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에 회색 눈?’
나는 조였던 목덜미를 잡고 호다다닥 거리를 벌리며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닌데?
목소리도 완전 남자고.
“으아악! 아파! 놔!”
“아하. 당신 얼굴 기억난다. 설마 아직도 사람들 등쳐먹고 다녀?”
“놔, 놔! 이거 놓으라고!”
키나 덩치 차이가 꽤 났는데도, 소년의 손에 붙들린 남자는 맥을 못 췄다.
“이런 미친놈. 약방을 아주 다 들쑤셔놨네.”
이를 간 소년이 손에 힘을 줬다.
“으아아아악!”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남자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부러져 뒤틀렸다.
“요즘 치안대 무서운 줄도 모르나? 당신보다 더한 쓰레기들도 이딴 개짓거리는 눈치 봐 가면서 하던데.”
“허어, 흐아아.”
아프겠다….
남자는 마디가 다 부러진 손을 붙잡고 무릎 꿇은 채 신음만 흘렸다.
쯧쯧, 혀를 찬 소년이 품에서 명함 같은 것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남자의 옷 앞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여기 능력자인 내 친구가 하는 치료방이야. 뼈 부러진 것도 고쳐 주니 가서 봐 달라고 해.”
소년의 눈이 휘어졌다.
웃는 것 같았다.
“젬한테 정신 교육받고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우와아아!”
소년, 아니! ‘소녀’의 말에 드디어 긴가민가했던 내 의심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돈은 내라!”
“아악!”
젬은 불법 고리대금업자의 엉덩이를 뻥 차서 내쫓았다.
“치료만 받고 튀면 지옥 끝까지 찾아가서 손가락 다 부러뜨려 버린다!”
“젬!”
나는 반가워서 소리쳤다.
젬은 아직 코와 입을 가리고 있는 로브를 쑥 내리더니, 나를 보며 웃었다.
“너 리리스 맞지?”
* * *
젬.
풀네임은 제미언 트라하.
원작에서 ‘붉은 들개’ 용병단 단장이었던, 어마어마한 능력치의 평민 용병!
훗날 주인공 체시어와 둘도 없는 전우가 되어 전장을 휩쓸던 남자!
…라고 알고 있었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고 원작과 달리 내 특별 과외를 받아 양성소를 졸업한 우리의 친구, 젬!
“너 모야아!”
“아하하!”
반년 만의 만남이었다.
신전 기도실에서 우리는 그간의 얘기를 나눴다.
“키가…. 키가 왜 이렇게 컸어?”
“좀 많이 컸지? 나도 놀랐다니까. 자고 일어나면 커 있고, 자고 일어나면 또 커 있고 그래.”
“대단하다. 키 때문에 전혀 못 알아봤어.”
“하하. 이제 다 컸겠지, 뭐.”
아니야. 너 앞으로 2m도 더 넘게 클 예정….
물론 그 말은 삼켰다.
“목소리두 완전 달라졌는데?”
“그러게 말이야. 몇 달 사이에 많이 변했어. 아니, 그보다 너 이 머리 색깔은 뭐야? 나도 너 한 번에 못 알아봤잖아!”
“아아! 잠깐 숨겼어!”
나는 히죽 웃고는 아빠 따라 앞머리를 쓱 넘겨 보았다.
동시에 마법이 풀리자 젬이 재미있다는 듯 와하하 웃었다.
“멋있다!”
“그치?”
숨긴 힘을 공개할 때는 제법 짜릿하단 말이지.
“그런데, 젬! 너 전에 제라드가 다 같이 얼굴 보자구 연락했는데 왜 거절했어?”
“아아, 그거.”
양성소에서 퇴소하면서 제라드는 나와 체시어, 젬, 롬에게 근사한 식사 대접을 해 주기로 했었다.
그간 시끄러운 일이 많아 미뤄졌지만.
성수 사태가 막 끝난 이후였었나?
제라드가 직접 마차를 보내 젬과 롬을 찾았는데 둘 다 안 와서 결국 무산됐었다.
“미안. 그때 안 간 게 아니고 못 갔어. 토벌대에 고용됐었거든.”
“헉, 그랬구나. 너 벌써 용병 일 하구 있는 거야?”
“당연하지. 퇴소하자마자 용병단 들어갔는걸. 나 그때부터 하루도 제대로 쉬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응. 이래 봬도 나 꽤 잘나간다고! 나 안 끼우면, 우리 용병단에는 의뢰도 안 들어온단 말씀!”
젬은 우쭐했다.
“알지, 알지! 젬 최고야!”
“으하하!”
당연히 잘나가겠지. 제미언 트라하가 누군데.
“근데 롬은 모 하구 있어? 너는 그렇다 치고 롬은 왜 초대했는데 안 왔대?”
“아아, 걔도 바빠.”
젬이 큭큭 웃고는 품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엥. 이거 아까 그 빚쟁이 아저씨한테 준 거 아냐?”
“맞아. 롬은 세라프 거리에 치료방 열었어. 걔, 돈 진짜 많이 번다?”
“뭐어?”
“하하. 다 내 덕이랄까? 우리 용병단 사람들 다치고 깨지면 전부 롬한테 가라고 다리 놔 줬거든.”
“와, 진짜 잘됐다!”
“그치? 걔 이제 말도 안 더듬어.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는데.”
