, 할 일이 있다.

나는 종이와 펜을 야무지게 챙겨 책상 앞에 앉았다.

“흠.”

오늘 아빠는 고모네 집에서 자고 오기로 했다. 고모랑 고모부랑 오랜만에 놀기로 했다나.

‘본격적으로 사업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

그래서 쌍둥이를 우리 집에 맡긴 걸 테다.

원작대로 열 일 하려는 주인공.

그렇다면 엑스트라, 아니, 빌런인 나도 주인공을 위해 할 일이 있었다.

“으음.”

나는 펜 끝을 입에 물고, 편지를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안녕, 아빠!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에는 아마 내가 없겠지?

한 줄밖에 못 썼는데 울컥.

눈물이 나왔다.

“우쒸.”

이미 요 며칠 아빠 몰래 많이 울어 놓고서는, 바보같이 또 눈물이 난다.

나는 코를 삼키고 소매로 눈을 벅벅 닦은 뒤에 다시 펜을 꽉 쥐었다.

당장은 아빠에게 내 정체를 말할 생각이 없다.

주인공이 큰일 좀 하려는데, 멘탈 깨부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하지만 언제든 알아야 해.’

아빠의 혁명이 빠를까?

내가 황제에게 잡히는 게 빠를까?

아마 후자일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든다.

이번 성수 사태 때.

위르겐에서 옥타바들을 구하느라 능력을 썼던 게 자꾸 맘에 걸린다.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터질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기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이게 맞냐…. 으허엉.”

그러니까 나는 지금.

참 우스운 일이지만, 황제에게 잡힌 뒤 그가 나를 어떻게 이용할지 아빠에게 구구절절 알려 주고 있었다.

끝내 빌런이 된 나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말이다.

“킁.”

나는 콧물을 쓱쓱 닦아낸 다음 다 쓴 편지를 접었다.

“어따 숨겨 두지…?”

이리저리 고민하다 옷장을 열어 보니, 아빠의 짐이 담긴 보따리가 보였다.

제논에서 살 때 입었던 옷과 쓰던 물건들이 가득.

“엥. 이게 모야.”

손때 묻은 아빠의 짐을 뒤지다가 나는 낡은 수첩들을 발견했다.

두툼한 수첩은 세 권이나 됐다.

“…? 아.”

무심코 열었더니 아빠를 꼭 닮은 바른 글씨체가 보였다.

그건 일기였다.

길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한 번씩 빠트리지 않고 써 둔….

[1773년 8월 2일.

예쁘다. 나를 보면 웃는다.]

자라는 나를 고스란히 담아 놓은 기록.

[아기 손은 진짜 작다. 내가 아빠라는 걸 아는지 손가락을 주면 꽉 쥔다. 귀여워.]

[욕조를 만들었다. 리리스는 물을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서툴렀을 때의 아빠 모습이 그려져서 나는 웃어버렸다.

[저녁에 소란스러워 나가 봤더니 웬 곰이 있었다. 나 없이 아기만 있을 때 왔으면 어떡하지?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새벽에 산을 다 뒤져서 정리해 놓고 왔다. 숨어 살기는 좋은데 너무 위험해.]

“헉! 역시….”

정말 제임스 브라운 씨가 곰을 찢어 놨던 거였어.

[세상에. 뒤집었다…….]

“으항항!”

뒤집기에 성공한 나를 본 아빠의 감동이 긴 말줄임표에 다 담긴 것 같다.

완전 웃겨….

[한번 뒤집으니까 리리스는 자꾸 혼자 몸을 뒤집는다. 이유식 만들 때 진짜 아주 잠깐 한눈팔았는데, 애 얼굴이 베개에 묻혀 있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리리스의 아래턱에 젖니 두 개가 하얗게 올라왔다. 너무 예쁘고 대견해서 울어버렸다.]

[뒤집기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혼자 뽈뽈뽈 잘도 기어 다니네. 너무너무 예쁘다.]

[리리스가 처음으로 말했다. 아빠―라고. 느낌이 이상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하루하루 애가 자라는 걸 보니까 신기하다. 이제는 알겠어, 딸아. 내 세계가 너로 인해 변했다는 걸.]

[나는 어쩌면, 이 애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갈수록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점점 아빠의 세상을 채워가는 나를 보는 게….

신기하면서도,

어쩐지 슬퍼서.

“끅.”

혹시, 정말 혹시나.

끝내 평화로워진 세상에 내가 없다면 어떡하지?

그래도 아빠가 조금만 슬퍼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아빠의 세상에는 내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서….

나 없이는 아빠가,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마지막에는 결국, 목 놓아 울어버렸다.

[내 천사. 내 보물.

공주야, 사랑해. 아빠는 널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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