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스!”
불길한 예감.
체시어는 다급히 리리스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흔들었다.
그러나 꼭 죽은 듯 아무 반응도 없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악시온이 큰 소리에 놀라 달려왔다.
“리리스가, 리리스가 이상해요.”
“뭐?”
급히 살펴보니 곤히 잠든 듯했다. 하지만 몸을 흔들고, 뺨을 건드려 봐도 눈을 뜨지 않는다.
“왜….”
악시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
성열(聖熱).
급히 부른 치료국의 신관이 내린 진단.
성력 수치가 지나치게 높은 성능력자들이 겪는 병이었다.
“…방법이, 방법이 없나? 마수의 핵으로는 아이를 깨울 수 없는가?”
악시온은 창백한 낯빛으로 신관을 향해 묻는 노르딕을 보았다.
“아이의 마력이 너무 없어 그러한 것이니…. 테오 때처럼, 핵으로 마력 수치를 높이면 되지 않겠나?”
간절하리만치 떨리는 목소리.
깨어나지 않는 손녀를 눈앞에 둔 심정이 어떠할지 감히 상상도 안 되었다.
“성열과 마나 충돌은 그 결이 다릅니다. 앙트라세 공자님이 마수의 핵으로 마나 충돌을 이겨내신 뒤, 저희 치료국에서도 성열 환자에게 같은 치료법을 써 봤지만….”
신관이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노르딕이 비틀거리며 리리스의 곁에 풀썩 무너졌다. 악시온이 놀라 그를 살폈다.
‘미치겠군.’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놓은 것은 노르딕만이 아니었다.
신관의 옆에 우두커니 선 체시어.
멍하니 리리스를 응시하는 눈은 초점 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
쾅―!
부술 듯 문을 박차고 에녹이 들어왔다.
“리리스!”
한달음에 다가온 에녹이 어쩔 줄 몰라 하다 이내 아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게 무슨…. 왜? 공주야….”
안타까울 만큼 사색이 된 표정.
“일어나 봐. 왜, 왜 이래. 응?”
“그만해.”
악시온이 대답 없는 아이의 몸을 자꾸 흔드는 에녹을 말렸다.
신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공작님, 성열에 들면 억지로 깨울 수 없습니다. 자연히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
에녹은 멍해져서 리리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평소처럼 편안히 잠든 모습.
그러나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성열? 프리메라가?’
성력 수치가 지나치게 높은 능력자들이 겪는 열병.
과한 성력이 적은 마력을 살라 먹고 코어를 차지하려 하며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데, 가진 것이 성력뿐인 아이가 어찌 성열을 앓는단 말인가.
“마법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대략 일주일입니다. 보통은 일주일 안에 깨어나고요. 다만 곧 열병이 오면 잠든 채로 크게 앓으실 겁니다.”
신관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한데 어린아이는 몸이 약해서, 앓는 도중 잘못되는 경우가 종종….”
“아!”
듣고 있던 노르딕이 놀라 가슴팍을 붙들었다.
당황한 신관이 재빨리 에녹을 향해 덧붙였다.
“공작님. 제가 드려도 되는 말인가 싶습니다만, 황제 폐하께 공녀님의 상황을 알려 보심이 어떨는지요.”
“…….”
“프리메라의 권능으로는 성열에 든 능력자도 깨울 수가 있습니다. 다른 가문도 아니고 루빈슈타인이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당연히 도와주시겠지요.”
에녹은 여전히 리리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신관의 말을 곱씹었다.
황제, 그래….
지금 에녹은 황제를 만나 제 뜻을 알리고 온 길이었다.
“가장 낮은 곳의 병자들을 안타까워하여 살린 신께서, 무고한 인간을 죽이고 땅을 앗으라는 계시를 내렸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대신관은 계시가 진실인지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전에는 폐하의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지 황제는, 그런 에녹의 태도쯤은 예상했다는 듯 쉬이 보내주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 자네의 마음이 무거울 일을 어찌 강요하겠나.”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본 황제의 뱀 같은 웃음이 마음에 걸렸었다.
‘이래서였구나.’
이런 빌어먹을 짓거리를 하려고.
에녹은 허탈하게 웃었다.
황제.
프리메라….
쉬이 잡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토록 전능한 그의 권능을 느낄 때면 한없이 막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고 넓은 벽을 마주한 것처럼.
절망감이 밀려왔다.
* * *
“폐하께 가 부탁을 드려. 아이가 아프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충격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노르딕이 간신히 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오자마자 에녹에게 말했다.
따라온 악시온은 부자의 사이에서 긴장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뭐?”
침대에 몸을 누이려던 노르딕이 놀라 에녹을 돌아보았다.
“대륙을 통일하라는 신의 계시가 내려온 상태입니다. 폐하께서 오늘 제게 테네바 왕국의 침공 준비를 명하셨고요.”
“그게 뭐.”
비틀거리며 다가간 노르딕이 에녹의 멱살을 잡았다.
에녹은 덤덤히 덧붙였다.
“폐하는 도움을 주는 대가로 제게 참전을 강요하실 겁니다.”
“그럼, 해!”
“안 됩니다, 아버지.”
