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력자라면, 성열을 앓을 수가 있지요.”
능력자들이 앓는 병이 있다.
마나 충돌, 폭주, 성열.
마나 충돌은 성력과 마력 수치가 같은 능력자에게서 발병.
폭주와 성열은 각각 마력 수치와 성력 수치가 지나치게 높은 능력자에게서 발병한다.
그중 ‘성열(聖熱)’은, 신전 출신의 신도들이 일생에 한 번은 겪곤 하는 통과의례 같은 병이다.
“성력에 기반한 병이니, 혹 폐하의 능력으로 아이를… 성열에 들게 할 수도 있지 않으신지.”
“…그래, 할 수 있지.”
니콜라스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성열이 발현하면 능력자는 깊은 잠에 빠지며 앓기 시작한다.
보통 일주일 정도 성열을 견디면 자연스레 눈을 뜨지만, 끝내 죽음에 이르는 능력자도 더러 있었다.
성열에 든 능력자를 강제로 깨울 방법은 없다.
프리메라의 전능한 힘 빼고는.
“기억 안 나십니까, 폐하? 파빌 신전의 어린 신도들을 폐하께서 직접 깨워주신 일이요.”
고위급 능력자가 성열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제 편인 신교파의 신도들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니콜라스는, 성열을 앓는 파빌 신전의 신도들을 직접 깨워주고는 했다.
성력에 기반한 병이기에 깨우는 데 생명력이 거의 들지 않는, 아주 쉬운 일이다.
“아이가 폐하의 능력으로 성열에 든 것인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지. 그래….”
성능력자라면 성력이 마력보다 더 우세한 사실만 확실할 뿐.
성열을 앓을 만큼 성력 수치가 높은 능력자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성열에 든 자를 권능으로 깨울 수 있는 것은 위대하신 프리메라뿐 아닙니까?”
만족한 니콜라스의 표정을 보며 티모시가 덧붙였다.
“에녹 경이 제 발로 찾아와 빌지 않고는 못 배길 테지요. 제발, 딸을 깨워달라고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에녹 경이 왔습니다.”
보좌관 라몬의 목소리가, 기다린 에녹의 방문을 알리고 있었다.
“그래. 들라 하게.”
니콜라스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솟았다.
* * *
나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 악시온, 체시어와 함께 뒷산에 올라왔다.
일일 육아를 맡은 악시온은 내내 이를 갈면서도 나와 잘 놀아줬다.
“우항항! 삼촌 받아랏~!”
퍽―!
“아!”
내 손에서 날아간 눈뭉치가 악시온의 허벅지를 매섭게 강타했다!
엄청난 전투력이다.
나 제법 강할지도?
“죽었어, 너.”
“어라? 사, 삼촌! 잠깐만여! 타임!”
악시온이 커다랗게 눈을 뭉쳤다.
내가 던진 눈뭉치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그건 쫌 아니져!”
“뭐가 아니야!”
“으악!”
나는 뒤돌아 몸을 쭈그렸다. 등 뒤에 퍽, 하고 눈뭉치가 박혔다.
“으앙, 아퍼!”
“엄살 부리지 마. 단단하게 안 뭉쳤어.”
“우히히.”
실은 맞으면서 느꼈다. 대충대충 뭉쳐서 맞자마자 부스러지는 걸.
“재밌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또 주섬주섬 눈을 모았다.
그러다가 문득, 멀리서 가만히 앉아 나와 악시온을 지켜보고만 있는 체시어를 발견했다.
‘흐음.’
체시어는 아빠처럼 멘탈이 나간 데다가 나한테 화도 난 듯했다.
‘사과해야겠지?’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 없다고.
다수의 생존을 위해 나의 희생을 택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한 체시어.
당황했던 것도 잠시.
나는 체시어에게 미안해졌다.
‘나도 참 너무했지.’
죽는 게 너무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체시어한테 제발 살려 달라고 수십 번 말했던 주제에.
그렇게 체시어를 잔뜩 혼란스럽게 해 놓고는.
‘이제 와서, 정 방법이 없으면 그냥 죽여 줘~ 하는데. 응, 나 같아도 화나겠다.’
게다가 나는 이미 체시어에게 꽤 소중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체시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일 수 없겠지.
“체시어! 눈싸움 같이 안 해?”
“응, 안 해.”
불렀지만, 체시어는 또 단호했다.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다시 눈을 모으기 시작했다.
“너 춥지?”
코를 킁, 삼키는데 악시온이 다가왔다.
“아녀? 괜찮아요.”
“뭐가 또 괜찮아? 계속 찔찔 코 먹고 있잖아.”
정말로 괜찮은데.
나는 도톰한 코트에 빨간 망토를 두르고 털모자에 털부츠, 장갑까지 야무지게 끼고 있었다.
“일로 와 봐.”
나와 마주 본 악시온이 앞섶에 달린 방울을 당겨 망토를 단단히 조여 줬다.
“귀도 빨갛잖아.”
다음으로는 털모자도 꾹꾹 눌러 귀를 가려 준 뒤에 자기 주머니에서 병아리처럼 노란 장갑을 꺼냈다.
뭐야? 저건 언제 챙겼담.
“장갑 젖었으니까 바꿔 껴.”
“넹!”
젖은 장갑을 벗긴 그는 빨개진 내 손을 잡아서 호호 입김까지 불어가며 녹여 줬다.
그리고는 새 장갑을 끼우고 젖은 장갑을 챙겼다.
