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빠가 힘을 숨김 (128)화 (129/261)

“아, 빨리 오라니까!”

오스카의 재촉에 에녹이 정신을 차리고 뒤따랐다.

“어디 가는데? 정확한 위치는 몰라. 그런데도 감지 마법을 쓸 수 있나?”

“이 영지 안인 건 확실하잖아요.”

얼마간 걷다 멈춰 선 오스카는, 발끝으로 편평한 흙바닥의 잔돌을 쓸어냈다.

그리고 쓸 만한 주먹 크기의 돌을 주워 흙 위에 마법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건 그리는 데 좀 오래 걸려요. 한 삼십 분? 저기 앉아서 기다리든가.”

오스카가 가라는 듯 턱짓했다.

하지만, 혼자 고생하는 사람을 두고 어디 팔자 좋게 쉴 수 있나?

에녹은 그냥 옆에 가만 서서 오스카를 지켜보았다.

‘나보다 더 정신이 없네.’

이동 마법진을 그릴 때와 달리 꽤 신중한 오스카의 얼굴.

그새 땀까지 흘리는 표정에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조금이라도 늦을까 봐.

아이가 혹시 아플까 봐.

오스카는 잔뜩 걱정하고 있었다.

‘왜일까.’

에녹은 궁금했었다.

오스카가 왜 리리스에게 이토록 헌신적인지.

시간을 돌린 것은 아이가 안타까워서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에녹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려고.

그 이유가 더 크다고 여겼다.

하지만 리리스의 편지를 보고 나서 에녹은, 자신이 끝내 성공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오스카는 왜 시간을 돌린 걸까.

모든 것이 완벽해졌을 텐데.

왜?

이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마탑주.”

평화를 찾은 세상에 딱 하나 없던 것은, 리리스.

오스카는 오직 리리스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을 돌렸던 거다.

“뭐요. 집중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중에.”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바스러지더라도 상관없을 만큼.

아이의 존재는 오스카에게 컸다.

“울 공주….”

“…….”

“당신에게 무슨, 의미야?”

빠르게 움직이던 오스카의 손이 일순 굳었다.

의미?

그 애가 내게, 무슨 의미일까.

“글쎄요.”

오스카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바보 같은 꼬맹이.

남의 가슴 다 찢어놓고, 서운하게 아빠만 찾던 미운 계집애.

“나도 궁금하네. 내 애도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널 미워하겠어.

자신의 이전 생, 거의 반평생의 페이지에 리리스가 있었다.

“왜 이렇게 죽고 못 살겠는지.”

오스카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 * *

제발, 그만 깨고 싶다.

이 빌어먹을 자각몽에서.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을 비웃듯, 나는 깨는 대신 어느새 황제의 방에 와 있었다.

맹수 앞의 초식동물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엄마.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

그리고 충격받은 황제의 표정.

나는, 이미 나의 정체가 황제의 귀에 들어간 이후의 상황임을 깨달았다.

“황족의 성이 바뀔 일이군.”

황제는 한참 침묵하다가 그렇게 읊조렸다.

황실의 핏줄, 프리메라.

만약 내 정체를 모두 알게 된다면 황제의 말대로 황족의 성이 바뀌게 될 것이다.

“내가 그걸… 두고 볼 수는 없지.”

“…….”

“계급을 혼자만 확인했다고?”

“…네.”

“셀레나.”

“예, 폐하.”

“그대도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고 내가 지켜야 할 제국민이네. 나는.”

황제는 일순, 눈을 매섭게 빛냈다.

“그대를 죽이고 싶지 않아.”

엄마가 흠칫 떨었다.

“어디 그대뿐인가. 후작도, 또.”

“…….”

“그대의 아들도 말이야.”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잔인한 협박.

이미 내 정체를 발설한 시점에서부터 엄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폐하, 죽을 때까지 함구하겠습니다. 부디, 부디….”

“아아, 떨 거 없네. 안쓰럽게.”

황제는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나는 망설였지만, 이내 두려워하는 엄마를 위해 황제에게 안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걸음을 뗐다.

“나는 누구보다 그대를 믿어. 굳이 내 능력을 써 가며 그대의 입을 막아 봤자 서로의 신뢰만 깨어질 뿐이겠지.”

황제는 나를 안아 들고 서서 엄마에게 말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엄마에게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뜻.

엄마도 도스이기 때문에 황제는 부담을 느꼈을 거다.

‘더 충격받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남았었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숙이며 도망치듯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다 아는데도, 황제가 죽이지도 않았고 세뇌하지도 않았구나.’

황제는 가족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엄마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약속을 어길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실제로도 엄마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했지. 만약 했다면, 아빠는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테니까.’

계속 남아 나를 괴롭히던 엄마를 향한 기대가 이제는 한 줌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충격받은 것과 별개로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얘야, 이름이 뭐니?”

황제는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리리스, 요.”

“그래, 리리스. 무서워할 거 없다. 아빠 보고 싶지?”

“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할 수 있겠어?”

나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누군가 들어올 거야.”

황제는 문을 가리켰다.

“그럼 그 사람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하거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고, 그대로.”

“…….”

“모든 사실에 절대 침묵할 것.”

침묵? 누구에게?

황제의 말을 들으며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나의 명령이 아니면, 자의를 갖고 행동하지 않을 것.”

종속시키라는 뜻이다.

황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머지는 천천히 명령하면 된다.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곧바로 생각하렴. 그럼 아빠에게 보내주마.”

아빠라는 단어에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

‘아.’

오스카였다.

“…이야기는 아까 다 끝났던 것 같은데. 더 할 말 있으십니까.”

어렴풋이 짐작했던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절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이유.

분명히 뭔가 알면서도 침묵했던 이유.

“아빠 다시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 했지?”

