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감정을 이겨내기 힘든지 오스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하아….”
나는 그를 더욱 꽉 안은 채.
오른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오스카가 소멸하지 않게 할 방법을 수십 번 물어도 대답이 없었던 팔찌.
꿈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일어난 후에도 한결같았다.
왜일까.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항상 작대기라도 띄워줬던 팔찌가….
‘간절히 바라요. 신님.’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스승님, 저는 엄청엄청 오래 살 거예요. 아빠랑 스승님이랑, 힘들게 저 살려 줬으니깐…. 절대 바보처럼 빨리 죽지 않을 거예요.”
나는 믿는다.
아빠도, 오스카도, 체시어도.
또 나를 사랑해 주고 지켜 주는 많은 사람들도.
그러니까 꼭, 오래오래 살아남아 행복할 거야.
“근데 스승님이 없는 세상은 너무 싫어요. 그니까 평생, 저랑 같이 있어 주세요. 오늘도, 내일도…. 계속.”
오스카는 그저 내 바람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니.
나는 지금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
프리메라의 능력으로.
“오래 살 건데, 스승님은 저보다 더 살아야 해요.”
여전히 팔찌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 생각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저 오래오래 살다 나중에 늙어 죽고 나서, 그 후에 딱 하루만.”
이미 많은 것은 바뀌었고 또 바뀌어 갈 테니, 나는 십 년 후에 죽을 운명이 아니다.
그러니까.
당장은….
당신을 구할 방법을, 지금의 나는 모르겠으니까.
“무조건 저보다 하루만 더, 꼭.”
회귀의 대가. 소멸이라는 그 족쇄보다 나의 운명이 더 강해서.
“살아 주세요.”
그래서, 당신을 지킬 수 있기를.
* * *
제티와 쥰을 데리고 나온 에녹은 곧바로 부탁했다.
“리리스가 깨어난 것, 지금 당장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 애 방에도 전부 들어갈 수 없게 해 주고.”
“아아. 예, 공작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만….”
제티가 말했다.
“큰 주인님이 숨넘어가시기 일보 직전이세요. 큰 주인님에게만이라도 아가씨 일어났다는 걸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걱정하는 표정에 에녹이 웃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그건 걱정하지 마. 아버지한테는 내가 바로 말씀드릴 테니까.”
“앗, 넵!”
“그리고 마탑주가 여기 있는 것 말인데.”
“네네네네…!”
계속 그게 궁금했는지, 쥰이 끼어들었다.
“부, 분명히 마탑주님… 현관으로 들어오신 기억이 없거든요?”
“응, 맞아. 문 열고 들어온 거 아니니까.”
“아니, 그럼 어떻게?”
“여기서 마탑주 본 것도 절대.”
에녹은 이동 마법의 존재를 설명하는 대신, 입술 위에 검지를 붙였다.
“발설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유용한 마법을 독식하는 건 물론 아쉽지만, 오스카가 그러고 싶다면야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다.
숨긴다는 사실까지 숨겨 주는 게 맞겠지.
“예! 주인님이 말씀하시는데 그래야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제티와 쥰을 보며 에녹이 덧붙였다.
“그 빵집 사장? 그 친구에게도 꼭 비밀로 해 줬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에녹의 부탁에 관성적으로 계속 고개를 끄덕이던 둘은―
“……?”
“느에에엑?!”
―뒤늦게야 그의 말을 곱씹어 보고,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제도 모 베이커리의 파티셰.
제티와 쥰의 보스이자 정보 길드 <붉은 매>의 마스터인 ‘리코’의 눈속임용 직업이다.
둘은 그 순간 패닉에 빠졌다.
이 집 주인님이 모든 걸 안다?
‘아, 아가씨가 말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둘은 흔들리는 눈으로 대화했다.
리리스는 분명, 아빠에게는 하녀 언니들의 정체를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줬었다.
물론 에녹은 딸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좋은 아빠지만,
‘믿을 만한 언니들인데 본업은 불법 정보 길드 첩자야.’
