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시어….”
에녹은 끝내 아이를 달래줄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끌어안았다.
그는 오열하는 아이를 보며 또한 두려워졌다.
진실을 마주하기가.
그토록 감정에 무디던 체시어를 이만큼이나 무너지게 한 딸의 말이 무엇이었을지.
“죽이고, 싶지 않아요….”
“…….”
“약속했어요…. 제발….”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딸애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그 말뜻이 무엇일지.
차마 알고 싶지 않았다.
* * *
에녹은 겨우 진정시킨 체시어를 방에 데려다 놓고 집무실에 와 한참 망설였다.
리리스가 쓴 편지.
뒤집어놓은 그것을 열기까지, 그에게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이걸 보고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바보 같네.’
에녹은 조소하며 편지를 뒤집었다.
안녕, 아빠!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에는 아마 내가 없겠지?
편지는 첫 줄부터 에녹을 무너트렸다.
다음에는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게 무슨….’
말해 준 적도 없건만.
리리스는 마치 신처럼, 전부 내다보고 있었다.
지금 에녹이 갈고 벼려내는 칼날.
반란을 위해 준비하는 모든 것을.
“어떻게….”
자신의 몸부림, 그 하나하나마다 반격하는 황제의 계략도 함께.
‘미래를 보는 것인가?’
프리메라여서?
아니, 그런 것까지 가능하다면 애초부터 황제와의 싸움에는 승산이 없었을 터.
에녹은 천천히 깨달았다.
아이는, 아이는….
1789년, 비능력자 말살 정책.
여기까지 왔으면 성공! ㅠㅠ 아빠, 수고 많았어.
근데 이거 황제 폐하를 잡아도 안 끝나…. 사람들을 죽이는 게 나거든 ㅠㅠ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시간을 전부 기억하는 것이다.
회귀자인 오스카처럼.
비극, 그 자체였던.
이전 생을 전부.
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나는 너무 괴로울 거야.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아 줘. 부탁이야.
조금이라도 빨리… 많은 사람을 살려 줘.
숨이 턱 막혔다. 에녹이 놀란 눈으로 제 목깃을 콱 쥐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은 사라진 시간 그대로, 끝을 향해 똑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가 무사히 곁에 있는 것.
그 사실 하나만 빼고.
“왜….”
너는 왜?
왜,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망치지 말구 제도로 돌아가자. 기사단에도 복귀하고.”
“그리구 나도 아빠 따라 제도 갈래.”
이곳으로 돌아오려 했던 걸까?
모른 척,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그러고 싶었을 텐데.
“하, 하하….”
에녹은 허탈하게 웃었다.
비로소, 평화. 모두가 행복한 결말. 정상적인 나라….
딸은 그걸 위해 아빠가 칼을 쥐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이 위험에 빠지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하하….”
에녹은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계속 자조했다.
아이를, 마냥 이기적이어도 괜찮을 어리고 여린 아이를….
그리 가르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녹, 자신이었다.
“내가, 내가 너를….”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비극은 그의 상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충격적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실패했다면?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알량한 대의를 위한 몸부림.
딸은, 그런 아빠의 몸부림을 막기 위해 죽어가고 있었는데.
“죽이고, 싶지 않아요….”
자신이 가르친 체시어의 손으로, 대의를 위해 만든 검으로.
끝내 딸의 목숨을 거두기까지 했다.
“으아, 아….”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날 선 손이 답답한 가슴을 헤집었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무엇이 중요한지도 몰랐던, 멍청한 아빠 때문에.
“이런 전쟁은 나가지 마세요, 아버지. 왜 황제 폐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으십니까? 정말 이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치기 어린 소년 시절.
에녹은 침략 전쟁에 출정하는 부친 노르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노르딕은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에녹의 모친은 전사했다.
황제의 명령. 죽으라고 보낸 전쟁터였다.
그 이후였지.
꼭 에녹처럼, 황제의 앞에서도 입바른 소리만 하던 노르딕이 순순히 칼을 쥔 것은.
“언젠가 네 신념이… 너를 죽이는 때가 올 거다.”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다 맞았습니다.
