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울기만 하는 나를 겨우 달래 놓고, 오스카는 떨리는 손으로 하얀 분필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 하나 긋는 데 한 번.
“응. 조금만 기다려. 금방, 금방 할게….”
글자 하나 새기는 데 한 번.
기다리고 선 나를 자꾸 쳐다보고 눈에 담으면서.
마법진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쯤.
그런 오스카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내 눈은, 너무 많이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
지금 당장 말해주고 싶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이때 당신 가슴이 얼마나 미어졌는지, 슬프고 괴로웠었는지….
이제는 다 안다고.
“자, 다 됐다.”
엎드려 있던 오스카가 일어났다.
바짝 다가온 헤어짐의 시간.
본능적으로 무언가 느낀 걸까.
“여기 들어가면 돼요?”
나는 두려운 표정으로 마법진을 가리켰다.
“그럼 아빠 볼 수 있어요?”
“아니. 거기 들어가는 건 나야.”
안 돼.
말리고 싶었다.
“스승님, 하지….”
하지 마?
안 하면?
나는 오스카를 향해 뻗었던 손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어차피 말릴 수도 없지만.
‘그럼 아빠는? 아빠는 어떻게 해. 나 때문에 죽어버린 아빠는.’
가능했다고 해도, 나는 아빠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내 목숨으로 아빠를 살리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아빠도, 오스카도 무사했을 텐데.
‘역시….’
나는 멍하니 책상 위에 있는 프리메라 신상을 돌아보았다.
‘신님이 맞았나 봐요.’
내 존재 하나만 태우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원작은, 신이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해피엔딩이었던 것이다.
“잘 들어. 이제 아빠 만나게 해 줄 테니까.”
나는 다시, 나를 붙잡고 부탁하는 오스카를 바라봤다.
“네가 모르던 바깥의 시간들, 전부. 네 아빠가 너를 위해 뭘 했는지, 네가 갇혀 있는 동안 밖에서는 어떤 시간이 흘렀는지, 그걸 전부.”
“…….”
“다 알아야 해. 기억해야 해. 그래야만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회귀 마법의 시전자만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음.
회귀의 법칙.
시전자가 아닌 나는 아무 기억도 없어야 했다.
반면 오스카는 기억하겠지만, 금제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예상했겠지.
“모든 걸 기억하는, 너의 모습을 상상해 봐.”
그래서였구나.
내가 ‘원작’을, 아니, 사라진 시간들을 전부 기억하는 이유.
프리메라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오스카의 부탁 때문에.
“…기다리고 있으면, 만나러 갈게.”
만나러 오겠다는, 마지막 약속.
당신은 그것까지 지켜 줬는데.
“스승님! 잠깐!”
나는 뿌예진 시야를 거칠게 닦아내고, 마법진 안에 선 오스카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는 마주보고 서게 됐지만, 그의 시선은 내게 닿아있지 않았다.
아니, 내게 닿아있었다.
마법진 밖에 서 있는, 아무것도 몰라 주는, 야속한….
과거의 나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꼭 눈에 담으려는 것처럼.
“이, 있잖아요….”
나는 잡히지도 않는 오스카에게 안기려 팔을 허우적거렸다.
왜 나는.
“기억, 내가 기억 하나도 못 해서 미안해요. 내가 바보처럼 다 잊어버려서, 아무것도 몰라서, 스승님, 끅, 내가, 내가 왜….”
당신을 잊어버렸을까.
“…미안해요. 정말정말, 흐윽. 미, 미안해요.”
이제라도 기억해서 다행이야.
있잖아요, 나는….
다시 얼굴을 보게 되면, 꼭.
정말,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 * *
리리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깨울 성물이, 아직 에녹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지금….”
에녹의 표정에서 망설임을 느낀 오스카가 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혹시나 해서 떠본 건데. 진짜?
“내 말에 고민하는 거예요?”
성물은 하나뿐이고, 필요한 사람은 둘.
“애 목숨이랑 그 사제 목숨이랑 저울질해보고 있는 건가?”
물론 딸이 소중하겠지만, 사제는 에녹의 ‘대의’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런 거 아니야. 이게 왜 고민이 필요한 일이겠어.”
“그렇지? 망설이는 거 아니죠?”
“응. 그냥….”
일순 날카로워진 눈.
“전부 지켜낼 수 있을지, 잠깐 내 능력을 의심해 본 것뿐이야.”
에녹이 덧붙였다.
“그런데 걱정 안 되네. 자드키엘 사제가 잘못될 일은 없어. 성열에 든다 해도 리리스가 도울 수 있다고 하니까.”
“아니, 그런데 그때 애가….”
“그럴 일 없어.”
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이어질 오스카의 염려를 알기에, 에녹은 일부러 더 듣지 않고 그의 말을 잘랐다.