라고 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오, 그래? 우리 딸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지.’
라고 훈훈하게 끝을 맺을 일은 없단 걸….
리리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떤 정신 나간 집주인이 첩자의 존재를 알면서도 계속 자기 집에 살려 두겠는가?
“부탁해도 되겠지? 마탑주가 곤란해질 일은 없었으면 해서 그래.”
그러나 에녹은 다 아는 듯한데도 전혀 화내는 기색이 없다.
“음, 둘이 여기 일 그 친구한테 전부 보고하고 있는 건 알아. 하지만 아무래도 정보 장사하는 친구니까….”
“주, 주인님. 저기, 잠시만.”
“내 비밀이야 알아서 잘 챙기면 되겠지만, 남의 비밀 새어나가는 건 좀 마음에 걸리네.”
전부 안다.
진짜로 안다.
에녹의 표정을 보니, 안 지 꽤 오래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첩자를 버젓이 집 안에 돌아다니게 뒀다? 그것도 계속 딸의 전담 하녀로 두면서?
‘이래도 돼?’
동생 쥰은 여전히 패닉이었으나, 조금 더 상황 파악이 빠른 언니 제티는 달랐다.
‘큰일 해 보겠다는 분이, 그냥 딸이 좋아하는 하녀들이니까 뭔 짓을 해도 믿고 봐주겠다는 거야?’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에녹을 보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주, 주인님. 다 아시는 것 같아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알게 되신 것, 주제넘지만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응?”
“크, 큰일을 하실 생각이라면 냉정하셔야 합니다. 주인님은 지금 저희의 목을 치셔야 맞습니다.”
“어, 언니. 뭔 소리야? 미쳤어?”
뜨악한 쥰이 조용히 제티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 물론 자애로운 결정은 감사할 일이지만…. 주인님이 일하시는 데 이런 감정적인 판단은 도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아, 어….”
“언젠가 꼭, 주인님의 자애로움이 발목을 잡는 일이, 일이 생길….”
에녹은 무서워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제티를 멍하니 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대업이 성공하길 바라는 진심 그 자체의 충언.
‘길드원들 하나하나 다 사연 있는 사람들이랬나.’
제티와 쥰도 마찬가지겠지.
생각하던 에녹은, 웃으며 말했다.
“충고 고맙네. 그런데 내가 마음이 약해서 둘을 봐준 건 아냐.”
“…….”
“필요한 이들을 확실히 가려낼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 멍청하게 아군, 적군도 구분 못 해서 불필요한 피를 볼 생각은 없어.”
에녹은 둘을 보며 덧붙였다.
“나는 두 사람 생각보다 아는 게 많고, 충분히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다 알고도 둘에게 울 공주 계속 맡긴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하고.”
마음이 급해진 에녹이 격려하듯 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돌아섰다.
“난 지금 일이 많아서 더 오래는 시간 못 쓰겠다. 그 빵집에서 일하는 친구, 조만간 내가 직접 얼굴 보러 가겠다고 전해 줘. 수고.”
휭하니 사라지는 에녹.
남겨진 제티와 쥰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아신 거지…?”
“모, 몰라…. 우리 완전 주인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어….”
* * *
같은 시각, 황실.
황제, 니콜라스는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목줄이었는데, 값어치를 해 줘야지.’
쓸모없어진 에녹의 딸을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이야.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진 딸을 위해 에녹은 곧 자신을 찾아와 빌 것이다.
전쟁을 종용하는 거짓 계시까지 만들어 놓은 지금.
자꾸 거부하면 에녹의 입지마저 흔들릴 상황이니, 그는 모른 척 그냥 칼을 쥐고 말 터였다.
‘모든 게 완벽하다.’
―라고,
니콜라스는 생각했다.
“폐, 폐하!”
함께 거짓 계시를 만들었던, 대신관이 창백한 낯빛으로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또, 또… 세라프 신전의 그 어린 사제 놈에게 시, 신의 계시가….”
