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21)화 (122/261)

* * * 

12월의 어느 날.

마수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계절, 겨울.

악시온 리브르는 북부 지역 마수들을 토벌하는 중이었다.

그는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에녹과는 따로 토벌대를 꾸렸다.

다시 말해 괴물 상관 옆에서 몸 편히 구경만 하지 못하고 열심히 뺑이 치는 중.

“저 녀석은 뭐지?”

와중에 악시온은 능력자 한 명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갓 출정한 듯,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

온통 새하얀 눈밭에서 태양처럼 붉은 머리칼이 강렬했다.

맨손으로 망설임 없이 마수를 찢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저렇게 실력 좋은 놈이 있었나?”

“아아, 제국군 아니고 용병입니다. 디에즈(*능력자 6계급 중 6번째 서열)래요.”

옆에 있던 부관 필립이 말했다.

악시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디에즈?”

“예. 저놈 대단하죠? 올해 양성소 졸업한 어린애라던데. 안 그래도 소속 용병단에서 일당백이라고 소문 자자하더라고요.”

“양성소?”

“열한 살이고요.”

“열한 살? 저 덩치가?”

갈수록 가관.

이번에는 입까지 떡 벌어졌다.

올해 양성소를 졸업했다면 체시어, 리리스와 동기.

게다가 열한 살?

체시어와 같은 나이다.

요즘 들어 뭔가에 쫓기듯 훈련에 매진하는 체시어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악시온에게 대련을 부탁했다.

“…그냥 봐주지 마시고, 하면 안 될까요. 저 다쳐도 괜찮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다치면 훈련도 못 해. 적당히 해.”

악시온은 체시어를 떠올리다가 쯧쯧 혀를 찼다.

사실.

‘봐준 거 아닌데….’

전력을 다했다는 건 무덤 들어갈 때까지 숨겨야지.

아무리 봐도 체시어는 제게서 더 배울 게 없다. 아쉽지만 훈련할 때는 에녹에게 보내야겠지.

‘그건 그렇고 올해 양성소에 뭔 일 있나.’

도스도 둘이나 나왔고 능력까지 어마어마한 데다, 웬 디에즈까지 미쳐 날뛴다.

“다들 괴물들이네.”

악시온은 눈부시게 활약하는 붉은 머리의 소년을 계속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 * *

제도에 첫눈이 내렸다.

몽실몽실한 함박눈이 거리를 덮은 겨울날 아침.

요즘 들어 마수 토벌하느라 집을 자주 비우는 아빠랑 같이 첫눈 못 본 것 빼곤, 분명 완벽했는데….

“급보요, 급보!”

“파빌 신전에 신의 계시가!”

이른 아침부터 떠들썩한 제도.

파빌 신전의 대신관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신의 계시를 받았단다.

<하루빨리 온 대륙에 나의 은총을 떨칠 수 있게 하라.

그것이 곧 나의 힘을 강대하게 하며 나의 종들을 더욱이 굽어살피게 하리니.>

대륙 통일을 부추기는 계시였다.

얼른 다른 나라 쑤셔서 먹어라!

그래야 내가 너희들 돌봐줄 거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와, 발등에 불 떨어진 황제 놈이 얼른 땅따먹기하려는 거야 알았지만….’

나는 좌절했다.

‘이런 식으로 내 업적(?)을 이용할 줄은 몰랐는데!’

구교파에 힘도 실어 주고 병자들도 낫게 할 겸, 내가 만들었던 거짓 계시.

앓고 있던 평민들이 진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오랫동안 말이 없던 주신 프리메라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당연히!

제국민들의 신앙심은 그 사건을 계기로 최대치를 찍고 있는 상태.

그 와중에 또 내려온 신의 계시?

물론 황제랑 대신관 할아버지가 짜고 친 거짓이겠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다들 무조건 믿겠지.’

황제가 또!

또 머리를 썼다.

튀어버린 신이 여전히 남아 있는 척 살려 놨더니, 그걸 역이용한 거다.

침략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나는 손톱을 딱딱 물었다.

‘계시까지 내려온 마당에 아빠가 전쟁 싫다고 하면? 아빠만 욕 왕창 먹겠지? 그렇다고 전쟁을 하게 할 순 없잖아?’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얌전히 주인공들의 혁명만 기다리려 했는데, 어째 황제와 나의 머리싸움으로 치닫는 기분….

‘아, 자신 없는데.’

울고 싶어졌다.

