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24)화 (125/261)

아빠는 경악하는 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모냐구! 누가 그랬어! 빨리 말해! 누가 아빠 때렸어?”

“아니, 아니.”

아빠가 내 팔을 당겼다.

그리고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일어나 한참 침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암만 봐도 운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공주야.”

“응.”

아빠의 숨이 거칠어졌다.

“아, 아빠? 왜 그래….”

눈이 개구리처럼 퉁퉁 부을 때까지 나 몰래 울어 놓고도 부족했던 걸까.

“공주야, 아빠가….”

“…….”

아빠는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안쓰러울 만큼 흐느꼈다.

“아빠가 미안해.”

“뭐가? 응?”

“정말정말 미안해. 아빠가…. 아빠가, 약속 못 지켜서. 공주 지켜주지 못해서….”

“…….”

“공주 혼자 힘들었는데, 아무것도 몰라서…. 공주 기다리는데, 데리러 못 가서….”

내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렴풋이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무도 모르는, 몰라야 하는.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은 비극.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비극.

원작의 나에게 하는 사과.

‘뭐지? 어떻게 안 거야?’

나는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아빠가 이번에는, 있잖아.”

“아, 아빠….”

아빠는 묻었던 얼굴을 들고 나와 눈을 맞췄다.

우는 얼굴로도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보인다. 그 표정이 오히려 더 나를 슬프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 지켜줄게.”

“…….”

“절대로 외롭게, 아프게…. 우리 공주 혼자 힘들게 안 할게.”

아빠는 다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떨리는 팔에 지금 아빠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아빠는 그렇게 한참, 나를 안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빠가, 정말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 * *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나는 아빠가 씻으러 가자마자 옷장 안의 짐 꾸러미를 열어보고 좌절했다.

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이거 실화야?”

큰일 할 주인공의 멘탈을 깨고 싶지 않아, 적당한 시기에 공개하려고 했던 나의 비밀.

어디, 편지에 내 정체만 썼던가?

나는 허무해진 마음으로 편지에 뭘 썼는지 드문드문 떠올려 봤다.

…나는 탑에 숨겨지게 돼. 황제궁 은색 첨탑…

10년 동안 계속…

황태자가 쓰는 능력은 전부 다 내 생명력…

비능력자 말살 정책. 황제 폐하를 잡아도 안 끝나…. 사람들을 죽이는 게 나거든.

“와, 잠깐만.”

나는 경악해서 머리를 붙잡았다.

그 외에도 아빠가 빠릿빠릿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미래의 사건들을 아주 상세하게도 나열해 놨다.

아빠는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오스카가 회귀한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비슷하게 짐작했을 거다.

나도 인생 2회차이며, 심지어 그 비극을 직접 겪은 줄 알겠지.

‘그건 아닌데.’

낭패였다.

아빠가 너무 마음 아파할 테니 이따 사실대로 말해 줄까?

사실 21세기 지구별에서 살다가 거기서 읽은 책 속에 환생한 거라고?

그래서 진짜 이 비극을 다 겪은 건 아니니 걱정 말라고?

‘응, 잘도 믿겠다.’

아빠 걱정할까 봐 이상한 거짓말까지 지어내는구나, 생각하겠지.

“아니! 근데 아빠는 뜬금없이 옷장 정리는 왜…!”

씩씩거리던 내 머릿속에 번개같이 누군가가 떠올랐다.

체시어.

‘설마? 체시어가 말했다고?’

아무리 아빠에게 주인공 버프가 가득해도 그렇지.

갑자기 신내림 받은 듯 ‘앗! 왠지 옷장을 열어보고 싶은걸?’ 하고 내 편지를 발견했을 리는 없다.

‘냄새가 난다!’

바로 배신의 냄새!

체시어 이 바보 멍청이 똥개 해삼 말미잘!

나는 당장 방을 나왔다.

씻고, 밥 먹고, 옷 입고 체시어 집에 가서 따질 것이다.

“엥?!”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바로 옆방에서 체시어가 나왔다.