* * *
‘지금쯤 황제 귀에도 자드키엘이 받은 계시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나는 방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는 오스카의 왼쪽 팔에 얌전히 들린 채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딜 감히 새빨간 거짓말로 울 아빠 전쟁터 보내려고!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나는 몰래 쿡쿡 웃었다.
사실 대신관의 계시도, 자드키엘의 입을 빌린 내 계시도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내 거짓말은 사람들이 안 믿을 수가 없지롱~!’
그때.
오스카가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 굴리는 소리 한 번 더럽게 시끄럽네. 또 무슨 생각 하냐? 아무것도 하지 말랬더니.”
“…? 우, 우와. 스승님 대단하다. 머리 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들리겠냐? 바본가?”
“흠흠.”
나는 민망해져서 뺨을 긁적이며 말을 돌렸다.
“근데 몬 마법진이에요? 스승님 마탑 다녀온다구 하지 않았어요?”
계획 없이 온 길이라 마탑을 오래 비워 둘 수 없다는 오스카.
한참 나랑 얼싸안고 울던 그는, 진정되자마자 마탑에 돌아가 상황을 수습해 두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어어, 이거.”
오스카는 왜인지 내 눈치를 봤다.
“…이동 마법진이야. 내 집무실에 바로 갈 수 있어.”
“네에에에? 순간이동하는 거예요? 그런 마법도 있어요?”
진심으로 놀랍다.
워프 게이트 없이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할 수 있다고?
“오해하지 마라. 나 혼자 욕심쟁이처럼 독식하는 거 아니다?”
“엥. 그런 생각 안 했는데요?”
“너도 알려 주면 되잖아! 다음 수업 때 알려 줄게!”
왜 갑자기 발끈하는 거람.
나는 툴툴거리는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근데 팔 안 아프나.’
그는 품에서 날 안 떼어놨다.
10분 동안 식은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마법진을 그리는 내내.
“다 됐다. 갔다 온다.”
“네! 준비됐어요!”
나는 일어나는 오스카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
“…왜여?”
찰싹 달라붙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오스카.
“같이 가게?”
“아! 글구 보니 나는 가면 안 되나? 스승님 어차피 10분 만에 후딱 가따 온다구 해서….”
“아니, 가도 상관은 없는데. 어차피 내 집무실에 쥐새끼 하나 없거든.”
“그럼 저도 갈래여!”
곧바로 말하자, 오스카가 어째 묘한 표정으로 쓱 눈썹을 세웠다.
“겁도 없는 거 봐라?”
“네?”
“이런 마법 있는 거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몰라. 너 내가 이 길로 확, 납치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헉!”
나는 두 손으로 놀란 척 입을 틀어막았다.
오스카가 웃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10분 안에 돌아올 테니까.”
“큰일이구만…. 납치당하면 울 아빠 울겠어요….”
나는 대충 장단을 맞춰 주며 오스카의 목에 더 매달렸다.
“얼른 가져.”
“하?”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터뜨린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슬쩍 보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납치니 뭐니 겁주는 말에도 경계 하나 없이 착 달라붙은 내가, 내심 맘에 드는 모양.
“알았다. 간다. 좀 어지러울지도 몰라.”
“넹넹. 근데 스승님, 저 제 발로 서 있을까여?”
“뭐? 왜?”
나는 오스카가 걱정됐다.
맨날 몸 쓰는 울 아빠야 근육 빵빵 믿음직스러운 덩치지만, 펜만 잡는 오스카는 아무래도 늘씬한 모델 체형인지라….
“스승님 지금 저 엄청 오래 안구 있잖아요. 팔에 근육도 없는데 후들후들하다가 툭 떨어질까 봐 걱정이에요.”
“…….”
왜인지 오스카의 표정이 싸해졌다.
“스승님?”
그는 화를 삭이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부녀가 쌍으로, 아주 나를….”
“네?”
“무시하지 마! 너처럼 쥐콩만 한 아기 정도는 들 수 있거든?!”
“까, 깜짝아!”
오스카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