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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16)화 (117/261)

* * *

성수 사태가 있던 날.

에녹은 그날 마탑이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저 고급 인력인 마탑의 일원들까지 성수 사태에 휘말리지 않도록 황제가 손을 쓴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황제가 마탑을 봉쇄한 이유는 마탑주 때문이었어. 마탑주가 리리스를 구하러 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에녹은 확신했다.

신형 마나포말.

분명 오스카가 손을 써 두었을 거다. 리리스를 위해….

“뭡니까? 반갑지도 않은 얼굴인데 마탑까지 찾아와서.”

오스카가 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녹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

에녹은 오스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탑주.”

“뭐요.”

“알고 있지.”

“…? 갑자기 뭘.”

뜬금없이 앞뒤 다 자르고 묻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오스카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에녹을 살폈다.

진지한 눈빛.

혼란한 표정.

오스카는 그의 질문이, 리리스의 정체를 알고 있느냐는 뜻임을 깨달았다.

‘뭐지? 이 인간은 어떻게 알았지? 애가 자기 입으로 말했을 리는 없고….’

순간 긴장한 오스카가 한숨을 삼켰다.

황제조차 의심해서 리리스를 다시 마나포말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와중에, 제 아이를 목숨처럼 아껴 기르는 아버지가 비밀을 어찌 못 알아볼까.

‘아닌 척해도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겠군.’

쯧쯧 혀를 찬 오스카가 모른 척 능청을 떨었다.

“뭔 말을 하는지 나는 잘….”

“당신이 마나포말에 손을 써 둔 거 아닌가.”

“…….”

“어떻게 알았지?”

눈치 봐라. 에녹은 이미 오스카가 리리스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예, 뭐.”

더 이상 발뺌하기도 힘들다.

“아이가 말했나?”

“애가 바봅니까.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말하게.”

“그럼?”

“그것까진 말해 줄 수 없고.”

“…….”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나 죽이려고 왔나? 애 정체 발설 못 하게?”

“아니.”

에녹이 곧바로 말했다.

“말하려면 진작 말했겠지.”

“맞아요. 누가 나를 때려죽여도 당신 딸 비밀 말할 생각 없으니까 괜한 걱정 말고 가 봐요.”

“이유가… 뭐지?”

“…….”

“왜 내 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나?”

오스카는 기시감을 느꼈다.

꼭 지금처럼, 이 남자와 마주 보고 아이의 얘기를 했던 적이 있다.

“왜 내 딸을 위해서 싸웠지?”

“내가 키웠습니다. 당신 대신.”

그때와 달리, 오스카는 에녹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뭐, 나는 천재들을 사랑하니까.”

“…….”

에녹은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오스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리리스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오, 그래야죠. 그래야 참된 아버지지.”

“리리스를, 리리스를 무사히.”

“…….”

“무사히 살게 하려면….”

“그래요. 죽여야지, 뭐.”

황제.

또 다른 프리메라를.

“…….”

오스카는 제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 에녹을 향해 픽 웃었다.

“마탑은 걱정할 거 없습니다. 우리 애들은 내가, 마주칠 때마다 황제 놈한테 이 갈게끔 아주 자알, 세뇌하고 있으니까.”

입 밖으로 부탁을 꺼내기도 전에, 오스카는 원하던 대답을 주었다.

그에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긴장이 풀린 에녹이 긴 숨을 내뱉었다.

“…고맙군.”

“오해할까 봐 말해 두는데, 당신 이뻐서 하는 거 아닙니다. 애가 아빠 부탁은 뭐든 들어주라고 아주.”

오스카가 쯧쯧 혀를 찼다.

“제발제발, 간절히 부탁해서 하는 거지.”

“그래. 고마워.”

에녹이 힘없이 웃으며 일어났다.

나가려던 에녹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오스카를 돌아보았다.

“마탑주.”

“뭐요.”

“울 공주가 당신 엄청 좋아해.”

“…….”

“그러니까 모든 게 끝나면….”

“…….”

“…당신도 리리스 옆에서, 같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남기고 에녹은 떠나갔다.

오스카는 에녹이 나가고 닫힌 문을 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저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은 또 의미심장하게 하는 거 봐라. 사람 쫄게 하네.’

오스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구석에 있던 거울 앞에 다가가 섰다.

“모든 게 끝나면…. 당신도 리리스 옆에서, 같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럴 수 없음을….

알고 말한 것도 아닐 텐데.

“하여튼 재수 없는 인간이라니까.”

오스카는 구시렁거리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보자, 10년 남았나?’

1789년 8월 13일.

에녹 루빈슈타인이 끝내 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날.

1789년 8월 28일.

프리메라의 부활.

딸을 되살린 아빠, 에녹 루빈슈타인의 존재가 사라졌던 날.

그리고.

되살아난 아이는 주저 없이 다시 제 생명으로 아빠를 살리길 원했다.

