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20)화 (121/261)

갑자기 미쳤냐니. 

내가 뭘 어쨌다고?

어이없어하는데, 테오도 제라드를 노려봤다.

“이건 아니지, 제라드.”

“아니, 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

“야, 네가 잘하는 게 뭐 있는데?”

다짜고짜 시비 거는 레온을 보며 제라드는 어이없었다.

“예쁘게 생겼잖아.”

에리카가 대신 답했다.

“남자가 예쁘게 생겨서 뭐에 씀?”

“예쁘고 잘생기면 다 돼, 레온. 너 몰랐나 본데, 쟤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 엄청 많다?”

“응, 아니야. 못생겼어. 꼬맹이 취향 아니야.”

“뭐라고요?”

듣고 있던 제라드는 발끈했다.

“너 키 몇이야?”

“153이요.”

11살 평균을 어마어마하게 웃도는 키.

레온이 입을 삐죽거렸다.

“사냥 대회 우승해 봤어?”

“안 나가 봤는데요.”

“쯧쯧.”

레온이 혀를 찼다. 또 발끈한 제라드는 휘말렸다는 사실도 잊고 항변했다.

“그런데 나가면 당연히 우승하죠.”

“네가?”

“내년 사냥 대회에서 한번 보시죠.”

“오호.”

“승마도 이겨야 할걸?”

테오도 끼어들며 덧붙였다.

“리리스랑 체시어 이길 수 있어? 둘이 이번에 승마 1, 2등 했는데. 지면 나는 인정 못 해.”

“말도 좀 탑니다. 할 수 있어요.”

“그마아안!”

리리스가 쌍둥이를 밀어냈다.

“대체 왜! 이런 바보 같은 얘기를 하는 거야! 빨리 술래나 정해!”

* * *

가위바위보로 정한 술래는 제라드.

쌍둥이는 제라드에게 ‘다 찾아야 인정해 주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대체 뭘 인정해, 인정하긴?

‘아니, 그것보다 에리카는 갑자기 왜 그래? 뭐 잘못 먹었나?’

자기 연애 사업만 열심히 하지, 웬 오지랖이람.

“체시어, 체시어, 체시어!”

“…….”

나는 체시어를 붙잡았다.

단둘이 얘기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우리 같이 숨을래?”

“그래.”

우리는 마구간으로 갔다.

제피르가 있었다.

“제피르, 안녕! 우리 좀 숨겨줘!”

나는 체시어를 끌고 제피르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 숨었다.

“휴. 여기는 못 찾겠지?”

“…….”

나는 뿌듯하게 웃다가, 체시어를 힐끔 쳐다보았다.

요즘 체시어는 무슨 일인지 생각이 많아 보인다.

걱정이 있나?

그렇다면 괜히 걱정 하나를 더 보태고 싶진 않지만….

‘믿을 만한 게 체시어뿐인걸.’

아빠 보라고 방에 숨겨 둔 편지.

물론, 내가 최후의 최후까지 황제에게 걸리지 않으면 볼 필요도 없는 편지다.

하지만 걸린다면?

그땐 아빠가 편지를 꼭 봐야 하니, 그걸 숨긴 위치를 알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체시어, 나 부탁 있어.”

“뭔데?”

“있자나. 내가 아빠한테 편지 써서 몰래 숨겨 놨거든. 너한테도 한 장 썼다?”

“…….”

“근데 그거 지금은 절대 보면 안 돼. 나중에 봐야 해.”

“그래?”

체시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래야 하는지 따져 묻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표정.

‘휴, 이래서 좋다니까.’

나는 안심하며 덧붙였다.

“내 방 옷장에 있는 아빠 옛날 짐 꾸러미에 있어.”

“그래.”

“아빠 안 입는 옷들만 넣어 놔서 그거 열어 볼 일이 없거든? 언니들도 옷장 안은 청소 안 하구.”

“아무도 못 보겠네.”

“맞아. 부끄러운 말이 많아서 다른 사람이 읽으면 안 돼.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오라버니들은 약속 안 지키구 얼른 찾아서 읽어버릴 것 같아서.”

“응.”

“근데 있지, 나중에는 꼭 아빠가 읽어 줬으면 해.”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내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거기 있다고 알려 주면 돼?”

“으항항…. 맞아.”

똑똑한 우리 체시어.

“나중에 언제?”

“음.”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중에 숨바꼭질할 때.”

“…….”

“내가 숨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못 찾을 때. 그때 꼭 아빠한테 편지 거기 있다구… 말해 줘.”

체시어는 나를 빤히 보다, 이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스.”

“응.”

“내가 찾을게.”

“응?”

“너 숨어 있는 곳.”

체시어는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을 테니까, 혹시 늦어져도 무서워하지 마.”

“…….”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그는 웃었다.

잘 웃지 않는 걸 아는데, 아마도 나를 위해서일 거다.