바로, 내 손으로 걸어버린 족쇄 때문이었다.

* * *

다음 순간.

나는 황제궁의 첨탑 꼭대기에 갇혀 있었다.

“헤….”

한 뼘 크기의 창을 멍하니 보다가 바보처럼 웃는 얼굴.

나는 멍청이가 되어 있었다.

‘응, 알겠다.’

억지로 묶어 놓거나 목숨을 위협하며 협박하지 않아도 말 몇 마디로 황제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자아를 빼앗은 모양이었다.

완전히 세뇌하여 종속시키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효율? 이 대참사를 효율이니 뭐니 생각하고 있는 게 웃기네.’

나는 한숨을 쉬며 내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오스카에게 능력을 쓰고 많이 자라 있었다.

“아빠 언제 오지…?”

중얼거리는 그 모습이 정말 바보 같아서, 나는 울컥해 버렸다.

“아빠 안 와, 이 바보야.”

* * *

대체 언제 잠에서 깨는 거지?

백치가 되어 탑에 갇힌 원작의 나를 지켜보는 괴로운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렀다.

‘스킵 버튼 없어? 설마 십 년 동안 여기서 지내는 거 하루하루 고스란히 보여줄 건 아니겠지?’

한숨이 나왔다.

괴로운 건 또 있었다.

철컥, 문이 열리고 들어온―

“아, 스승님이다. 안녕하세여….”

―오스카.

물론 그는 보이지 않는 내 인사를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매일 찾아오는 오스카를 보기 미안했다.

자기를 한순간에 바보로 만들어 버린 나를 미워하는 게, 표정에 적나라하게 티가 나서.

오스카는 잔뜩 화난 얼굴로 찾아와서 몇 시간 정도 말없이 앉아 있다 돌아가곤 했다.

* * *

나는 엉엉 울었다.

‘이제 그만 깨고 싶어, 진짜….’

하루하루가 괴로운 지옥이었다.

가끔 찾아오는 황제의 명에 따라 능력을 쓰는 나를 보는 것도, 또.

“벨라.”

그냥 끝까지 나를 미워하지.

언젠가부터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나를 챙기는 오스카를 보는 것도.

다, 너무너무 괴로웠다.

“음, 세라?”

“…….”

“아오, 됐다.”

오스카는 멍하니 창밖만 보면서 대꾸 없는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제야 나는 활짝 웃으며 돌아보았다. 오스카도 마주 웃었다.

‘이게 뭐야, 진짜.’

어느새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나는 오스카에게 이름조차 알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오스카는 매일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혹시 이런 이름일까?

오늘은 대답할까?

아마 그런 생각을 했겠지.

“리리스.”

“네!”

“…이제 대답하네.”

멀쩡히 대답하는 나를 보면서, 그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또, 또. 머리 긴 것 봐라. 이거 다 모으면 가발 백 개는 만들겠다.”

“헤, 헤헤….”

“앉아 봐. 머리 자르게.”

그는 왜 맨날 바보처럼 웃냐면서 나를 핀잔줬다.

그러면서도 황제가 다녀갈 때마다 길게 자란 내 머리를 다정하게 잘라주고는 했다.

“오잉. 마법 안 써두 잘하신다. 어떻게 일케 잘랐지?”

“많이 잘라 줘 봤어.”

“네?”

오스카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계속 흘렀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계속.

“다 됐다. 이쁘네.”

처음과 달리 미움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따스한 눈빛.

나는 조금씩, 그에게 큰 의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는 대충 적응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로 안 깨어나다니, 나 설마 죽은 거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나는 오스카의 옆에서 그림 그리는 데 여념 없는 바보, 아니, 나를 지켜보았다.

“이건 뭐야?”

“어, 어, 모냐면…. 마차!”

“마차 이렇게 안 생겼는데. 말도 없잖아.”

뭘 어떻게 그린 거지.

안 그래도 처참한 내 그림 솜씨를 잘 안다.

민망한 맘으로 도화지를 보는데―

‘아?’

―순간, 놀라고 말았다.

생각과 달리 어설프지만은 않은 그림.

그러나 지금의 내가 전혀 알지 못할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자동차, 비행기.

바깥을 모르는 내가 상상해서 그린 마차와 새였다.

“마차 아냐. 이렇게 안 생겼어. 새도 아냐. 사람 태우는 새 없어. 네가 새로 이름을 지어 봐.”

“그, 그러면 이거는 자동차! 그리구, 이거, 이건 비행기….”

그 대답에 더 놀라고 말았다.

뭐지? 혼란스럽던 것도 잠시.

“사람이네. 아빠냐?”

“네에. 아빠.”

오스카는 두 명의 사람 그림을 보며 내게 물었고.

“옆에는 너고?”

“아니, 아니.”

나는 오스카를 가리켰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지켜보기 힘들 만큼 괴로워하는 표정.

고통스러워하는. 슬퍼하는.

나를 연민하는.

그런 표정.

“스, 스승님….”

나는 그런 그가 너무 안타까워서 다가갔지만, 손을 잡아줄 수도 안길 수도 없었다.

“괜찮아요. 나 괜찮아요. 그니까, 그니까….”

오스카는 그대로 무너졌다.

소리치고, 가슴을 때리면서 오열했다.

“아, 제발요. 아….”

울지 마요, 제발.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오스카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자기 가슴을 쥐어뜯었다.

“상상해, 봐…. 응? 제발. 네가, 네가 생각한….”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를, 멍하니 앉은 내 눈앞에 들이밀면서.

“이, 행복한…. 곳으로 가는 상상. 응? 자동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그래, 아빠도 있는….”

내가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기를.

미친 듯이 애원했다.

“제발….”

내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그는 하염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제발, 살아 줘….”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