‘나도 참, 바보 같았지.’

오스카는 비릿하게 웃었다.

간과했었다.

아빠밖에 모르던 아이가, 아빠 없는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었을 텐데.

그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아이를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아빠가 없어도, 그 빈 자리를 제가 채워 줄 수 있으리라는 착각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에녹의 목숨을 주고 아이를 살려버렸다.

오스카는 그 대가를 치렀다.

‘10년 남았네.’

생각하며, 그는 쯧쯧 혀를 찼다.

10년 후.

1789년 9월 4일.

제 생명을 거의 들이부어 아빠를 살리려던 아이를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오스카는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다시 그날이 돌아오면….

오스카 마뉘엘.

그는 사라질 것이다.

* * *

처음에는 화가 났다.

프리메라. 전능한 아이는 오스카를 종속시켰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바보도 아닌데, 오스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자아를 빼앗기고 백치가 된 아이는, 제 의지로 오스카를 풀어줄 수도 없었다.

바보처럼 아빠 만나게 해 준다는 말에 속아서….

누구보다 강하고 오만했던 남자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이가 미웠다.

그래, 처음에는.

“이, 이거… 주께요. 맛있어요.”

아이는 매일 찾아오는 오스카가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

초콜릿 반쪽을 건네며 수줍게 웃는 얼굴.

나머지는 제가 먹었는지, 입가에 묻은 흔적이 어쩐지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그래, 너한테 뭔 잘못이 있겠냐. 나쁜 놈은 황제지.’

아이에게 측은함을 느낀 그날부터였을까?

오스카는 조금씩, 아이와의 만남이 기다려졌다.

“또, 또. 머리 긴 것 봐라. 이거 다 모으면 가발 백 개는 만들겠다.”

“헤, 헤헤….”

아이의 아빠는 복수심에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는 서서히 무너지는 민심을 되찾기 위해 아이를 이용했다.

능력을 쓸 때마다 아이는 자랐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제 아빠의 몸부림이 계속될수록 아이는 그걸 막기 위해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점점, 계속….

“아, 움직이지 마! 가만히 있어! 묶기 힘들어!”

처음 봤을 때는 자기보다 어려 보이던 아이가, 어느새 자신만큼.

또 자신보다 더 자라는 모습을.

오스카는 계속 지켜보았다.

“헤헤…. 토끼…. 아빠가 해 준 거….”

아이는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주면 좋아했다.

그때마다 아빠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백치가 되어도 잊지 못한 추억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뭐야?”

“어, 어, 모냐면…. 마차!”

“마차 이렇게 안 생겼는데. 말도 없잖아.”

“마, 말 없어도 아무 데나 갈 수 있어요! 그리구 이거, 이거는 이거 모냐면… 사람들 태워 주는 새!”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갇힌 뒤 한 번도 밖을 본 적 없는 아이는, 그저 오스카가 말해 준 것으로만 세상을 상상했다.

그래서인지 그려 놓은 마차도, 새도 우스운 모습이었다.

“마차 아냐. 이렇게 안 생겼어. 새도 아냐. 사람 태우는 새 없어. 네가 새로 이름을 지어 봐.”

“어어….”

열심히 가르쳐서일까. 아니면 원래 똑똑해서일까.

아이는 자아를 빼앗겼어도 제법 의사소통이 되었다.

백치가 되지 않았다면.

“그, 그러면 이거는 자동차! 그리구, 이거, 이건 비행기….”

아이는 분명 천재였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그려낼 정도였으니까.

쌓여가는 도화지 안에는 이곳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전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딱 하나.

“사람이네. 아빠냐?”

전부 다른 그림들이었지만, 아이가 빠트리지 않고 도화지마다 그리는 것이 있었다.

두 명의 사람….

“네에. 아빠.”

“옆에는 너고?”

“아니, 아니.”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오스카를 가리켰다.

“…….”

그때, 오스카의 가슴은 찢어졌다.

조각조각 나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런데,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오스카는 처음으로 울었다.

“우, 울지 마….”

“너는.”

“…….”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오스카는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의 앞에 무릎 꿇고 오열했다.

전능한 프리메라.

아이는 상상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스카는 바랐다.

부디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상상해, 봐…. 응? 제발. 네가, 네가 생각한….”

오스카는 미친 사람처럼 울면서, 수백 장이 넘는 그림을 아이의 눈앞에 가져다 보였다.

“이, 행복한…. 곳으로 가는 상상. 응? 자동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그래, 아빠도 있는….”

이곳에서는 절대.

너는 행복할 수 없으니까.

“울지 마. 울지, 마….”

그러나 황제의 꼭두각시인 아이는, 그의 명이 아니라면 제 능력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아이는.

그 지옥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개, 갠차나. 울지 마. 쫌만 기다리면 아빠가, 아빠가 데리러 올 거야….”

미련하게, 기다렸던 건지 모른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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