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19)화 (120/261)

* * * 

깊은 새벽.

에녹은 책을 덮었다.

오스카의 예상대로, 에녹은 고작 책 몇 권에 모든 것을 짐작했다.

회귀에 성공한 결과가 남아 있지 않음에 ‘금제’의 존재를 깨달았다.

또, 사라진 마법사들의 기묘한 행적에서 회귀의 ‘대가’로 무엇이 필요한지도.

“제임스 씨!”

“어어, 공주. 안 잤어? 걱정 말고 자라니까 그러네.”

집무실에 들어온 리리스가 들고 온 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마셔. 내가 직접 탔다? 피로가 쫙~ 풀리는 마법의 차야!”

“아하하. 고마워, 울 딸.”

에녹이 리리스를 안아 무릎에 앉히고 뺨에 쪽 입 맞췄다.

“아빠, 책 다 읽었으면 이제 나두 봐도 돼?”

“아니!”

슬금슬금 책으로 향하던 리리스의 손을 에녹이 급히 붙잡았다.

둘이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공주 잘 시간.”

“그럼 자고 일어나서 내일은 봐도 돼?”

“공주가 굳이 봐야 할까? 책이 엄청 어려워. 아빠가 대신 봐줄게.”

“…….”

“걱정하지 마. 아빠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주 스승님 무사히 살릴 테니까.”

안심할 수 있게 웃은 에녹이 리리스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빠는 있지. 울 공주가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아빠 마음이 더 아프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응.”

리리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그럼.”

“응.”

“나한테 뭐 물어볼 거는 없어?”

“…….”

“뭐든 물어봐. 대답할 수 있어….”

멈칫한 에녹이 피식 웃었다.

“알았어. 그런데 지금은 없네. 뭔가 궁금한 게 생기면 꼭 물어볼게.”

“…그래.”

리리스가 에녹의 무릎 위에서 폴짝 내려왔다.

“그럼 이만 잘게. 일찍 자구 일찍 일어나야 착한 어린이니까.”

“어이쿠, 그럼요.”

에녹은 아이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

그는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멈춰 서서, 한숨과 함께 마른 얼굴을 쓸었다.

오스카가 책을 숨기려던 이유.

회귀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히는.

‘리리스가 자길 살리려고 수명을 쓰는 게 싫겠지.’

그는 왜 리리스에게 이토록 헌신적일까.

에녹은 힘없이 웃었다.

지금 그를 가장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오스카가 시간을 돌린 이유.

‘…현실이었다.’

리리스가 프리메라임을 알게 된 후부터, 에녹을 계속 괴롭히고 있는 끔찍한 상상들.

아마 그것은 전부 현실이 되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상상보다 더 끔찍했을 수도 있겠지.

‘나는, 실패했던 거야.’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끝내 오스카의 목숨으로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에녹은 꽉 주먹 쥐었다.

자괴감, 분노, 살의….

여러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승리한 것은 황제였을까?

그렇다면, 가여운 내 아이는?

에녹의 숨이 거칠어졌다.

어쩌면 끝내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아이의 비극을….

오스카는 전부 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사라진 시간 속에서 아이는, 대체 얼마나 끔찍한 삶을 살았던 걸까?

오스카는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서 시간을 되돌리고 아이를 지키려 했나?

“하아, 하.”

끔찍한 상상에 휩쓸린 에녹이 콱 막힌 가슴팍을 쥐어뜯듯 붙잡았다.

왜 나는 실패했나.

바보처럼, 왜.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상 속의 비극이 현실이었음을 알게 된 지금.

어째선지 에녹의 마음은 전과 달리 마냥 두렵지 않았다.

‘절대.’

오히려, 강한 살의….

‘두 번은 실패하지 않는다.’

에녹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두 번째 기회.

이제 칼을 쥐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다.

사라지는 것은, 그 악한 존재.

딱 하나로 족했다.

* * *

이튿날.

쌍둥이 오빠들과 체시어, 그리고 제라드까지.

도스 소년병 검사들이 우리 집에 훈련하러 온 날.

체시어에게 할 말이 있어서 연무장에 나왔는데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문득.

‘흐음.’

책에 손도 못 대게 하던 아빠를 떠올렸다.

그 반응을 보면 뭐,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더라.

‘회귀의 대가가 엄청 큰 모양이지. 아마도 목숨?’

당장은 아빠도 오스카를 구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을 거다.

내 능력을 쓰는 것 빼고.

아빠는 오스카가 아무리 안타깝다 한들 내 생명력을 갈아 그를 살리려 하지 않겠지.

‘어차피 예상했어.’

나는 손목을 들어 팔찌를 봤다.

오스카를 구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쉬우면 개나 소나 다 불용 마법으로 사람도 부활시키고 시간도 돌리고 할 테다.

오스카를 살린다.

내 능력으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보자.’

오스카는 대단한 능력자.

당연히 부활에 생명력이 엄청나게 들 거다.

얼마나 들까?

긴장됐다. 일단 나는 놀라지 않게 더 충격적인 것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혹시 아빠가 죽으면 부활시키는 데 얼마나 들까?’

322years

‘어이쿠, 즉사네.’

내가 뭘 본 거람.

너무 놀라서 팔찌를 가렸다.

역시….

당신은 알아서 살아남아라, 제임스 브라운!

장난이고, 아빠는 걱정 안 된다.

이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황제가 무력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흠집 하나 못 내는 게 아빠니까.

그럼 다음.

‘오스카가 죽으면… 부활시키는 데 내 생명력 얼마나 들까?’

96years

“와, 모야?”