아빠도, 체시어도 참 이상하지.

내가 어떻게 하면 안심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군다.

“내가 꼭, 널 찾아낼게.”

그 말에, 마음이 놓였다.

체시어라면 정말로 어떻게든 나를 찾아줄 것 같아서.

“응! 기다리고 있을게!”

* * *

제라드는 끝까지 나와 체시어는 찾아내지 못했다.

“탈락! 이제 꼬맹이 옆에 얼씬도 하지 마라!”

레온이 킬킬거렸다.

“레온, 너무한 거 아냐? 숨바꼭질 한 번 졌다고 탈락이라니!”

에리카는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발 제라드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흐음, 그럴까.”

아니, 제라드는 무슨 죄야. 뭘 또 기회를 주고 말고.

“마침 점심시간이잖아? 요리를 시켜 보는 게 어때?”

“아, 에리카! 그거 좋은 생각인데? 리리스가 배고플 때 직접 요리해 줄 수 있는 가정적인 남자라면 나도 한번 고민해 볼게.”

테오가 끼어들었다.

나는 말리기도 지쳐서 그냥 흐린 눈으로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제라드가 질려서 다시는 우리 집에 훈련하러 안 와도 인정이다, 이건.

“요리요? 하아, 요리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제라드는 묘한 승부욕을 느끼는 듯했다.

고민하던 제라드가 말했다.

“이번에 제도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으로 가시죠. 제가 점심을 사겠습니다.”

“뭐?! 설마 너 라비뉴 거리의 해산물 레스토랑 말하는 거야? 점심 코스 1인당 42만 테르나 한다는 바로 거기?”

에리카가 놀라며 은근히 바람을 넣자, 걸려든 쌍둥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라드는 우쭐했다.

그들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게 뭐 문제가 되나요? 한 끼에 삼백만 테르도 안 되는데.”

거만한 표정으로 피식.

“자, 다들 가시죠.”

“이야, 재력 합격!!!”

“맞지! 괜히 맛없는 음식 해 주는 것보다는 그냥 돈으로 해결하는 게 나아!”

레온과 테오가 짝짝 박수 쳤다.

“어휴.”

결국, 점심은 나가서 먹기로 하고 밖으로 이동하려는데.

“리리스, 먼저 가 있을래?”

체시어가 나를 붙잡았다.

“엥. 왜?”

“나 전에 쓰던 방에 찾아볼 게 있어서.”

“응? 뭐 놔두고 간 거 있어?”

체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선물해 주셨던 펜인데, 집 옮기고 나서 짐 풀 때 없었거든. 챙길 때 빠졌나 해서….”

“앗, 진짜?”

“응. 이미 치웠으면 어쩔 수 없지만, 한번 찾아라도 보려고.”

“못 찾으면 제티랑 쥰한테 물어봐! 너 가구 언니들이 방 청소했거든!”

“알았어.”

체시어는 우리를 먼저 보냈다.

“금방 따라갈게.”

* * *

곧바로 체시어가 향한 곳은 쓰던 제 방이 아니었다.

리리스의 방.

쥐 죽은 듯 고요한 방으로 몰래 들어온 체시어가 문을 닫았다.

‘미안.’

숨겨 둔 편지를 나중에 봐 달라는 부탁.

리리스는 자신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말한 지 30분도 안 되어 약속을 저버린 걸 알면 화를 낼 테지만….

‘정말 미안.’

체시어는 당장, 리리스가 써 둔 편지를 읽어야 한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궁금해하는.

에녹도, 오스카도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만 모르는.

리리스의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옷장이라고 했지.’

문을 여는 체시어의 손이 떨렸다.

옷장 안.

낡은 짐 꾸러미 속.

말한 대로 리리스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체시어는 재빨리 그것을 열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읽으며….

‘이게… 뭐야.’

점점, 혼란에 빠졌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다만.

…나는 프리메라야, 그래서…

내가 황제에게 잡히고 나면…

만약에 나를 죽여야만 할 때…


아빠, 사랑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아빠는 계속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리리스가 끝내 무얼 말하려는지는 깨달았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편지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뭐지?

다, 무슨 말이지?

“하아, 하아.”

침착해야 하는데.

상상도 못 했던 내용에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체시어는 핑글핑글 도는 시야를 다잡기 위해 머리를 꽉 쥐었다.

“체시어, 있잖아…. 나, 나 살려 주라.”

“나 절대, 응?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줘야 해?”

“나 절대 죽이지 마….”

체시어는 이제야 리리스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너한테도 한 장 썼다?”

쓰면서 얼마나 울었던 건지.

말라붙은 눈물 자국 때문에 곳곳이 일그러진 편지.

체시어. 만약에 실패하게 되더라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네가 나를 죽이게 되더라도….

나는 정말 괜찮아. 너를 하나도 원망하지 않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마.

그리고 우리 아빠를 꼭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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