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빨리, 빨리!”
곰돌이 가방을 야무지게 멘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 앞에서 계급을 재검사한 지 사흘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내 정체 안 들키기’ 미션 외에도 하나의 목표가 또 생겼다.
바로.
‘스승님의 비밀 파헤치기!’
그렇다.
오스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지금, 나는 그가 회귀하며 무슨 대가를 치렀는지 꼭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회귀의 대가로 오스카가 목숨 또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걸었다면….
‘절대 안 돼. 구해야 해.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설사 방법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만들어 낼 거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나뿐일 테니까.
“공주! 많이 기다렸어?”
“왜케 오래 걸려!”
아빠가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휙 낚아채 안았다.
“준비 좀 하고 왔지. 안 그래도 아빠 도서관 갈 생각이었거든. 마침 공주가 가자고 해서 깜짝 놀란 거 있지?”
“…아빠도? 왜?”
“응, 아빠 책 읽고 싶어서.”
아빠는 대충 둘러대며 나를 안고 마차에 올랐다.
‘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태연한 아빠의 표정을 살폈다.
황제 앞에서 마나포말에 들어갔을 당시 어마어마했던 아빠 표정을 보고, ‘설마 아빠가 내 정체를 아나?’ 고민한 지도 사흘째.
이리저리 떠봤는데 전부 실패했고 그리하여 결론이 났다.
눈치 빠른 주인공이 대답을 교묘하게 피함.
그렇다면….
‘알고 있거나, 또는 알고 있거나.’
아는데 절대 그 주제를 대놓고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심란해할 나를 위해서겠지.
‘뭐, 필요하면 물을 테니까.’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대비책은 편지로 남겨두었고, 오스카의 도움으로 황제의 의심에서도 꽤 멀리 벗어나게 됐다.
그러니 조금은, 마음 편히 숨을 돌릴 수 있는 상황.
“가자! 지식의 보고를 찾으러!”
아빠는 굉장히 들떠 보였다.
나는 불용 마법에 대해 알아보러 가는 건데, 아빠는 뭐가 궁금한 걸까?
* * *
중남부에 있는 국립 도서관.
제도에도 도서관은 있지만….
‘여기는 정보량이 다르단 말씀!’
체시어가 원작에서 테오를 구할 방법을 찾을 때, 이곳에서 많은 것을 알아갔다.
‘불용 마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여기서 알았지.’
그래서 오스카를 찾아가 테오 좀 살려 달라 부탁했었다.
“와아아아. 근데 지이인짜 크다.”
“엄청 근사하지?”
“응응!”
입을 못 다무는 나를 보고 아빠가 흐뭇하게 웃었다.
‘꼭 무슨 마법 학교 같다!’
고개를 한참 꺾어야 겨우 보이는 건물 꼭대기.
나선형 계단을 따라 층마다 책장들이 빼곡했다. 책이 수천, 아니 수만 권은 되어 보였다.
‘없는 책이 없겠는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그런데 울 공주, 무슨 책을 보고 싶어서 도서관 오자고 했어?”
“으음, 그냥 구경하려구. 보다가 잼는 책 있으면 빌릴래.”
“그래.”
씩 웃은 아빠가, 책을 품에 안고 바삐 움직이는 사서들을 가리켰다.
“찾고 싶은 책 있으면 사서 선생님들한테 물어보면 돼. 알았지?”
“응. 아빠는?”
“아빠도 책 찾으러 가야지. 공주, 책 다 고르면 여기로 가지고 와서 읽고 있어?”
아빠는 널찍한 책상 하나를 톡톡 두드리며 웃고는 책을 고르러 갔다.
나는 그런 아빠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눈치를 보다가 사서 한 명을 붙잡았다.
“저어, 선생님!”
“어머! 네, 네!”
책을 산더미처럼 품에 안고 어딘가로 향하던 사서가 상냥하게 웃으며 멈춰 섰다.
“혹시 마탑에 대해서 나와 있는 책은 어디 가면 볼 수 있어요?”
“마탑이요? 마탑 역사서랑 연구 관련 기록물 같은 걸 찾으세요?”
“네!”
“저기 오른쪽 계단 타고 올라가서 10층 책장이에요. J-12구역에 있을 거예요. 같이 찾아드릴까요?”
“괜찮아요! 제가 찾을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하하, 네. 아! 그런데 그쪽 책은 지금 대출할 수가 없어서 여기서 다 읽고 가셔야 해요.”
“…네? 왜요?”
사서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모으며 답했다.
“관련 도서 중에 백 권 정도가 폐기 예정이거든요. 마탑주님께서 직접 명하셨어요.”
“네?”
“오래된 책들이라 새로 써야 한다고는 하셨는데…. 흐음, 그래도 폐기까지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그래요.”
“가, 감사합니다!”
