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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13)화 (114/261)

그렇게 아빠의 일기를 보며 한참 울던 나는, 숨겨 두려던 편지 끝에 한 줄을 더 채웠다.

이기적인 바람인 걸 알면서도….

아빠, 사랑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아빠는 계속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날 위해서 뭐든 해 줄 수 있다는 아빠가, 내 마지막 부탁을 꼭 들어줬으면 해서.

* * *

이튿날.

황제, 니콜라스의 집무실.

“내일은, 오랜만에 자네 딸 얼굴을 좀 봤으면 하는데.”

무슨 일인지 에녹을 부른 니콜라스가 말했다.

“…무슨 일로.”

에녹은 흠칫했지만,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프란츠 알지?”

프란츠 폰 파빌리온.

올해 여섯 살. 13황자의 이름이다.

“예.”

“엊그제 코어를 열어 줬는데, 능력 쓰는 걸 보니 프리메라가 나온 듯해 말일세.”

그 말에 에녹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며칠 전, 책사 조제프와 만나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곧 황실에서 프리메라가 나올지 모릅니다.”

“뭐?”

“아아,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안 나왔는데 갑자기 나올 리는 없고, 가짜를 내놓지 않을까 해서요.”

프리메라의 부재, 신의 계시, 성수 사태….

일련의 상황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황실의 권위를 다시 단번에 끌어올리려면.

조제프는, 황제에게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보았다.

바로, 황실에서 다음 대의 프리메라가 나오는 것.

“안타깝지만, 가짜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아볼 방법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지겠군.”

“뭐, 프리메라를 상대해야 하는데 쉽고 빠르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 안 했습니다. 다만 멀리 보면 우리에게 이득이죠.”

조제프는 오히려 잘되었다 했다.

“가짜 프리메라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황제는 쉴 새 없이 가짜 대신 능력을 써 줘야 하니까요.”

가짜 프리메라는 일반인과 수명이 같으니 똑같이 자란다.

그러니 가짜임을 들키지 않으려면, 그만큼 능력을 계속해서 쓴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가짜로 내세우기에는 지금 여섯 살인 13황자가 적격일 겁니다.”

아직 눈에 보이는 성장 속도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나이.

리리스를 키워 봐서, 에녹은 프리메라의 성장 속도를 알고 있었다.

막 태어났을 때는 구분하기 힘들다.

일반인과 비슷하게 자라다가….

세 살 정도를 기점으로 성장하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가짜를 위해 어차피 쓸 능력, 황제는 민심을 모으는 데에 사용할 겁니다. 그러면 황실의 권위가 다시 올라가겠지요. 하지만….”

“그래. 수명은 좀 갉아먹을 수 있으려나.”

“맞습니다. 정말 제 생각대로 나온다면, 아마 황제는 최후의 수를 둔 거라고 봐야지요.”

조제프는 웃었다.

“제 살을 깎아 먹더라도 최대한 빨리, 죽기 전에 대륙 통일을 마치고 싶을 겁니다.”

‘조제프…. 아주 황제의 머리 꼭대기에 있군.’

에녹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프란츠와 자네 딸의 안면을 터 두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예?”

에녹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의도가 뻔한 말이었다.

“하하, 이것 참. 그리 무서운 표정 지을 필요 없네. 자네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멋대로 자네 딸을 황실에 들이려 하겠나?”

“…….”

“역시 우리 에녹 경의 딸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니콜라스가 못 말린다는 듯 덧붙였다.

“황태자가 나오면, 다른 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제 여식을 그 옆자리에 밀어 넣으려 난리를 칠 텐데 말이야.”

“저는….”

“아아! 알아, 알아.”

니콜라스가 항복하듯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웃었다.

“그냥 아이들끼리 서로 인사만 좀 시키자, 이 말일세. 경에게 딸아이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단 것은 나도 잘 아니까.”

“…….”

“그럼 내일 보는 것으로 하지.”

에녹이 떨리는 손을 아래로 내려 숨기며 꽉 주먹 쥐었다.

추잡한 황제의 속내야 신경 쓸 것이 아니다.

다만, 그에게 리리스를 내보여야 하는 상황….

그것만이 두려웠다.

* * *

“…그런데, 공주 내일 아플 것 같지 않아?”

아플 것 같은 건 또 뭐야.

나는 침대에 누워서 아빠의 말을 곱씹으며 뺨을 긁적였다.

황제가, 13황자에게 나를 소개한다고 했단다.

‘벌써 가짜 프리메라를 세울 생각인가 보네.’

나는 관자놀이에 검지를 붙이고 머리에 힘을 빡 줬다.

13황자, 아니, 곧 황태자가 될 그는 원작에서도 프리메라로 알려져 있었다.

가뭄이 든 영지에는 비를 내리고, 곳곳에서 날뛰는 마수들을 손짓 하나로 제압하고….

분명 수명이 두 배일 텐데도 일반인과 똑같이 자라던 사람.

그만큼 제 생명력을 아낌없이 쓰며 제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성군이었다.

물론!

그것이 다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 나의 능력이었음은 마지막 장에서야 밝혀졌지만.

‘지금 바닥 치는 황실 권위를 다시 세우려면, 차기 프리메라가 나와야만 했겠지.’

그러니 황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하지만 원작과 달리, 이번에는 대신 생명력을 빨려줄 내가 없다.

고로 황태자를 계속 가짜 프리메라로 세워 놓으려면….

‘황제는 자기 생명력을 써야 한단 말인데, 이거 완전 꿀이잖아?’

나는 입을 막고 쿡쿡 웃었다.

“공주야?”

“어, 으응!”

“공주 내일 아프자.”