“으항항….”
“뭔데? 왜 웃어?”
웃는 나를 보며 악시온이 쓱 눈썹을 세웠다.
“삼촌 육아 잘해서요….”
“뭐야?”
악시온이 발끈했다.
묘한 자각몽을 꾸고 난 이후라서일까?
나는 악시온이 아빠의 편이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끝을 앞둔 순간.
대의보다 앞섰던 에녹의 복수가 드디어 완성되려 하고 있었다.
악시온은, 손때 묻은 딸의 인형을 쥔 채 한참 침묵하는 에녹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후회하고 있다.”
“…뭘.”
“그날, 너한테서.”
“…….”
“네 딸을 빼앗았던 것.”」
원작의 마지막 장에서 악시온은 그렇게 말했다.
미안할 것도 없고, 후회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괴로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던 사람.
‘휴, 역시 아빠 따라서 고분고분 제도로 돌아온 건 잘했어. 다들 마음 불편할 일 없으니까.’
질질 끌다 그대로 납치되었으면 죽음뿐이었겠지.
탈영병이었던 아빠인지라 당시에는 황제가 나를 납치하고 안 놔줄 명분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도 섣불리 시비 못 거는 최강자인 울 아빠 딸, 그것도 옥타바!
정체만 안 들키면 황제는 대놓고 나를 괴롭히진 못할 거다.
그러니까 제도로 돌아온 내 선택에는 전혀 후회가 없다.
“삼촌!”
“뭐.”
“있자나요, 우리 아빠가 삼촌 많이 괴롭히지만…. 그래도 평생, 친구 해 주세요.”
“내가 왜?”
악시온이 질색했다.
“난 네 아버지 얼굴 그만 봐도 되는 은퇴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거든? 그런데 뭐? 평생 친구? 꿈에 나올까 무서운 소리 하지도 마라.”
“으아앙~ 안 돼요!”
“뭐가 안 돼! 싫어!”
나는 일어나는 악시온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싫다고 하면서도 그는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삼촌, 삼촌! 이제 눈사람! 눈사람 만들어 주세요!”
“하아, 무슨…. 아빠 닮았나. 애가 지치지도 않네.”
악시온은 구시렁거렸지만, 그래도 눈사람을 만들어 주려는지 눈을 크게 굴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 옆에서 꼬마 눈사람 두 개를 만들었다.
“헤헤, 체시어어! 이것 봐라?”
그리고 체시어에게 달려갔다.
“내가 만들었어! 너랑 나야!”
“…….”
체시어는 물끄러미 눈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걸 체시어의 앞에 가만히 내려두고,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체시어, 미안해.”
“…….”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나도 누가 너 죽이라구 하면 절대 못 죽여. 나도 못 하는 건데 너한테 부탁해서 미안해.”
“…….”
“부탁 바꿔도 돼?”
체시어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말 안 해도 돼. 무슨 부탁 할 건지 아니까.”
“오잉. 말 안 해두 알아?”
“응. 실패하지 말라고 할 거잖아.”
역시 똑똑하군.
“성공하면 아무도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너도 무사하고, 사람들도 무사하겠지.”
“응, 그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체시어의 눈치를 보았다.
“근데 너 있자나. 혹시 어제 아빠랑 무슨 말 했어?”
“많이 했어. 이제는 다 알아. 아저씨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으응, 그렇구나.”
훗날을 위해 체시어를 가르치고 있던 아빠.
하지만 고작 열한 살밖에 안 된 체시어에게 벌써 모든 것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겠지.
‘어휴, 그놈의 편지.’
나 때문에 모든 게 앞당겨졌다.
열한 살짜리에게 세상의 평화를 위해 황제의 목을 날려 줄 수 있냐고 물었을 아빠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또, 그 말을 듣고 체시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 하겠다고 했어?”
“해야 해.”
체시어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덧붙였다.
“계속 궁금했어. 비능력자 혼혈인 내가 왜 도스인지. 왜 프리메라의 허락 없이도 능력을 쓸 수 있는 능력자로 태어났는지.”
“…….”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내린 사명 같은 게 아닐까.
체시어는 세상을 구할 주인공.
나쁜 악당을 처단할 유일한 능력자이니까.
“너를 구해야 하니까.”
띠용.
그러나 나는 예상을 빗나간 대답에 삐끗했다.
“으응?”
“나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꼭, 해내야 해.”
내게서 고개를 돌린 체시어는 눈사람 두 개를 보며 말했다.
“너랑 같이… 살아남을 거야.”
* * *
“너랑 같이… 살아남을 거야.”
굳은 다짐.
그걸 들은 리리스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수줍게 속삭였다.
“응. 고마워.”
둘은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옆에 붙은 서로의 온기만으로도 대화가 되는 것처럼.
체시어는 리리스가 제 어깨에 가만 기대 오는 걸 느끼며, 서툴게 만든 눈사람 두 개를 계속 응시했다.
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저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황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위협할 수 있을지.
잘 모르지만….
툭.
그때, 눈사람 하나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체시어는 손을 뻗어 그것을 일으키려다, 여전히 제 어깨에 기댄 리리스를 돌아보았다.
“리리스.”
“…….”
“자?”
피곤했을까? 리리스는 순식간에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 추우니까 들어가서 자.”
체시어가 리리스를 흔들었다.
금세 깜짝 놀라 일어나겠지, 생각했는데.
“…리리스?”
리리스는 흔드는 대로 풀썩, 눈밭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