나는 인사하고 호다닥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와! 완전 수상하다!’
오스카가 멀쩡한 책을 폐기하려는 이유가 뭐겠는가.
분명 숨기고 싶은 게 있을 터.
달리 말하면, 폐기 예정인 책 중 쓸 만한 내용을 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근데 왜 숨기려고 하지?’
갑자기 울적해졌다.
오스카에게 대놓고 물어봤자 금제 때문에 말을 못 할 테니 이렇게 뒤에서 알아보려 한 건데….
‘조금만 늦었으면 영영 모를 뻔했잖아.’
오스카는 모든 걸 자기 혼자 떠안으려고 하는 걸까?
나는 J-12구역에 도착해서 시큰해지는 눈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수십 번 다시 떠올렸던 원작의 마지막을, 또 곱씹었다.
「잘려 나뒹구는 황제의 목.
그로써 체시어 루빈슈타인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황궁 밖에서 시위하고 있던 비능력자들이 계속해서 강력한 마법에 죽어 나갔다.
“왜 프리메라의 능력이 유지되고 있지?”
자신의 앞을 필사적으로 막아서던 마탑주, 오스카 마뉘엘을 제압하며 체시어가 물었다.
비능력자 말살 정책.
벼랑 끝에 몰린 프리메라, 황제의 마지막 발악.
혁명의 도화선을 당긴 이 비극이, 프리메라를 소멸시켰음에도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왜인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하던 오스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살려, 줘….”
아래 깔린 채, 목을 조이는 강한 손길에 울컥 피를 토하며 오스카가 말했다.
뒤늦은 목숨 구걸이라니.
체시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해.”
“다, 죽이면 끝나….”
그러나 오스카는 대답 대신 간절하게, 호소하듯 속삭일 뿐이었다.」
“하씨.”
나는 눈물을 벅벅 닦았다.
오스카를 알면 알수록, 내가 아는 원작이 전혀 다르게 읽혔다.
“살려, 줘….”
읽을 때는 분명, 오스카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대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가 최후에 비참하리만치 체시어에게 살려 달라 빌었던 이는 바로.
‘나였어.’
“다, 죽이면 끝나….”
비능력자들을 말살하라.
아마 황제가 내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 마지막 명령이 세뇌였는지, 거의 입력되다시피 한 각인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프리메라 사이에는 복잡한 힘의 섭리가 있다고 여러 번 서술되기도 했고….
어쨌든 나는, 황제가 죽은 뒤에도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 죽이면 끝나….”
끝내 비능력자들을 다 죽이고 나면, 나는 온전히 자유로워졌겠지.
오스카에게는 수많은 비능력자의 목숨보다 나 하나의 생존이 더 중요했을까?
나는 왜, 그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였던 걸까?
여러 짐작만 들 뿐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최종 빌런인 나의 서사는 원작에 안 나왔으니까.
하지만 모른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스승님을 무사히 구할 거야.’
내 생명력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왜냐면 오스카 또한, 오로지 나를 위해 시간을 되돌렸을 테니까….
“앗!”
뿌예진 시야로 J-12구역의 책장을 유심히 살피던 나는, 제법 쓸 만한 제목을 가진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역대 마탑주들의 성과: 고위급 마법식의 탄생>
반가워서 호다닥 책을 뽑아 들고 뒤도는데―
“뚜와이씨!”
―심장 떨어질 뻔했다!
아빠가 바로 뒤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후아, 후아, 후아.”
나는 쪼그라든 가슴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아빠는 나, 아니, 내가 든 책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공주 그거 읽으려고?”
“어, 어? 으응, 재밌어 보….”
둘러대려던 내 눈에 문득, 아빠가 옆구리에 챙긴 책들이 보였다.
<파빌리온 제국 마탑의 역사>
<불용 마법의 연구 1: 역사 속으로 사라진 마법식>
<불용 마법의 연구 2: 금지된 힘을 사용한 자들>
<위대한 마법사, 초대 마탑주 게릭 마뉘엘>
<마탑과 발명품: 유용한 마도구>
대충 보이는 제목들만 훑어봤는데 어째 다….
‘나랑 똑같은 걸 찾고 있다?’
내 머리가 재빨리 회전했다.
이 넓은 도서관에서 아빠와 내가 딱 마주친 이유.
아마 우리 둘이 같은 책을 찾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아빠가 왜?
내 심장이 콩콩 뛰었다.
“재밌어 보여? 그게?”
“응, 사실 아냐. 일부러 이거 찾으러 왔어.”
나는 냉큼 말했다.
“왜?”
“스승님 때문에. 아빠는 왜 그거 찾았어?”
아빠도 당황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는지 가만히 눈을 껌뻑였다.
“…아빠도 공주 스승님 때문이야.”