“너 모야! 왜 여기 있어?”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깨달았다.

어제 말했구나.

우리 집까지 와서 아빠에게 직접.

“너, 너….”

“미안.”

흥분해서 체시어를 향해 삿대질하는데, 그가 담백하게 사과했다.

“뭐?”

“미안해.”

분노 게이지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욕하면 듣고 때리면 맞겠다는 듯 초연하게 선 체시어.

없던 전투 의지도 사라지는군.

“왜 그랬어….”

나는 축 늘어져서 물었다.

“아저씨가 알아야 할 것 같았어. 나 혼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너한테 모 해 달라구 한 거 아니었어! 그냥, 그냥 나는…!”

“리리스.”

체시어가 가만히 나를 불렀다.

왜일까?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인데도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나한테 쓴 편지에 네가 한 부탁 있잖아.”

“…….”

“미안한데 못 들어주겠어.”

부탁. 부탁.

부탁이 뭐였더라.

내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면 망설이지 말아주라. 그때는 이미 늦은 거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사람들 살려줘. 부탁이야.

다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잖아. 아무 잘못도 없이 죽으면 너무 불쌍해.

생각하는데, 성큼 다가온 체시어가 말했다.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게, 실패하지 않을게.”

“…….”

“그런데 만약에 실패하더라도 네 부탁은 못 들어주겠어. 아니, 안 들을 거야.”

“체시어….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 불쌍하게 죽는 거 그냥 지켜본다구?”

“그럼 나는.”

체시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나는, 안 불쌍해?”

“뭐?”

“다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라며. 그럼 나는. 나한테는 없어? 내 가족, 내 친구는?”

입술을 꽉 문 체시어가, 멍해진 나를 보며 떨었다.

“친구 하자며. 가족, 해주겠다며.”

“아, 체시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잘해 주지 말라고 했는데.”

“…….”

“그런데 네가, 다 했잖아.”

원망하듯 나를 보는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래 놓고…. 어떻게 나보고, 너를….”

“…….”

“그런, 부탁을 해?”

“체, 체시어. 그게 아니라 나는….”

“어어, 얘들아.”

그때 아빠가 불쑥 계단에서 올라왔다.

“싸우지 마.”

아빠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퉁퉁 부었던 눈은 어느새 말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니, 아침부터 왜 부른 건데?”

뒤따라 올라온 악시온.

그는 체시어를 보고 놀랐다.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악시온.”

아빠가 의아해하는 악시온의 팔을 꽉 붙잡았다.

“나 지금 황실에 가 봐야 하거든.”

“뭐? 왜. 폐하가 또 불렀나?”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를 불렀다고? 아, 이제 가짜 계시를 만들었으니까 전쟁 나가라는 소리 하라고 부른 걸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애 좀 봐주라.”

“……?”

악시온이 눈을 껌뻑거렸다.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제대로 들었어.”

“…집에 사람이 없나?”

악시온은 황당해했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왜 그를 이른 아침부터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에휴, 역시 울 아빠 멘탈 완전히 나갔네.’

두려운 거다.

날 혼자 두기가.

‘이럴까 봐 몰랐으면 했던 건데.’

나는 안전한 집 안에 얌전히 있을 텐데도, 쉴 새 없이 나쁜 상상이 들어 아빠를 괴롭히겠지.

앞으로 아빠는 불필요할 정도로 나를 보호하려 들 거다.

“있어. 아버지도 계시고 사용인들도 있고, 다 있는데….”

“그런데 뭐!”

아빠는 웃으며 악시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한테 육아의 기쁨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다.”

“아.”

악시온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런 미친놈.”

* * *

황제, 니콜라스의 집무실.

황제와 대신관, 두 사람이 있었다.

대신관, 티모시 하르트만.

그는 일흔여덟의 노신관이다.

넘쳐났던 성력, 젊은 시절의 체력, 고귀했던 신앙심마저 희미하리만치 사라진 그에게 딱 하나.

여전히 건재한 것이 있었다.

바로 탐욕이었다.

