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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32)화 (133/261)

“뭘 또 그렇게까진 아닙니까?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는구만.”

“진짜 아니거든.”

흥, 코웃음 친 오스카가 마법식을 완성시켰다.

곧 결계가 해제되자 제단이 빛을 내며 진동했다.

“아.”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저 돌덩이 같았던 심장 조각.

그것은, 결계가 해제된 순간 성스러운 푸른 빛을 머금고 살아서 뛰는 듯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지?”

“와, 징그럽게 생긴 것 봐라. 이걸 애한테 어떻게 써야 해요?”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울 공주 편지에 적힌 게 다라니까.”

둘은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다, 이내 누구보다 재빨리 움직였다.

“일단 시간 없으니까 가봅시다. 곧장 애 방으로.”

“같은 생각이야.”

에녹은 성물을 챙겼고 오스카는 엄지에 새로이 상처를 내 피로 이동 마법진을 그릴 준비를 했다.

딱 한 시간 반 만의 쾌거였다.

* * *

‘아.’

망설임이라곤 하나 없이, 나 대신 죽겠다는 아빠의 대답을 들은 순간.

적잖이 충격이었던지 나는 정신을 잃었다.

‘음, 아냐. 정신을 잃은 건 아니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저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을 뿐.

동시에 나는, 물에 잠긴 듯 아득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래로,

아래로.

계속,

또 아래로.

‘이제 다 알겠어. 왜 나에게 이걸 전부 보여주는지.’

내가 존재함으로 일어난 비극을 잔인하리만치 깨닫게 하고 있다.

나는 황제에게 이용당하며 많은 사람을 죽였다.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을.

게다가 멀쩡하게 살고 있던 오스카도, 끝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행복해질 수 있었던 아빠도….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 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겠는걸.’

괴로운 진실을 속속들이 알게 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겠다고 나 자신에게 했던 다짐이 점점 흐릿해졌다.

내가 살아남으면?

그럼 모든 게 괜찮아질까?

‘아니.’

이 자각몽은, 나에게 말하고 있다.

너의 존재는 재앙이야.

정확히는, ‘프리메라’라는 존재 자체가 재앙이라는 것을.

‘나쁜 건 황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황제만 없어지면 다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황제의 아빠의, 아빠의 또 아빠의….

그러니까 그의 오랜 조상도 황제만큼 나빴을까?

그런데도 신이 프리메라의 힘을 선물했을까?

어쩌면 무척 정의롭고 착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 아빠처럼.

강하고 올곧고 정의로운, 힘을 가져 마땅한 핏줄.

하지만 그의 자식의, 자식의 또 자식이 계속 힘을 계승하며 서서히 썩었을 거다.

‘황제를 죽여 봤자 내가 살아남아 있는데, 이 세상이 변할까?’

내 힘을 감추고 능력자들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되나?

그럼 내 대에서 모든 게 끊기나?

내가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식이라도 갖게 된다면?

‘프리메라가 또 나오겠지.’

나는 아니라도 내 자식의, 자식의 또 자식 중의 누군가는 황제처럼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식을 안 만들면 되는 걸까?

다짐한대도, 미래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어떻게 알아?

‘아마도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라.’

프리메라의 완전한 소멸.

그것이 해피엔딩이고, 아마 이 힘을 준 신이 바라는 결말.

원작이 굳이 주인공에게 비극과 트라우마를 안겨주며 그렇게 끝을 맺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아아. 내가 죽어야 다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운명이라면, 그건 너무 싫은데….’

아빠 보고 싶다.

많이많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빠?’

힘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던 내 앞에 마법처럼 아빠 얼굴이 보였다.

검고 푸른, 마치 깊은 바닷속과도 같은 심연.

그걸 헤치고 아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팔을 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

입을 벌려 아빠를 불러 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아빠는 끝없이 추락하는 나를 금세 붙잡아 품에 안았으니까.

‘아, 살았다.’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는 익숙한 아빠 냄새.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

아빠는 나를 위로 힘껏 밀어냈다.

나는 전과 달리 수면 위를 향해 솟고, 솟고 또 솟았고.

‘아빠?’

아빠는 조금 전의 나처럼, 검은 물속으로 추락하며 서서히 멀어졌다.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하염없이 멀어지기만 할 뿐.

아빠는 끝까지 나를 보며 웃었다.

‘아빠!!!’

물에서 건져진 느낌과 동시에,

“허억!”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아….”

나다.

분명 체시어에게 죽었을 내가, 지금 눈앞에 살아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를 물속에서 구해 끌어올리고 대신 깊이 추락하던 아빠….

