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악시온은 이를 갈고 있었다.
‘괘씸한 놈, 진짜.’
두 시간도 안 되어 돌아온 에녹은 리리스가 깨어났다고 알려 주고 또 어딘가로 가 버렸다.
아이가 성열을 떨쳤다는 사실을 당장은 함구하라는 당부와 함께.
심지어.
‘아주 딸만 중요하지. 아니,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잘해야 할 거 아냐?’
안쓰러운 노르딕은 손녀가 일어났다는데 얼굴도 못 봤다.
에녹이 깨어났다는 아이의 방 문을 꼭꼭 잠가 놓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애 일어난 거 맞냐고! 보여 줘야 믿지!’
화가 나서 계급장 떼고 싸워 볼까 했는데.
“후우, 체시어 리브르.”
“네.”
그래, 저 녀석 때문에 참았다.
악시온은 맞은편에 앉은 체시어를 노려보았다.
‘대체 저 녀석은, 에녹이 뭐라고 이렇게 맹목적으로 따르지?’
성열에 빠진 리리스를 내버려 두고 에녹이 냉정하게 사라진 후.
믿고 기다리자면서 상황을 수습한 건 체시어였다.
“그냥 아저씨를 믿고 기다리시면 안 될까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요. 아저씨는 누구보다 리리스를 아끼는 분이니까요.”
아무리 에녹이라지만 뾰족한 수가 안 보이는 상황 아니었나.
그럼에도 당연히 에녹이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체시어는 단언했다.
그뿐이면 말도 안 한다.
“애 얼굴도 못 보게 하는데 너는 정말 괜찮나?”
리리스가 걱정되는지 내내 초조해하던 체시어.
표정도 없는 녀석이 창백하게 질려 떨던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하지만, 그러던 체시어는.
“아저씨가 그러라면 그래야죠. 아마 리리스는 정말 일어났을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리리스가 깨어났다는데도 얼굴은 못 보여 주겠다는 에녹의 말에, 알겠다며 쉽게도 포기했다.
잠가 놓은 방 열쇠를 내놓으라며 길길이 날뛰던 악시온을 말려 집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도 체시어였다.
“예, 괜찮습니다.”
“대체 뭐가 괜찮은데. 아직 애는 못 깨어났는데 거짓말하고 얼굴 안 보여 주는 거면 어쩌려고?”
“아니에요. 분명히 깨어났어요.”
악시온은 체시어의 또렷한 눈을 빤히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에녹을 향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뭔가 아는 것 같달까.’
그의 예리한 생각은 맞았다.
체시어는 리리스의 편지를 제일 먼저 보았기에, 성열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녹이 성물을 찾으러 떠났다는 사실도 짐작했고.
“너, 뭐 들은 거 있지?”
악시온은 물으면서 걱정스러웠다.
제일 가깝다 자부하는 자신에게도 말을 아끼는 듯한 에녹이건만.
왜인지 체시어에게는 할 말 못 할 말 다 한 것 같아서.
대체 둘의 사이는 어떻고, 에녹은 체시어에게 어디까지 말한 걸까?
‘아직 어린애인데. 설마 반란이니 뭐니, 지금 애 나이에 이해도 못 할 얘기까지 한 건 아니겠지?’
아주 작은 추측에서 시작된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졌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너 아직 어려. 에녹한테 빚졌다는 생각이 있겠지만, 그거 갚겠다고 네가 애쓸 필요 없다.”
“…….”
“널 도운 것도 가르치는 것도 다 에녹이 한 선택이니까, 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돼. 괜히, 음, 어른들 일…, 그래, 어른들 일에 신경 쓰면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멈칫한 체시어가 가만히 악시온을 바라보았다.
애써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알아들을 수 있다.
부채감 때문에 반란에 뛰어들지 말라는 걱정 어린 조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체시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아저씨께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싫은데 억지로 뭔가 할 마음은 없어요. 그러니까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 말은 잘하네. 나보다 에녹을 훨씬 따르는 놈이 할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제일 가까운 보호잔데….”
척 팔짱을 낀 악시온이 창밖으로 시선을 틀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서 조금 서운해하는 게 보여서, 체시어는 곧바로 말했다.
“저, 딱히 공작님보다 아저씨를 더 따르는 거 아닙니다.”
이 딱딱한 녀석은 대체 언제까지 호칭을 공작님이라고 할까?
차라리 에녹을 부르는 아저씨가 더 친근하고 낫겠는데?
이 기회에 지적하려는데―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아저씨를 무조건 믿는 건… 그냥,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예요.”
덧붙인 체시어의 말에, 악시온이 발끈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뭔데?”
“…….”
정작 궁금한 질문에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체시어.
“후우.”
그러나 답답해하는 악시온의 한숨에도, 체시어는 해 줄 말이 없었다.
리리스의 정체.
아군이든 적군이든, 아는 이가 많아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다만 진심 어린 걱정을 하고 있는 악시온, 제 보호자에게 한 가지는 미리 알려 둬야 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아저씨가 해야 할 일과 같아요. 그래서 따르는 거예요.”
“하고 싶은 일? 그건 또 뭔데?”
물은 순간, 악시온은 흠칫했다.
일순 체시어의 눈빛이 무섭도록 싸하게 빛났기 때문이었다.
“제 손으로.”
그는 긴장한 악시온을 똑바로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황제를 없애는 거요.”
…뭐라고?
악시온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 * *
‘이 빌어먹을 년이!’
황제, 니콜라스는 신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작정하고 나를 방해하려 하는구나!’
세라프 신전의 사제, 자드키엘에게 또 내려왔다는 신의 계시.
<감히 거짓된 목소리로 너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악이 있으니.
나의 진실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를 가려내려 하노라.