스승님도 만만치 않잖아….

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군.

그래도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아빠랑 달리 즉사까지는 아니니까.

나는 뿌듯한 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술래 누가 함?”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레온과 테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소년은 훈련도 팽개치고 나랑 놀아 주겠다고 숨바꼭질 술래를 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체시어를 쳐다보았다.

‘오늘 체시어한테 말해 놔야지.’

황제에게 잡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숨겨놓은 편지….

그 위치를 알려줄 생각이다.

내가 사라지고 나면 아빠에게 전해 달라고 하려고.

편지를 전할 후보를 몇몇 떠올려 봤지만, 믿을 만한 사람은 체시어뿐이었다.

“레오오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잉! 에리카 언니?”

오랜만에 보는 에리카였다.

* * *

에리카 발레린.

발레린 백작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몇 달 후면 열세 살이 되는 의젓한 아가씨다.

특징: 앙트라세 공작 가문의 레온 앙트라세를 3년째 짝사랑 중.

물론 에리카는 이 짝사랑을 짝사랑으로만 끝내지 않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하아.”

루빈슈타인 공작저에서 훈련 중이라는 레온의 스케줄을 입수하고 곧장 찾아온 길.

에리카는 그를 떠올리며 새삼스레 뺨을 붉혔다.

그녀는 치유 계열의 셉티마(*능력자 6계급 중 3번째 서열).

몇 주 전 성수 사태 때, 위르겐 토벌대 소년병으로 출정했었다.

솔직히… 무서웠다.

“야! 에리카 발레린 어디 있어?”

사령관이라 한참 떨어진 선봉에 서 있던 레온.

바빠 보이던 그였기에, 에리카도 출정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 할 줄 알았는데….

“너!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싸울 줄 알아. 너 다치면 내가 치료해 줄게.”

“아, 필요 없어! 필요 없으니까 괜히 뭐 한다고 기어 나오지 마! 죽어, 진짜!”

레온은 굳이 에리카에게 찾아와 소년병들 틈바구니에 꼭꼭 숨어 있으라고 말했다.

정말 괜찮을까?

초조하게 지켜보던 에리카는 한 번 더 레온에게 반했다.

훈련하는 건 많이 봤어도 진짜 괴물 잡는 건 처음 봤는데….

강한 남자!

자기 여자(?)를 지켜 줄 수 있는 남자!

게다가 잘생겼고!

“레오오온!”

“와이 씨, 저건 또 아침부터 왜 왔어? 못생긴 게?”

말까지 너무 매력적으로 해!

에리카는 연무장에 아이들과 모여 있는 레온에게 팔랑팔랑 다가갔다.

“으항항! 언니!”

리리스가 반갑게 달려왔다.

“리리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응! 레온 오라버니 보러 왔어? 우리 지금 체시어랑, 제라드랑 다 같이 숨바꼭질할 건데 같이 해!”

“후후, 좋아!”

에리카는 리리스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얘는 갈수록 너무너무 예뻐진다….’

리리스는 과연 잘난 사람들만 모인 루빈슈타인의 핏줄다웠다.

하얀 피부에 반짝이는 큰 눈.

새하얀 은발과 푸른 눈동자는 꼭 아기 천사 같았다.

제법 예쁘장한 또래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는 에리카지만, 리리스는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몇 년 지나 데뷔탕트(*성년에 이른 귀족, 상류 계층의 여성)가 되면 제국 사교계가 발칵 뒤집힐 만큼!

‘리리스가 레온 동생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에리카는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리리스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새삼 안도했다.

“빨리 술래 정해!”

“누가 할래?”

그때.

흐뭇하게 리리스를 관찰하고 있던 에리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리리스의 시선이 어쩐지 집요하게 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뭐지?’

에리카는 술래 정하느라 정신없는 남자아이들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레온, 테오, 체시어, 그리고….

‘쟨가?’

제라드 슈미트.

원래도 유명한 애였다.

양성소 졸업 후 도스 배지를 달고 나와서는 더 유명해졌고.

또래 여자애들끼리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1등을 차지하는 애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릴 만큼 예쁘장한 얼굴.

오묘한 연보랏빛 머리카락.

그리고 아마 웃을 때마다 반달로 휘어지는… 저 눈!

저 눈웃음이 여자애들 여럿 울렸다고 알고 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심각하게 턱을 쓰다듬던 에리카는 그 옆의 체시어와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저 애도 도스고, 키도 레온보다 크고, 뭣보다 입 떡 벌어질 만큼 잘생기긴 했지만….’

표정이 없는 게 흠이다.

애가 웃지를 않아.

영 무뚝뚝하고. 말수도 없고.

에리카는 깐깐한 새언니의 눈으로 계속해서 리리스의 남자친구 후보를 탐색했다.

‘보통의 여자애들 취향이라면 당연히 제라드 슈미트 쪽이겠지!’

결론이 났다.

히죽 웃은 에리카가 리리스를 당겨 제라드 옆에 세웠다.

“어머, 어머! 그런데 얘들아, 이것 봐!”

“……?”

“…….”

얼결에 찰싹 붙은 리리스와 제라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둘이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야?”

에리카가 바람을 넣었다.

“이 눈부신 색 조합을 봐! 둘 다 천사 같지 않아? 나는 얘네 둘 찬성이야!”

“뭐?”

“응?”

레온과 테오의 눈이 커졌다.

리리스는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고 제라드도 당황했다.

“갑자기 몬…. 으앙!”

레온이 당황한 리리스를 제 곁에 휙 끌고 왔다.

그리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제라드 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미쳤냐?”

“…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