한참 만에 나온 대답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오스카가 불용 마법을 쓴 사실을 아빠가 알고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비밀을 들키기 싫은지 책을 몽땅 폐기하려 했던 오스카가 아빠에게 직접 말했을 리는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눈치로 의심하는 거다.
아무렴, 내가 프리메라라는 것까지 눈치로 때려 맞힌 듯한 주인공인데. 이제 놀랍지도 않군.
“공주야.”
“응.”
아빠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계단으로 향했다.
나는 곧 아빠가 내게 오스카에 관해 물을 거라 짐작했다.
‘뭐, 뭐지? 뭔가 마음이 편해….’
아빠는 주인공.
원작에서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았다.
비록 나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만약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나를 구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아빠는 뭔가 안 되도 되게 할 것 같은걸.’
어쩌면 오스카도 말이다.
“공주, 지금부터 아빠가 묻는 말에 아는 거 있으면 거짓말 안 하고 대답해줄 수 있어?”
“응, 물론이지.”
아빠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물었다.
“혹시 공주 스승님이, 공주한테만 말해준 비밀 같은 거 있어? 있으면 아빠한테만 살짝 알려주면 안 될까?”
“아니, 아빠. 스승님은 나한테 비밀 말 안 했어. 근데 어쩌다 보니까 나 혼자 알았어.”
나는 망설임 없이, 아빠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 인생 2회차야.”
아빠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울컥해져서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아빠, 아빠…. 아빠 못하는 거 없자나. 부탁이야. 우리 스승님 좀 살려 주라…. 응?”
굳이 쓸데없는 설명 안 해도 다 이해할 주인공.
아빠는 멈춰 서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당연하지.”
그리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일단 아빠가 불용 마법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러니까 집에 가서 책 좀 읽어 보고….”
“아빠! 근데 이거 책 대출 안 돼!”
“엥. 왜?”
1층으로 내려온 그때.
“당장 폐기하라니까 뭘 이렇게 질질 끌어?”
“내달 중순까지는 비치해 두어야 할걸요. 아직 황실에서 승인이 안 나서….”
“에이, 씨. 마탑주가 마탑 서적을 폐기하겠다는데 뭘 또 황실 승인을 기다리라는 거야?”
쩔쩔매는 사서들을 뒤에 줄줄이 소시지처럼 달고 등장한 오스카!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들어오다가 나와 아빠를 보고 놀라 멈춰 섰다.
“뭐야.”
“여어, 마탑주.”
아빠가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눈을 껌뻑이던 오스카의 시선이 아빠 옆구리에 낀 책에 닿았다.
‘헉.’
누가 봐도 자기 뒤를 캐는 수상한 제목들의 책.
“당신 스토컵니까?”
눈에 띄게 당황한 오스카가 한달음에 달려와 책을 뺏으려 했다.
“에헤이~!”
하지만 아빠가 더 빨랐다.
“으앙악!”
나를 한쪽 팔에 달랑, 짐짝처럼 든 아빠가 잽싸게 몸을 피했다.
오스카의 안색이 창백했다.
‘대박! 저 반응은…. 분명 이 책 중에 노다지가 있다!’
아빠는 오스카, 그리고 사서 세 명과 대치하고 섰다.
“클클클…. 책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왔다고. 이걸 순순히 내놓을 것 같아?”
“워워. 진정, 진정.”
흥분한 은행 강도처럼 말하는 아빠를 오스카가 달랬다.
“그거 틀린 내용이 많아서 폐기할 책입니다. 그리고 애 머리에 피 쏠리니까 그렇게 짐짝처럼 들고 있지 말고, 내 말 들어요. 가만히 애랑 책 내려놔요.”
오스카는 마치 인질을 잡은 범죄자를 살살 구슬리는 경찰처럼 한 걸음씩 아빠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 마탑주!”
“아니, 뭘 어쩌려고? 그거 지금 반출 불가 도서라니까?”
궁지에 몰린 아빠의 표정이 굳었다.
사서 한 명이 말을 보탰다.
“맞아요. 죄송하지만 지금 들고 계신 책들 전부 대출 안 되세요.”
“들었죠? 내놔요, 얼른.”
“…….”
“아, 아빠….”
아빠의 두 눈이 흔들렸다.
태어나서 범법이라곤 탈영 빼고 한 번도 저질러본 적 없는 참된 인성의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
#질서 #정의 #도덕심 #선
―따위의 멋지지만 꽉 막힌 키워드가 가득한 아빠.
분명 아빠는 못 하는 게 없지만, 설정에 어긋나는 행동은 안 할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오스카는 사악하게 웃었다.
‘책 없으면 안 되는데!’
이 상황에서 반출 불가 도서를 대체 어떻게….
“뭐야! 거, 거기 서!!!”
뭐지?
“……?!”
아빠는 뒤돌아 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