“저, 정말이야? 와아, 진짜 최고! 정말정말 잘됐다!”
“아하하!”
나는 젬의 손을 꽉 잡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좋은 소식들이 가득!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 웃고 떠들었다.
* * *
귀가 완료!
집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하고 이불 덮고 눕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오늘 정말 최고였어!’
오랜만에 젬을 봤고, 자드키엘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신전에 방문한 목적도 무사히 달성하고 왔다.
나쁜 황제 놈의 수작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겠지만.
‘뭐, 이걸로 전쟁 일으키라는 그 어이없는 거짓 계시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
평화롭게 살자고 목숨 걸어가며 혁명 준비하는 주인공들인데 침략 전쟁에 나가게 할 수는 없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려다가, 훌쩍 큰 젬이 생각나서 자꾸 뒤척였다.
원작의 마지막 챕터명, <혁명>.
“크으!”
그 가슴 웅장해지는 단어!
처음에 맨발로 제도에 뛰쳐나와 시위를 시작한 것은 평민들이었다.
황제파의 능력자들은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으나, 턱도 없었다.
‘제미언 트라하가 완전 멋있게 다 막아 줬거든!’
처음 만났을 때는 얼떨떨해서 얼른 와닿지 않았는데.
뭐랄까, 훌쩍 자란 젬의 모습을 떠올리니 혁명도 가까워진 기분?
“으항항! 이대로만 가보자구!”
아직도 토벌이 안 끝났는지 내 침대 옆자리는 비어있었지만.
“아빠도 잘 자! 사랑해!”
그래도 행복한 마음으로, 난 아빠에게 굿나잇 인사를 날렸다.
“내일은 집에 꼭 들어와라!”
* * *
에녹이 남부 쪽의 마수들을 토벌하고 제도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씁쓸한 소식이었다.
‘웃기는군.’
늦은 밤.
내린 첫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제도.
고요한 풍경과 달리, 제도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신이 그딴 계시를 내린다니. 제국민들을 바보 취급하는가.’
파빌 신전에 내려온 신의 계시.
계시에서 신은, 침략 전쟁과 대륙 통일을 종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황제의 수작이었다.
원래라면 이번 겨울, 제국은 침략 전쟁을 시작했을 터.
황제는 리리스를 인질 삼아 명령했었고 일전에는 에녹도 각오했었다.
‘리리스.’
에녹은 딸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착한 아이는, 아빠의 신념을 지키려고 계급을 속이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옥타바….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황제는 확실한 목줄을 쥘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탐욕이 가득한 그 악인이 쉬이 포기할 거라고는, 어차피 생각하지 않았다.
성수 사태.
그리고 이번 신의 계시까지.
몸부림이 그치지 않는다.
‘곤란하네.’
황제는 어떻게든, 올해를 넘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라프 신전의 병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기적을 계기로, 제국민들의 신앙심이 절정에 달한 상황.
아마 이번 신의 계시를 거스르고 침공을 반대한다면, 에녹에게는 꽤 타격이 클 거다.
“후우.”
지친 발걸음은 공작저가 보이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졌다.
걱정할 딸에게는 힘든 모습을 보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
그때.
에녹은 어두운 공작저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선 그림자를 발견했다.
“체시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체시어였다.
“너 왜 여기 있어?”
날이 추웠다.
그런데도 아이는 날씨에 안 맞게 얇은 옷 한 장만 덜렁 입고 멍하니 서 있었다.
급히 다가간 에녹이 체시어의 뺨을 붙잡았다. 차가웠다.
“뭐야! 왜? 리리스 보러 왔어? 아니, 왜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아저씨….”
에녹은 멈칫했다.
체시어의 눈이 붉었다. 운 듯이.
게다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무슨 일이야.”
“아저씨, 저….”
체시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벌벌 떠는 몸.
추워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저, 모르겠어요….”
“뭐?”
떨리는 손으로 체시어는 품에서 뭔가 꺼내 에녹에게 건넸다.
석 장의 편지였다.
그 순간, 에녹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빤히 보이는 내용은 당장 읽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딸애의 글씨체.
그것만 보고도 알 수 있었으니까.
‘말한 모양이구나. 체시어에게.’
이 편지가 무엇일지.
체시어가 왜 이렇게 혼란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혼자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
“제가 뭘, 뭘 하면 되는지 생각을, 해 봤는데….”
“…….”
“…모르겠어요.”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몇 날 며칠 혼자 앓았을 체시어를 보고 있으니 절로 목이 메었다.
“알려 주세요, 아저씨.”
체시어가 떨리는 손으로 에녹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안쓰러울 만큼 간절하게, 빌기 시작했다.
“뭐든지, 다 할게요. 제가, 제가 다 할게요. 제발요.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배우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가 할게요.”
“…….”
“그러니까, 제발….”
괴로워 찌푸린 얼굴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체시어는 거칠게 소매로 눈을 훔쳤다.
“제 손으로 리리스를 죽이는 것 말고요….”
“체시어. 그게 무슨 말, 하.”
에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아야 해요. 무사히. 약속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 아아….”
“…….”
달래줘야 하는데.
차마 에녹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표정도 없고 제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던 아이가.
“제가 뭘, 뭘 하면 되는지….”
벼랑 끝에 몰려서 안쓰럽게 오열하고 있었다.
“제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