“안 아퍼….”

“안 아파도 아프자!”

황제가 날 보자고 한 이유.

‘뻔하지, 뭐. 나를 황태자랑 엮어 보려고.’

그렇게만 되면 황제는 제도에서 옷 벗고 춤을 출지도 모른다.

내가 황실 일원이 되는 순간, 인질 확보에 주인공 목줄까지 꽉 쥐게 되니까.

“에휴.”

머리 꽤 굴리는 황제를 떠올리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악당이면 악당답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으윽! 이 내가…! 분하다!’ 하며 퇴장해 주면 좋을 텐데.

성수 사태도 그렇고 자꾸 머리를 쓰려고 하니 짜증 난다.

‘작가는 확실히 요즘 장르 소설 트렌드를 모른다니까?’

자고로 장르 소설은 사이다가 대세 아닌가?

이렇게 악당이 쓸데없이 머리 쓰며 고구마 먹이면 독자들 싫어할 텐데.

“…가께.”

“으응?”

사색이 된 아빠가 벌떡 일어났다.

“가야지. 황제 폐하가 불렀다는데 안 가면 어뜨케…. 갑자기 아프다구 하면 누가 봐도 다 피하는 줄 알지….”

“으응, 맞지. 그래. 그건 그런데.”

아빠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꽉 쥐었다.

“그래도 그냥 공주 몸이 너무 안 좋다고 하면….”

“아냐. 가께.”

황제가 나랑 13황자를 엮으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번이 아니더라도 계속 불러낼 거다.

그때마다 피하면?

‘당연히 의심받지. 불러낼 때마다 얼굴 보기 싫다고 하면 얼마나 이상하겠어.’

정체를 들키면 쓱싹.

나는 의심의 여지를 아주 조금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하아.”

아빠가 또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 많아 보였다.

‘뭔지 알겠네.’

내가 13황자한테 홀라당 빠져서 시집간다고 난리 치면 대참사니까.

그렇지만 그럴 일 없다.

내 생명력으로 성군인 척, 프리메라로 군림했던 나쁜 놈.

심지어 지금 여섯 살.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

아마 뺨 한 대 안 치면 다행일 거야.

* * *

그 시각, 마탑.

“으이구.”

보좌관, 로벨은 오늘도 어김없이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 불편하게 잠든 오스카를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또 악몽 꾸시나 보네.’

오스카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로벨은 그가 안쓰러웠다.

천재로 태어난 대가일까?

고작해야 하루 서너 시간 눈 붙이는 게 다인 오스카는, 그 시간에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로벨은 궁금했다.

오스카를 이토록이나 시달리게 하는 악몽이 대체 무엇인지….

* * *

오스카 마뉘엘, 17세.

이미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오만한 남자였다.

황제 앞에서도 거들먹거릴 수 있을 만큼.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 폐하께서는 꽤 집요한 면이 있으십니다. 이미 풀린 마법식이 수백 수천 가지인데, 그거 가지고 그렇게 좋아하는 전쟁이든 뭐든 하시라고요.”

오스카가 다리를 꼰 채 거만하게 말했다.

당시, 황제는 두 개의 왕국에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했다.

무리 없이 승전을 거두려면 고위급 공격 마법식이 필요했고 이를 제공할 사람은 오스카뿐이었다.

“마탑주, 언제까지 이렇게 비협조적일 생각인가?”

“제가 제멋대로 사는 놈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도리는 알아서요. 인간 도륙하라고 하루 종일 마탑에 갇혀 머리털 빠져 가면서 마법식 만드는 거 아닙니다.”

오스카의 도움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황제의 힘으로 그를 강제할 순 없었다.

황제는 제 생명을 끔찍이 아꼈고, 오스카는 종속시키기에 부담스러운 능력치를 가진 능력자였으니까.

오스카는 그걸 알기에 아주 거만했다.

“이만 가 봐도 됩니까.”

“그대의 도움 없이도 전쟁은 예정대로 진행될 걸세.”

“예, 예. 그러시든가요.”

“곧 에녹 루빈슈타인이 돌아올 거거든.”

“…….”

오스카가 멈칫했다.

에녹 루빈슈타인….

어렸을 때 들어본 적 있는 이름.

얼굴은 모르지만, 워낙 유명했다.

‘딸 데리고 탈영한 인간이던가.’

다들 입 모아 미친놈이라고 말했지만, 오스카는 그를 이해했다.

꽤 대단하다고까지 생각했다.

누가 자기 자식을 이 거지 같은 지도자의 꼭두각시 군인으로 살게 하고 싶겠나.

‘그런데 왜 돌아온다고 확신하는 거지?’

오스카는 의아했다.

황제의 능력으로 에녹의 거취를 알아낼 수도 있지만,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능력자들의 능력치에 비례해 생명력을 소모해야 하는 프리메라.

에녹 루빈슈타인이 마음먹고 숨었다면?

황제는 그를 찾아내는 데에 꽤 큰 생명력을 들여야 했다.

한 번 찾아낸다고 한들, 또 숨어버린다면 허사가 될 테고….

‘얼굴 여전히 반반한 걸 보니 능력 쓴 건 아닌데? 어떻게 에녹 루빈슈타인을 찾은 거지?’

그때였다.

누군가가 황제를 찾았고, 집무실 안으로 두 명이 들어왔다.

파리한 안색의 여자.

그녀의 이름은 셀레나 루덴도르프.

그리고 그 여자의 손을 꼭 잡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왔나.”

황제는 웃으며, 의아해하는 오스카에게 말했다.

“저 애가 에녹 경의 딸일세.”

순간 오스카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가까스로 삼켰다.

‘딸을 인질 삼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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