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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29)화 (130/261)

* * *

스킵 버튼은 없었지만, 다행히도 하루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탑에 갇힌 십 년.

그 시간이, 머릿속에 전부 빠짐없이 흡수되는 것처럼.

“으항항! 이뿌다아!”

“아, 이게 뭐가 이뻐!”

오늘도 여전한 하루.

구석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나는, 나와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도화지로도 모자랐는지 오스카의 얼굴에 우스운 낙서를 한 나.

오스카는 거울을 보며 난장판이 된 자기 얼굴에 구시렁거렸지만, 화난 기색이라곤 없이 킬킬거렸다.

‘저래도 봐주네. 스승님 맞아?’

저항 없이 웃음이 터졌다.

“꺄하하!”

나는 마냥 좋다는 듯 웃으며 오스카에게 안겼고, 그는 그런 나를 안아주며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울컥.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는 다 알겠어.’

오스카가 나를 소중하게 여겼던 이유.

‘이건 뭐… 거의 나를 키웠잖아.’

나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멍청이처럼 하루에 수십 수백 번씩 아빠만 부르며 창밖만 내다보는 백치였는데.

당신은 나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떤 행동도 못 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는데.

자유랄 게 없어졌는데.

그런 내가 뭐가 그리 예뻤을까.

“끅.”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십 년이라는 시간 내내, 우리는 서로에게 전부였다.

그 없이 내가 어떻게 이 지옥을 홀로 버텨낼 수 있었을까.

“내 말 잘 들어.”

그때, 오스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물을 삼키고 귀를 열었다.

“오늘은 절대로 나오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숨어있어야 해.”

“네에?”

“숨바꼭질하는 거야. 나랑 여기서 해 봤던 거 기억나지?”

“네!!!”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돼. 자, 약속.”

“약소옥!”

새끼손가락을 거는 둘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오늘이구나.’

혁명의 날.

바로 이날이, 내가 죽음을 앞둔 날이었음을.

“야, 바보야.”

오스카가 떠나고 홀로 남은 나를 불러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스승님이 숨바꼭질하자구 했는데 왜 말 안 들었어?”

꼭꼭 숨어있지.

그럼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아니다. 그랬으면….”

나 빼고 모두 죽었겠지.

이미 내게는 비능력자를 말살하라는 황제의 마지막 명령이 각인된 후였다.

“잘 가, 리리스.”

나는 멍청하게 헤 웃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고생했어, 나야.”

내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날 테니, 꿈에서 깨어날 수 있겠지.

나는 내게 약속해줬다.

“똑같이 안 되게 할게. 어떻게든 살아남을게.”

이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말정말, 고생했어….”

그때.

분명 보이지 않을 텐데도, 나는 돌아본 나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언제나처럼 바보 같은 웃음.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치 고생했다는 내 위로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순간.

‘아.’

시야가 반전되었다.

동시에 눈앞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소년과 남자의 경계 사이.

표정 없는 얼굴에 빛을 잃은 붉은 눈동자.

‘…체시어.’

아마 십 년의 시간 동안 훌쩍 자란 체시어일 것이다.

‘와, 이건….’

나는 이내 깨달았다.

그동안 쭉 관조하는 시점이었던 내가―

‘…좀 잔인한데.’

―하필이면 최후의 순간에는 직접, 나 자신이 되어있다는 것을.

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체시어.

「체시어 루빈슈타인은 오열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주저 없이 그의 딸, 마지막 프리메라를 향해 걸어 나갔다.

조금이라도 망설여서는 안 됐다. 이 순간에도 무고한 이들의 목숨이 흔적도 없이 바스러지고 있었으니까.

그는 누구보다 냉정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고민도, 연민도, 죄책감도 없는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왜 이번에 관조자의 시점이 아니었는지 알게 되었다.

원작에서 망설임도 없었다고 서술됐던, 마지막 체시어의 결단.

그러나.

‘아니야. 괴로워했구나.’

남들은 못 읽을 감정.

내가 그를 몰랐다면 읽어내지 못했을 눈빛.

그걸 알게 하려고….

체시어는 괴로움과 연민을 감춘 차가운 눈으로 다가와,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남부, 아르고니아.

오스카가 완성한 마법진에 마나를 흘려 넣자, 바닥에 스민 푸른 빛이 나무줄기처럼 어딘가로 향하며 퍼져 나갔다.

빛은 멀지 않은 곳의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봉인 마법이 걸린 공간을 찾은 거예요. 유적인가 뭔가로 들어가려면 저기 가서 마법진 한 번 더 그려야 하니까, 서두릅시다.”

“잠깐.”

에녹이 일어나 앞장서는 오스카를 붙잡았다.

“저쪽인 건가? 저 숲은 좀 위험해. 아르고니아 마수들 본거지거든. 몇 달 전에 들어가서 한 번 싹 없애고 오긴 했는데….”

“그게 왜요? 문제가 됩니까?”

오스카는 의아했다.

의외로 약한 모습?

그러나 곧, 못 미덥다는 듯 자길 위아래로 훑는 에녹의 시선에 황당해졌다.

나를 걱정하는 거야?

“와. 어이가 없네.”

명색이 최연소 마탑주인데.

오스카의 자존심이 바닥까지 처박혔다.

“댁이나 잘하시죠. 바보처럼 어디 팔다리 하나 날아가서 울 아빠 어쩌냐고 애 엉엉 우는 꼴 보기 싫으니까.”

“아, 나는 괜찮지. 기분 나빴어? 당신 천재잖아. 귀한 몸 다칠까 봐 걱정한 거야.”

“무시도 적당히 해야지, 씨.”

둘은 투닥거리며 숲으로 향했다.