나를, 내 목숨과도 같은 딸을….
“하아, 으윽.”
핏발이 서 치뜬 눈에 눈물이 고였다. 손은 연신, 헤쳐진 가슴팍을 마구 헤집었다.
“아! 아!”
퍽, 퍽. 괴로워 내려치는 주먹질. 가슴에는 벌건 피멍이 들었다.
너를 죽였던 것이 나였구나.
아빠의 신념이, 너를 죽였구나.
“하윽….”
괴로워.
너무나도 괴롭다.
가여운 딸이 홀로 버텼을 비극을 상상하는 것이….
너무나.
* * *
‘뭐지, 이거?’
분명 아빠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잠들었었는데.
눈 뜨자마자 나는 낯선 곳에 서 있었다.
‘엥. 악시온이잖아?’
무장한 악시온과 기사들이 보였다.
나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삼초오온!”
반갑게 불렀지만, 그는 대꾸를 안 했다.
무시? 아니.
내가 안 보이는 듯했다.
“삼촌… 아?”
나는 악시온의 손을 잡은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그건 나였다!
몇 달 전의 모습이다.
제논에서 살던 때.
낡은 원피스 차림의 나는, 울었는지 눈이 빨개져 있었다.
‘오, 이거 꿈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묘한 부유감하며, 내가 나를 보고 있는 이질감까지.
‘와, 자각몽 같은 건가?’
신기했다. 꿈인 걸 인지하면서 꾸는 꿈이라니.
어딘가로 향하는 성기사들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던 나는 멈칫했다.
‘잠깐. 이거….’
깨달은 순간.
심장이 콩콩, 뛰었다.
‘내가 모르는 원작 부분 같은데?’
나는 납치됐었다.
아빠를 복귀시키기 위해, 황제가 성기사단에게 명령했으니까.
악시온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지금의 나는 원작을 알기에, 아빠 옆에 얌전히 붙어서 제도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원래는 아니었겠지. 그대로 납치당했을 테고.’
예상이 맞았는지, 악시온과 성기사단들이 도착한 곳은 능력자 양성소였다.
나는 거기서 창백한 낯의 엄마를 보았다.
“…정말 아직도, 제논에 있었어?”
“그래.”
엄마는 입술을 물었다.
“바보같이, 왜….”
위치를 발설했지만, 아빠가 계속 제논에 머무르고 있지를 않았길 바란 눈치였다.
“바보같이?”
나는 흠칫 놀랐다.
엄마를 보는 악시온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에녹 그 똑똑한 자식이, 왜 그리 멍청한 짓을 했을까.”
“…….”
“혼자 낳은 애 아니니까. 딸이 어디 있는지, 그래도 엄마는 알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악시온은 이를 갈며 덧붙였다.
“상상이나 했을까. 이미 한참 전에, 그래도 믿었던 네 입으로 자기 위치가 넘어갔단 걸?”
엄마는 대답 없이 악시온의 눈을 피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에휴, 다 알고 있었던 건데 왜 또 우울해지냐. 정신 차려.’
나는 뺨을 짝짝 쳤다.
엄마가 은퇴한 건, 내 이부동생 카일을 낳고 난 다음이었다.
그렇다면 도망친 지 고작 2년 만에… 황제의 귀에 이미 아빠 위치가 들어갔다는 얘기.
우리가 어디 숨어 있는지 알면서도 황제는 내가 7살이 될 때까지 찾지 않았다.
그 이유는, 뭐.
‘뻔하지. 아빠한테 내가 엄청 소중해져야 하니까. 아기에게 유대감이 생길 시간을 만든 거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제는 진짜 악마 같다.
“…미안해, 악시온. 그래도 당신은 다친 데 없이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 사람 상대하기 힘들었을 텐데.”
“쉽던데.”
악시온이 비아냥거렸다.
“애를 데리고 있었으니까. 혹시 애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 대단한 놈이 멍청이처럼 아무것도 못 해. 참 웃기더라고.”
“…….”
“지금 제도로 오고 있을 거다. 이제 다, 폐하의 뜻대로 됐군.”
“…미안.”