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의 가장 성스러운 땅으로 가라.
그곳에 내가 선택한, 오직 진실한 종만이 주인 될 자격이 있는 성물을 예비하였으니.
성물을 수호하는 성수들은 그의 걸음마다 복종하며 무릎 꿇으리라.>
신은, 대놓고 니콜라스가 만든 거짓 계시를 밝히려 하고 있었다.
감히 거짓된 목소리로 너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악이 있으니.
하필 이 시점에!
“폐하. 어,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대신관, 티모시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에녹에게 칼을 쥐게 할 수 있는데….
물론 딸을 깨워 주는 대가로 니콜라스는 뭐든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시가 거짓인 게 밝혀지면 일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다.’
정복 전쟁을 일으키라는 계시가 신의 뜻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신의 목소리가 절대적인 제국.
분노한 신의 뜻을 거스르고 계속 전쟁을 종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에녹뿐 아니라 다른 능력자들까지 반발할 일이니….
‘에녹의 딸을 이용할 방법이 먼저 떠올랐다면, 거짓 계시도 만들 필요 없었을 텐데.’
오히려 제 꾀에 제가 당한 셈이 아닌가.
혼미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니콜라스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심했다.
* * *
리리스의 방으로 향하는 에녹의 걸음이 빨라졌다.
지금 그는, 세라프 신전을 찾아가 자드키엘을 만나고 온 길이었다.
부탁할 게 있었으니까.
‘아이가 깨어난 사실로 황제에게 의심받지 않으려면, 그 방법뿐이었어.’
리리스의 성열.
진짜가 아니고 황제의 능력이었으므로, 리리스는 혼자 성열을 떨치고 일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 성물을 찾아 성열을 치료했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고.
너무나 의심스러운 데다….
예로부터 성물은 황실에 귀속되는 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에녹은 꾀를 냈고.
‘지금 황제의 능력을 뚫고 아이를 깨워낼 수 있는 건, 신뿐이니까.’
자드키엘의 도움을 구하러 간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에녹은 목적을 달성한 것 외에도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녀님 때문에 오신 거였군요. 저는 각하께서, 이번에 제가 받은 계시 때문에 찾아오신 줄 알았습니다. 부디 저를, 원정에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가야만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계시라니? 갑자기 원정은 또 무슨 말이고?”
“예? 모르셨습니까?”
자초지종을 알게 된 에녹은 할 말을 잃었다.
‘리리스…. 정말, 아.’
이번에도 딸일 것이다.
아이는, 또.
뒤에서 아빠를 위해 홀로 애쓰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도에는, 전쟁을 종용하는 대신관의 거짓 계시가 내려온 상황.
그 계시는 사실이라는 증거도 없으나 그렇다고 거짓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책사인 조제프 뤼트먼까지 곤란해하던 문제.
“아마 이번 출정 명령을 계속 거부하신다면, 감히 신의 목소리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각하의 평판이 추락할 겁니다.”
“저도 방법을 더 고심해 보겠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면….”
“각하, 멀리 봐야 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주십시오. 안타까워도 한 번 이상은, 칼을 드는 것을 각오하셔야만 합니다.”
무고한 피를 볼지.
아니면,
끝내 신념을 지킬지.
에녹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신념을 택한 에녹이 전쟁을 거부한다면, 반란은 늦어질 것이다.
기껏 차곡차곡 쌓고 있는 입지가 좁아지고 신을 사랑하는 제국민들의 눈총을 받게 될 테니까.
“아, 리리스….”
하지만 다행히도, 걱정하던 모든 문제는 깨끗이 해결될 것이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는데, 어찌 알았는지 또 아빠를 위해 길을 터 준 딸 덕분에.
“미치겠네, 진짜. 한심하게.”
에녹은 입술을 물며 우는 듯이 미소 지었다.
공주는 걱정하지 말라고.
아빠가 다 알아서 할 거라고 큰소리만 떵떵 쳐 놓고서는.
결국 또 아이를 고생시켰다는 게….
에녹은 못내 미안했고, 부끄러웠고, 고마웠다.
복잡한 마음.
당장은 그저 울컥한 감정에 얼른 딸의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하, 젠장.”
철컥, 철컥.
리리스의 방에 도착해 열쇠를 끼워 넣는 헛손질이 급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리리스?”
아이가 없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잠시 딸을 돌봐 달라 부탁했던 오스카도.
“리리스.”
순간 쿵,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애가, 어디….’
에녹은 굳이 따지자면 이성적인 편이었다.
당황하는 일도 별로 없고, 항상 진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였다.
그런 그를 감정적으로 만들거나,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게 하거나, 이성을 잃게 하는….
그러니까.
“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꼭 바보처럼 만들어 버리는 존재는.
아마도 딸이 유일할 것이다.
‘뭐지? 애가 어디로 갔지?’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해 본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일이다.
방을 나서기 전, 오스카에게 리리스를 부탁했고 이동 마법의 존재도 알게 된 후니까.
하지만 에녹의 눈앞은 새하얬다.
이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났고, 그저 뱀 같은 황제의 웃음만 떠올랐다.
“리, 리리스. 리리스….”
그가 모르는 사라진 시간 속에서,
딸을 훔쳐 갔던 악마.
결국, 되돌아온 지금에도 벌써 몇 번이나.
딸을 위협한 징그러운 존재.
“하아, 하.”
에녹의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겨우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고 방을 나서려고 뒤돈 순간.
“아빠아아!”
“뭐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리리스와 오스카가 나타났다.
둘의 발아래 푸르게 빛나다 이내 사라지는 마법진.
“헉.”
그걸 보고 나서야 상황을 인지한 에녹이 신음을 터뜨리며 털썩 무너져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