악시온은 팽팽한 둘의 입씨름을 지켜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안 된다니? 왜 이러는 게냐? 제도로 돌아올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 아니었어?”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악시온은 단호한 에녹의 태도가 의아했다.
‘딸 일엔 뒤도 안 돌아보는 놈이 왜 저러지? 먼저 나서서 황제부터 찾아갔을 놈인데.’
노르딕이 에녹의 옷깃을 붙잡은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네놈이….”
그는 아들이 반란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 네 뜻이 먼저인 게야.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진정하십시오, 아버지.”
에녹은 냉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이가 혼자 이겨내면 다행이고, 그럴 수 없다 해도 다른 방법을 꼭 찾겠습니다. 폐하와는 협상하지 않겠습니다.”
“이이!”
노르딕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삿대질하며 무너졌다.
“어르신!”
악시온이 놀라 노르딕을 부축했다.
그러나 에녹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가버렸다.
“야!”
급히 뒤따른 악시온이 에녹을 잡아 돌렸다. 냉정한 모습과 달리 푸른 눈동자는 혼란해 보였다.
“미쳤어? 아버지 말 들어. 너한테 달리 방법이 뭐가 있다고?”
“…….”
“있다 해도 시간 없어. 열병이 오기 시작하면 언제 잘못될지 몰라. 당장 폐하께 가.”
“놔라.”
“각오했잖아, 어차피! 멀리 봐. 멀리 보라고. 칼에 피 한 번 안 묻히고 성공할 생각, 없었잖아.”
반란.
하루아침에 성공할 수는 없다.
숨을 죽이고 천천히, 끈기 있게 준비해야 한다.
악시온은 그 과정에서, 황제의 뜻을 계속 거스를 수 없음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놓으라고. 시간 없으니까.”
매섭게 제 손을 떼어내는 에녹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황당해하는 악시온을 내버려 둔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에녹은 급히 마탑으로 향했다.
언젠가부터 간절히 찾기 시작한 신께 기도하면서.
‘제발, 신이시여.’
그의 손에는 리리스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1785년 봄.
자드키엘 사제님 20살, 성열 앓음.
아빠, 사업 성공하려면 사제님이 대신관이 되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이때 사제님 꼬옥 깨워줘야 해.
혼자 못 일어나고 막 아파 ㅠㅠ
아마 내가 깨워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혹시 그때 내가 없을 수도 있잖아?
다른 방법을 알려줄게.
히히. 이거 원래 아빠가 열심히 찾아냈던 방법이야. 아빠 천재♥
1. 남부 아르고니아 영지★에 고대 신관들의 유적이 있음!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몰라. 미안 ㅠㅠ)
2. 유적에 있는 성물★로 성열을 낫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적이 봉인되어 있어서 맨눈으로는 못 찾아 ㅠㅠ)
3. 유적을 찾으려면 A급 감지 마법식이 필요!
이 마법식은 마탑에서밖에 못 구해. 원래는 스승님이 아빠 안 도와줬는데… 이때 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스승님이 이번에는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꼭꼭 자드키엘 사제님을 깨워줘!
* * *
그 시각, 마탑.
“드시면서 하세요.”
바쁘게 펜을 휘갈기던 오스카의 책상에 그릇 하나가 턱 놓였다.
어설픈 솜씨로 빵 사이에 양상추와 햄을 끼워 넣은 샌드위치.
힐끗 본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웬 쓰레기?”
“…? 쓰레기라뇨.”
그의 보좌관, 로벨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식사도 거르고 일만 하시는 거 안타까워서, 예? 일하면서 드시라고! 어? 서툰 솜씨지만 노력해서 만든 건데!”
오스카가 펜을 내려놓고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야.”
“왜요?”
서운해하는 로벨의 얼굴을 보며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로베르트 퀀.
매일 구박하지만, 그래도 오스카가 가장 믿고 아끼는 자다.
“왜 루빈슈타인 공작을 돕지 않으십니까? 황제가 두려워서 그러세요? 탑주님만 공작에게 힘을 보태시면 어려울 게 있나요?”
이전 생에서, 로벨은 에녹을 돕지 않는 오스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프리메라의 힘에 종속되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답답해 죽겠습니다! 똑똑하신 분이 왜 결단을 못 내리시는지, 정말 모르겠다고요!”
오스카는 로벨이 몰래 마법식을 훔쳐 에녹을 여러 번 도운 것을 알고 있었다.
명백한 배신이었지만, 무척 기특한 일이었다.
나서지 못하는 자신 대신 알아서 움직여 에녹을 도왔으니까.
“내가 너 제일 믿는 거 알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세요?”
오스카가 웃으며 놓아두었던 펜을 집었다.
“그냥, 뭐. 그렇다고.”
“싱거우시긴.”
그때였다.
“자, 잠시만요!”
집무실 밖이 소란스러운 듯하더니 곧 벌컥 문이 열렸다.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마탑주.”
에녹이었다.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연락도 없이 제 집무실까지 쳐들어왔다.
갑자기 왜?
고민할 겨를도 없이 오스카가 벌떡 일어나 먼저 다가갔다.
“뭡니까.”
그때,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오스카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에녹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 도움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