엄마는 우두커니 선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런 엄마와 달리, 내 시선은 계속 엄마에게 향해 있었다.
“정말 미안해. 할 말이 없어. 당신 에녹이랑 얼마나 친했는지 아는데…. 배신하는 마음, 무거웠을 거 알아.”
“잠깐, 잠깐. 저기요?”
그때, 땀에 전 주황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필립이 끼어들었다.
“그냥 듣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말 진짜 이상하게 하시네.”
성기사단의 분위기 메이커.
마냥 웃는 상이었던 필립 삼촌.
그러나 지금은 무척 싸늘했다.
“단장님이 몇 번이나 폐하 명령 무시한 거 모르세요? 질질 끌다가 결국, 우리 기사단 다 죽게 생기니까 하는 수 없이 간 거 몰라요?”
“아.”
“그런데 뭐라고요? 배신? 이게, 단장님이 배신한 겁니까? 네?”
“그만해라.”
악시온이 흥분한 필립을 말렸다.
엄마는 아차 싶었는지 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내가 너무, 너무 정신이 없어서. 말실수했어.”
벌벌 떠는 엄마 모습도, 화가 난 악시온과 필립의 모습도.
정말, 다 보기 힘들었다.
‘악시온이… 황제의 명령을 바로 따른 게 아니었구나….’
말을 안 해서 몰랐다.
아빠나 오스카 말고는, 감히 프리메라인 황제의 명령에 불복할 간 큰 능력자는 없다.
그런데 악시온은 최후의 최후까지 버텼던 모양이다.
“너랑은 더 할 얘기 없다. 코어 열고, 계급 받으면 끝나지? 애도 더는 네 얼굴 볼 일 없을 거야.”
악시온은 내 손을 잡고 양성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어, 엄마예요?”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나는, 악시온의 손을 뿌리치며 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 우리 엄마 맞아요?”
“…….”
엄마는 당황했다.
악시온도, 성기사 삼촌들도 모두 멈칫하며 나를 지켜보았다.
“어, 어마아…. 무, 무서워요. 저, 저 아저씨가 막, 끅. 으아아앙!”
“얘야,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악시온과 삼촌들을 무서워하는 나를 안아서 달랬다.
‘아, 꼬맹이 최악이네.’
나는 그걸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모를 7살 그대로의 정신연령이었던 원작의 나.
그래서인지 눈치라곤 없었다.
크고 무서운 기사들과 달리 작고 상냥해 보이는 여자, 그것도 처음 본 엄마에게….
울며 매달렸다.
마치 엄마가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멍청이.’
하는 수 없이, 나를 데리고 양성소로 들어간 것은 엄마였다.
‘으악! 가지 마!’
거기는 지옥 불구덩이라고!
나를 안은 엄마의 뒷모습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의미 없었다.
‘진짜 최악이네!’
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뒤따르려던 순간.
나는 물에 빠져 있다 누군가에게 건져지듯 단숨에 꿈과 격리되었다.
* * *
“후아!”
꿈에서 깨 눈을 떠 보니 햇살이 강했다.
아침.
자각몽이 놀랍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내가 모르는 원작을 알고 싶다고 빌어 봐도 능력 밖의 일이었는데.
‘왜 이런 꿈을 꿨지? 또 꿀 수도 있을까?’
더 보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도저히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딱 끊기고 말았다.
절단 신공이 예사롭지 않군.
그런 생각을 하며 폴딱, 몸을 일으키니.
“오잉?”
옆에 아빠가 있었다.
왜인지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있다.
“아빠 모야! 언제 왔어?”
내 목소리에 아빠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옷은 또 왜 안 갈아입구 일케 불편하게… 으앙악!”
아빠 얼굴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이게 뭐람.
무슨 일이지?
왜, 대체 왜….
잘생긴 주인공의 눈이, 눈이 왜?
“공주야아. 잘 잤어?”
쩍쩍 갈라진 목소리.
아빠는 복어 배처럼 부어버린 눈을 억지로 치켜떴다.
“아, 아빠 왜…. 대, 대체 누가….”
“으응.”
“아빠를 개구리로 만들어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