내가 뭔가 하면 할수록 정체를 들킬 확률이 높아지니까 되도록 정말, 얌전히 가만히 있으려고 했건만.

‘그런데 선택권이 없는걸. 전쟁할 수도 없고, 계시까지 내린 마당에 전쟁 안 하겠다고 버티다 아빠 입지 쪼그라들게 둘 수도 없고.’

없던 신을 살려 놓은 건 나다.

황제가 그걸 이용하게 했으니….

뒤처리도 내가 해야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 * *

세라프 신전.

오랜만에 본 자드키엘 사제님은 여전했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공녀님!”

“우아아앙.”

“아하하하!”

그는 어디선가 가져온 꿀이 든 빵을 내 입에 넣어 주고는 잘 먹는 게 마음에 드는지 웃었다.

‘으윽.’

꽃 같은 분홍빛 머리칼이 이마 위로 사르르 흐트러지며 환하게 웃는 저 얼굴!

‘안 돼! 없던 신앙심도 생길 만큼 너무 신성한 얼굴이야! 오늘도 거짓말하러 온 건데 양심에 찔린다구!’

천사 자드키엘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휘에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악마가 된 기분….

애써 팔을 들어 눈을 가려본다.

“공녀님은 정말 천사세요.”

“…네?”

자드키엘은 열심히 빨고 있던 내 수건을 가져가 대신 조물거리며 말했다.

“공녀님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어요? 귀하신 분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아직 어리시니까 놀고 싶으실 텐데, 직접 봉사까지 하러 와 주시고.”

“아.”

봉사는 자연스럽게 여기 오려던 눈속임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딱히 이유가 없다면 또 들를 생각도 안 했겠구나.

나는 양심에 찔리고 미안해져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여, 사제님. 자주 왔어야 했는데.”

“네에?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자드키엘이 허둥거렸다.

“안 그래도 죄송한데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정말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돼요. 다 바쁘신 분들일 텐데….”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신전에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해서 함께 온 우리 집 사병 아저씨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중이었다.

사제님들 일을 나눠 하며 무거운 것도 척척 들어 주고, 환자도 돌보고 있다.

“그리고 공녀님, 이런 차림도….”

자드키엘은 내 모습을 보며 정말 미안한지 울상을 지었다.

음, 지금 나는 평민 차림이다.

옛날에 제논 살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왔다.

게다가.

“으항항! 왜요? 이 옷 이쁜데. 글구 사제님, 저 이 머리도 귀엽죠?”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제임스 브라운 씨처럼 힘을 숨긴 모습이란 말씀!

“그럼요! 너무너무 예쁘고 귀여우세요! 천사 같아요!”

“흠흠.”

진심으로 찬양하는 자드키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민망해졌다.

힘을 숨긴 이유는 뭐, 별거 없다.

계시를 받은 이후 세라프 신전에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소란 피우기 싫었다.

‘나 귀족이오!’ 얼굴에 써 붙여 놓고 돌아다니면….

‘전에도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하고 미안해하고 자꾸 쳐다보고 그랬으니까.’

조용히 신전 일을 좀 도와주다가 오늘의 목표까지 달성하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아! 공녀님, 저 지금 약 받으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숨 좀 돌리세요. 계속 일하셨잖아요.”

“약이요?”

“네. 저기 보이시죠? 바로 옆에 빨간 벽돌 건물 1층이에요.”

자드키엘이 신전 담벼락 너머를 가리켰다.

코앞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드키엘과 함께 나왔다.

“평민 약제사분이신데, 저희 신전 사정이 어려웠을 때는 돈도 안 받고 그냥 약 지어 주고 그러셨어요.”

“우와, 정말요?”

“네. 진짜 고마운 분이세요. 다행히 요즘은 기부금이 많이 들어와서 전에 챙겨 주신 것까지 더해서 많이 보답하고 있어요.”

훈훈하군.

자드키엘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약방 건물로 발을 들여놓은 그때.

“내 돈! 돈 갚으라고! 어?!”

무슨 일이지?

약방은 초토화 상태.

약재들은 짓밟혔고 바닥마다 깨진 유리들이 위험하게 널려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놀란 자드키엘이 달려갔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 한 명이, 깡마른 약방 노인의 멱살을 잡아 대롱대롱 들고 있었다.

“뭐야, 사제님 아니십니까?”

노인을 내려 준 남자가 자드키엘을 보고 구시렁거렸다.

“괜찮으세요?”

“컥, 컥.”

자드키엘은 숨쉬기 힘들어 보이는 노인에게 재빨리 마나를 흘려 주었다.