“사제가 성열에 들기 전에 나는 모든 걸 끝낼 거야. 하지만 그보다 늦어지더라도 리리스가 사제를 돕지 못할 일은 없어.”
이내 리리스를 바라보며 굳건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난 절대, 내 딸을 빼앗기지 않을 거니까.”
그런 에녹을 빤히 응시하던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빨리 애부터 깨우자.”
급히 말해 놓고, 에녹은 또 멍해졌다.
그런데 진짜 이걸 어떻게 써야 하지?
“그냥 갈아서 먹여 보면 어때요? 생식하면 꽤 효과가 있을 생김새긴 한데.”
“이걸?”
오스카의 말에 에녹이 질색하며 펄떡펄떡 뛰는 성물을 쳐다봤다.
그건 좀….
“아오, 답답해. 한 번 써 봤을 거 아니에요? 방법을 알아도 당신이 알겠지.”
“그렇지. 써 봤겠지, 내가.”
에녹이 이마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전 생? 그래, 이전 생에서는 분명 자신이 이것으로 성열에 든 자드키엘을 깨웠다고 했다.
뭘 어떻게 했던 걸까.
심장처럼 생겼으니까….
고민하던 에녹이 성물을 리리스의 가슴께에 가만 가져다 대었다.
아마 이쪽 부근에….
“오?!”
“오!!”
에녹과 오스카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성물은 리리스의 가슴 위로 흡수되듯이 스며들었다.
“이거 맞! 지?”
눈이 휘둥그레진 에녹이 몸까지 삐끗하며 묻자, 오스카가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하지만 무슨 일인지, 이후로 다른 반응이 없었다.
초조해진 오스카가 재촉했다.
“저기요. 날 샐 때까지 기다리게? 빨리 흔들어 깨워 봐요!”
“뭐? 억지로 깨우라고?”
“성열이 나았으면, 흔들면 일어나겠죠!”
“그런가.”
에녹이 마른 입술을 훑으며 리리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공주야, 해님 중천에 떴어. 그만 자고 일어나 봐. 아빠 진짜 심장 다 쪼그라든다….”
탈탈탈.
“공주야….”
그때.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아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공주야!”
이내 힘겹게 뜨인 눈.
젖어있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아.”
에녹은 아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무너져내렸다.
“…아빠?”
“하아, 하. 신이시여. 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기분일까?
오스카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에녹 또한 고스란히 느낀다는 걸 알았다.
‘다행이네.’
겨우 한숨 돌린 오스카는, 꽉 마주 안은 부녀를 보고 픽 웃었다.
“아, 아빠아….”
“응, 공주야. 아빠야. 아빠 여기 있어. 잘 잤어? 응?”
울지 않으려는지 붉어진 눈을 치뜬 에녹이, 안았던 팔을 풀고 아이의 무사한 얼굴을 연신 눈에 담았다.
뺨을 붙잡고 들여다보고.
다시 또 끌어안고.
고개를 젖히며 안도하고.
몇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스카는, 새삼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했다.
아이를 지키지 못해 끝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없었던 아이.
‘잘된 거야. 역시.’
제 바보 같은 선택으로 비극이 될 뻔했던 부녀를 되돌려 놓았으니, 이제 모든 것은 완벽했다.
이는 고작 자신의 존재 하나를 버려 얻어낸 결과.
나쁘지 않았다.
“아.”
그때.
몸을 일으킨 리리스가 뒤늦게 오스카를 발견했다.
아이의 놀란 눈을 보고,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야, 너 뭘 이렇게 오래 자? 너 세상모르고 자는 동안 네 아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뭐지.’
눈이 마주친 순간.
울음을 참으려는지, 두 손으로 자기 입을 꾹 틀어막은 아이.
큰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까지 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오스카는 또 덜컥, 겁이 났다.
“뭐, 뭐야. 너 왜 그래. 왜 울어. 어디 아파?”
“공주야! 괜찮아? 아파?”
걱정하는 에녹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리리스의 시선은 오스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끅.”
차마 입도 열기 힘든 듯, 슬프게 일그러진 표정.
“하아, 흐.”
서럽게 고르는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다.
이내 다리에 덮여있던 이불을 휙 걷어내더니, 끅끅대는 울음을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급할 것도 없는데.
꼭 쫓기는 사람처럼.
아이는 허둥거리며 내려오다 삐끗, 발까지 헛디뎠다.
“야!”
놀란 오스카가 제 무릎을 굽히며 넘어질 뻔한 리리스를 붙잡았다.
“뭐, 너…, 아.”
“흐아아앙!”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품에 와락 안겨드는 아이.
제 옷깃을 꽉 붙잡은 작은 손이 간절하리만치 떨리고 있어서….
오스카는 멍하니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