지금 보고 있는 ‘나’는, 기어코 아빠 목숨을 잡아먹고 다시 살아난 ‘나’라는 걸.

“아아아아악!”

끔찍해.

짐작만 하던 상황을 실제로 보는 것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나는 머리를 붙잡고 소리치며 마구 뒷걸음질 쳤다.

정말 아빠 목숨으로 살아났어.

아빠를 죽이고 살아났어.

내가.

“우욱.”

구역질이 나왔다.

지금 저기 살아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역해서.

“내, 내가….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까 잠깐만. 아, 아무것도 하지 마. 부탁이야.”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아난 내 앞에 무릎 꿇고 미친 듯이 빌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응?”

나는 젖은 입가를 닦아내며 애써 눈을 부릅떠 둘을 보았다.

살아난 내가 역겨워서 보고 싶지 않은데도, 사라진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빠, 만날 거예요….”

나는 울며 말했다.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겉모습.

살아난 나는 역시, 고민도 없이 아빠를 되살리려 했던 모양이다.

오스카는 겁에 질린 채 그런 나를 말리고 있었다.

‘아빠를 살리는 데 322년이 필요했던가. 그래, 즉사였지….’

생각하는 순간 그대로 이루어지는 프리메라의 힘.

나는 지금 저 자리에서 아빠를 살려내며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고.

“알았으니까. 다 알았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제발.”

오스카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를 달래려는지 억지로 웃음을 띤 일그러진 얼굴.

슬프도록 기괴한 그 표정으로, 그는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 생각한 거니까, 다 돌려놓을게….”

나를 살리기 위해 아빠의 목숨을 태운 사실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 * *

“저기요.”

완성된 이동 마법진 위에 섰을 때, 오스카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뭐가?”

오스카는 무사히 성물을 손에 넣고 마냥 좋아하는 에녹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내가 사실 당신 죽여서 당신 딸을 살렸었어요.’

어차피 금제 때문에 하지도 못할 말.

하지만 금제 따위 없더라도 맨정신으로는 못 할 말이겠지.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뭘?”

재차 물었지만, 오스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금제 때문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이려나.’

에녹은 제 눈을 피하는 오스카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 모르는 사라진 시간, 이전 생에 대한 사과일 것이다.

뭐가 미안한 걸까.

“괜찮아.”

“……?”

뜻밖의 대답.

쓱 눈썹을 세운 오스카가 에녹을 돌아보았다.

“뭐래. 뭐가 미안한지는 알고 괜찮다는 겁니까?”

“정말 괜찮아.”

마나를 흡수한 이동 마법진에서 푸른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든, 내 손으로 직접 한 선택이었을 테니까.”

오스카가 굳었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에녹은 다 눈치챘는지 모른다.

지금도 딸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인데.

이전 생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짐작하는 게 뭐가 어렵겠나.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

“오히려 당신에게는 고마워. 빚을 졌으니까. 꼭, 갚도록 할게.”

오스카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마법진이 발동했다.

둘은 유적에서, 잠든 리리스가 있는 방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고요한 방.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리리스.

“리리…, 아.”

다가가려던 에녹이 멈칫했다.

성열에 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쓰러진 아이를 제 눈으로 직접 보니 놀랐던 걸까.

한껏 창백해진 얼굴로 자기보다 훨씬 먼저 달려가 리리스를 살피는 오스카.

에녹은 멍하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오, 씨. 죽은 줄 알았잖아….”

오스카가 안도하며 땀에 흠뻑 젖은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혹시나 그새 열병이라도 왔을까 했지만, 다행히 리리스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울 공주가 마탑주 명줄 십 년은 줄였겠는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오스카가 흠칫했다.

‘아, 이런. 진짜 애 아빠 놔두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 오버를.’

민망한 마음에 오스카가 슬그머니 기울였던 몸을 세웠다.

“…….”

그리고는 다가온 에녹을 보았다.

잠든 리리스를 내려다보는 눈빛.

가슴 사무치는 걱정, 그리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절절해 보이는 애정….

아이 때문에 괴로우면서도 아직은 무사함에 웃으며, 잠든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다정하게 머리를 넘겨주는 아버지.

세상에 서로뿐일 부녀.

“공주야, 아빠 왔어.”

에녹은 자신과 달랐다.

애틋한 기억 같은 거, 혼자만 갖고 앓는 자신과는….

정말 달랐다.

깨어난 아이는 아빠를 보고 행복해하겠지.

사랑스럽게 웃으면서.

‘나도 참. 바보 같긴.’

이 순간 불청객이 된 듯한 묘한 기분에, 오스카는 씁쓸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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