그리고는 화를 냈다.

“뭐 하시는 거냐고요!”

“뭘 하긴요. 일하는 중이지. 요 노인네가 내 돈을 빌려 가고 안 갚은 게 벌써 석 달이나 됐단 말입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약방 노인이 미안한 듯 말했다.

“이보게. 다음 달에는 내가 꼭….”

“저번 달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이 미친 노인네야!”

“저기요. 말 험하게 하지 마세요. 약제사님, 무슨 일로 돈을 빌리셨어요?”

자드키엘이 침착하게 물었다.

“미안합니다, 사제님. 약재들을 좀 사려고요…. 신전 환자들이 많아진 통에….”

“아.”

와, 세상에. 그런 거였어?

자드키엘의 눈이 죄책감으로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이내 그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돈 꾸러미를 빼고 몸을 일으켰다.

“약제사님이 빌리신 돈이 얼마입니까?”

“대신 갚아 주시려고요? 이것 참 고마우셔라. 1500만 테르요.”

당당히 돈을 꺼내려던 자드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듣고 있던 나도 입을 떡 벌렸다.

약재 시세는 잘 모르지만, 고작 약초 몇 포기가 천오백만 테르나 하나?

“이 사람아…. 적당히 해야지. 60만 테르가 어찌 두 달 만에 1500만 테르가 되나….”

약방 노인이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불법 고리대금업자였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야, 이 노인네야. 다 알고 빌린 거 아냐? 내가 이자 얼마 붙일 거라고 분명히 말하고 빌려줬지?”

“…….”

약방 노인은 말이 없었다.

“저기여, 아저씨.”

남자의 덩치가 좀 무서웠지만, 나는 소심히 끼어들었다.

“말하구 빌려줬다고 해도 아저씨 잘못이에요. 돈 빌려주는 일 하려면 나라에서 정해 놓은 이자만 붙이셔야져….”

“뭐? 넌 뭐야?”

“아저씨 맘대로 돈을 그렇게 눈덩이처럼 불려가지구 달라 하면 어뜨케요? 이거 불법인데….”

“뭔 개소리야? 얼마를 더 받든 빌려준 놈 마음이지. 쥐콩만한 게 뭘 안다고 까불어?”

음, 그래. 여기 세라프 거리였지.

무법지대 그 자체인 평민 거주 지역에서 불법이니 합법이니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없나.

“글구 돈을 못 갚았고 해도 일케 폭력 쓰면 안 돼요. 치안대에 신고할게요.”

물론 치안대도 유명무실하다.

그러나 일전에 악시온이 아동 실종 사건을 해결하며 기강을 잡은 뒤로는, 제법 일하는 척은 하고 있다 들었다.

남자도 그걸 아는지 주춤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

“주인장! 저번에 주문했던 약….”

고동색 로브 차림의 누군가가 약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난장판을 보고 흠칫 놀랐다.

“이게 뭔 난리래?”

나보다 훌쩍 큰 키.

하지만 성인까지는 아니고, 소년 같았다.

전신을 덮은 로브하며, 코와 입을 꽁꽁 가린 그는 보이는 게 눈뿐.

그러나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났다.

피 냄새가 훅 끼쳤거든.

“…….”

주변을 살피던 소년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어라, 뭐지? 뭔가 익숙한데?’

잿빛 눈동자.

키도 덩치도 목소리도 내 기억에 없는 사람인데 어째선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인지 나를 가만 들여보다가 중얼거렸다.

“너어, 혹시….”

그때였다.

“으앙악!”

뒤에서 대뜸 내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드는 게 아닌가.

숨이 턱 막혔다.

“공녀님!”

자드키엘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나쁜 불법 고리대금업자 놈의 귀에는, 자드키엘이 은연중에 흘린 내 신분이 들리지도 않았던 모양.

치안대에 신고하겠다는 내 협박이 무서웠는지 험악하게 이를 갈았다.

“너 이씨, 어디 가려고? 갑자기 무슨 치안대야? 나 맨날 이렇게 밥 벌어 먹고살았다고! 어디 가서 쓸데없는… 억!”

그때 로브 쓴 소년이 재빨리 다가왔다.

소년이 내 뒷덜미를 잡은 남자의 손을 꽉 틀어쥔 순간.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능력자?’

소년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나를 가뿐히 잡아서 안전하게 내려준 뒤에 로브를 걷었다.

“너 뭐야, 새끼야?”

붉은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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