“보잘것없는 늙은이에게 이리 신경 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바쁘게 펜을 끼적이는 니콜라스를 향해, 티모시가 고개를 숙였다.

대륙 통일을 부추기는 신의 계시.

황제의 뜻에 따라 거짓으로 꾸민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가 이 계시가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감사까지야.”

“아닙니다. 감사드려야지요.”

어린 사제도 듣는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대신관, 티모시의 위상은 추락할 만큼 추락해 있었다.

하나 이번에 황제에게 명 받은 거짓 계시를 알림으로써, 그의 평판은 단숨에 올라갔다.

“그리 고마워하면 내가 민망하지. 나 또한, 얻는 바가 있어 꾸민 일 아닌가. 서로 도와야지.”

“모쪼록 잘되어야 할 텐데요.”

티모시가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제아무리 에녹 경이라고 해도, 지금 제도 분위기에 신의 계시를 무시하지는 않겠지요?”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걸세.”

니콜라스가 쯧쯧 혀를 찼다.

“신이나 다름없는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아닌가. 한데 형체도 없는 신의 계시가 무엇이 두렵겠어.”

“예? 그러면 에녹 경이 순순히 전쟁을 준비하지 않을 거란 말씀이신지요?”

“그렇겠지. 다만 내가 이 일을 꾸민 것은, 에녹의 기세를 죽여 놓기 위함이야.”

니콜라스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제 알량한 신념에 제국민들 모두 돌을 던진다면, 천천히 생각을 바꿔 먹을 수도 있겠지.”

“…그렇군요.”

티모시는 답지 않게 소극적인 니콜라스를 보며, 에녹을 떠올렸다.

에녹 루빈슈타인.

전능한 프리메라도 함부로 휘두를 수 없는 자.

황제는 항상, 에녹을 가지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방법이 없을까?

“저, 폐하. 에녹 경에게는 딸이 있지 않습니까?”

티모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용해 보시는 것이 어떤지요.”

“…….”

한참 서류 위에 펜을 끼적이고 있던 니콜라스가, 그의 말을 곱씹다가 피식 웃었다.

“뭐, 어떻게?”

“…….”

“납치라도 하란 말인가? 귀족들 모두 등 돌릴 일을, 대놓고?”

“아아, 아뇨. 당연히 아니지요. 그것이 아니라, 폐하는 전능하신 분이시니 능력을 사용하셔서….”

니콜라스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이를 감쪽같이 숨기기라도 할까? 아니면 내 말에 복종하게라도 할까? 그렇게 능력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프리메라인 나 아니면 누가 있지?”

니콜라스는 짜증이 났다.

“전쟁을 일으키려고 딸을 인질 삼아 아비를 휘두르려는 제국의 지도자라. 호사가들에게 참 좋은 먹잇감이겠어.”

“아뇨, 폐하. 저는….”

티모시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래도 리리스를 떠올릴 때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그였다.

“신전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아둔해진 모양이야, 대신관. 내가 능력을 썼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면서 에녹의 딸을 어찌 인질 삼지? 그게 됐으면 진작 시도하지 않았겠나? 응?”

“…….”

“에녹은 안 그래도 기회만 있으면 나를 죽여버리고 싶을지도 모르지. 그런 자에게, 내 손으로 직접, 칼을 쥘 명분을 갖다 바치라고?”

그게 쉬웠으면 성수 사태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황제의 권력이 허락하는, 합법적인 선 안에서 리리스를 위험에 빠트리려고 꾸민 일이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저도 그렇게 생각 없이 말을 꺼낸 게 아닙니다.”

식은땀을 닦은 티모시가 흥분한 니콜라스를 달래고는 덧붙였다.

“폐하의 능력임을 모르게 일을 꾸밀 방법이 있습니다. 에녹 경이 제 발로 폐하를 찾아와, 딸을 살려 달라 빌게 할 방법이요.”

“뭐?”

“아이가 성능력자가 맞지요?”

티모시의 질문에, 니콜라스의 눈이 커졌다.

그가 무슨 방법을 말하려는지 곧장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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