초입에 들어서자 에녹이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손에 쥐었다.

오스카가 인상을 썼다.

“설마 그거 무기라고 챙긴 겁니까?”

“응. 바로 와서 칼이 없잖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시가 바빴기에 오스카는 숲 안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썩은 나무뿌리와 제멋대로 자란 날 선 풀들.

푸른빛의 마나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길도 없는 험지를 헤쳐 들어가기를 10분쯤 했을까.

샤샤샥―!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위쪽에서 덮치듯 날아오는 괴상한 생김새의 마수 한 마리.

‘별 게 다 있네.’

오스카는 대수롭지 않게 재빨리 실드를 둘렀다.

물론, 제 몸에만.

“어이쿠!”

쉬익―!

그러나 마수는 거리를 좁히기도 전에 푸른 검기에 두 동강 났다.

“괜찮아?”

에녹이 검기를 입힌 나뭇가지를 든 채 오스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

…그래, 무기는 무기네.

“예, 뭐. 괜찮습니다.”

에녹은 오스카가 혼자만 쇽 두른 실드를 발견하고는,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으응, 그래. 괜찮아 보이네.”

그리고는 아주 작게 덧붙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인성이면 어딜 가도 살아남겠어. 다행이야.”

“뭐랬어요?”

“아니야. 아, 여기서 끊겼는데?”

감지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푸른 마나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있었다.

에녹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돌이며 잡풀들을 쓱쓱 치워 오스카가 마법진을 그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하면 되지?”

그리고는 쓸 만한 돌까지 찾아서 오스카의 손에 쥐여 주며 뿌듯하게 물었다.

“…….”

눈을 가늘게 뜨고 에녹을 한번 흘겨본 오스카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숨은 유적을 감지하는 마법식과 그 봉인을 해제하는 마법식을 섞어 그려야 했는데….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저 인간… 전에는 이걸 혼자서 어떻게 했지?’

오스카는 주변을 경계하고 서 있는 에녹을 힐끔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전 생에서는 로벨이 훔쳐다 준 마법식을 보고 성물인가 뭔가를 구한 듯한데….

‘마법식을 알아도 힘들었을 텐데.’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 애 아버진데 그 정도는 해야지.’

물론 에녹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다, ‘천재’ 리리스의 아빠로 태어났으니 그런 거다.

“일로 와요. 다 그렸으니까.”

에녹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자 오스카가 마나를 흘려 발동시켰다.

동시에, 발밑이 아득하게 꺼지는 느낌.

“와.”

에녹이 탄성을 내뱉었다.

출구도 없는 낯선 공간.

이리저리 깨어지고 금이 간 낡은 백색 돌벽이 흡사 미로처럼 펼쳐져 있는 유적이었다.

“마탑주, 잠깐 여기서 기다려.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내가 먼저 얼른 가서 한번 보고 올게.”

오스카는 질린다는 눈으로 에녹을 보았다.

대체 이 사람은 날 뭐로 보는 거지?

모든 마법에 통달한 마탑주를 무슨 36개월 아기 돌보듯 하다니.

“예이~ 그럼 그러시든가요.”

하지만 진짜로 뭐라도 있으면 뭐.

대신 먼저 맞아주면 고맙지.

“금방 갔다 올게.”

에녹이 안쪽을 살피러 사라졌다.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게 뭐지?’

문득 오스카의 눈에, 바닥에 비석처럼 박힌 돌이 들어왔다.

부분부분 깨진 돌에 쓰인 글씨.

고대어다.

지금에 와서는 잊히고 사라져서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어디 보자.”

오스카는 무릎을 굽히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고대어를 읽는다.

수천 개나 되는 미공개 마법식을 그리는 데 필요한 게, 바로 고대어니까.

“…….”

읽어내려가는 오스카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그건 계시였다.

아마 이 유적의 주인이었을 고대 신관들이, 아주 오래전 들었을….

주신, 프리메라의 목소리.

<훗날 악에 물든 나의 힘을 거두어가기 위하여 영웅과 제물을 내릴 것이다.

제물은 영웅의 핏줄이요, 끝내 악에 맞설 희생의 방패이며 내 마지막 힘이니.

나의 권능이 모두 거두어지는 날.

비로소 이 땅에는 평화가 찾아오리라.>

영웅?

그것은 아마도….

“마탑주, 출발하지. 위험한 건 없어 보여.”

오스카는 돌아온 에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 저 남자.

그리고, 제물.

제물은 영웅의 핏줄이요,

내 마지막 힘이니

그것은 에녹의 자식이자 마지막 프리메라인,

리리스.

희생의 방패이며

계시는 말하고 있었다.

리리스는 처음부터 희생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나의 권능이 모두 거두어지는 날.

비로소 이 땅에는 평화가 찾아오리라.

오스카도 알고는 있었다.

신의 권능이 모두 사라지는 날.

프리메라의 완전한 소멸만이, 모두 바라는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그러니까….

리리스까지, 사라져야만.

“웃기네.”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마탑주?”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멍청하게 악마에게 칼을 쥐여 주고 불지옥을 만들어 낸 실수를, 지금 누구더러 해결하라는 건지.

오스카는 계시가 적힌 돌 위에 손을 올렸다.

약간의 마나가 스며들었고,

“그냥 너나 뒤져.”

“뭐?”

콰르르륵―!

이내 산산이 조각나서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이 빌어먹을 헛소리는, 이제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졌다.

오스카는 태연히 몸을 일으켰다.

에녹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입을 떡 벌린 채, 일어난 오스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갑시다.”

유유히 자길 지나쳐가는 오스카.

에녹이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화났으면 말로 할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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