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스가 눈앞에 있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린 에녹은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아빠? 왜 그래!”
대신 놀란 리리스가 달려와 에녹에게 안겼다.
“너 어디,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거, 걱정했구나. 아빠, 미안해. 잘못했어. 나 스승님이랑 잠깐 마탑 갔다 왔는데…. 근데 간 지 십 분밖에 안 지났는데 아빠가 일케 빨리 올 줄 몰랐어.”
“혹시나 해서 쪽지 하나 써 두고 갔는데, 못 봤어요?”
다가온 오스카가 리리스의 침대 위를 턱짓했다.
“아니, 마탑주!”
“응큭. 아빠, 잠깐. 나 숨 막혀….”
리리스를 꽉 안은 에녹이 아직도 진정 안 된 숨을 연신 골랐다.
“급하면 혼자 갔다 오면 됐잖아. 왜 애까지 데리고 가….”
창백해진 얼굴하며 바싹 마른 입술. 그새 흐른 땀.
고작 몇 분 사이에 에녹이 무슨 걱정을 했을지 뻔해서, 오스카는 살짝 미안해졌다.
“아니야, 아빠! 스승님은 혼자 갈라 그랬는데, 내가 혼자 있기 싫어서 따라갔어. 걱정시켜서 미안….”
“후우.”
에녹은 떨리는 팔로 리리스를 안은 채, 마저 진정했다.
의도치 않게 에녹을 괴롭혀 버린 리리스와 오스카는 눈치를 보느라 조용했다.
“마탑주.”
“…예.”
“그, 마법 말인데….”
이내 진정한 걸까.
에녹은 이동 마법진이 생겨났던 자리를 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진짜 별로다…. 그냥 당신만 알고 있어….”
* * *
그 시각.
에녹이 다녀간 세라프 신전.
자드키엘은 책 여러 권을 펼쳐 놓고, 고심을 거듭하며 펜을 끼적이고 있었다.
“아이가 성열에 들었다가 지금은 깨어났어. 그런데 혼자 성열을 이겨냈다는 게 밖에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야.”
“한데 신의 권능이라면 가능하겠지. 그래서 말인데 사제, 곤란하겠지만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신실한 사제는 에녹의 부탁으로 ‘거짓’ 계시를 만드는 중이었다.
신이 리리스를 깨우려는 것처럼.
<나의 가여운 어린 종이여.
너는 아직 나의 성전에 들 때가 되지 아니하였으니.
예비한 생의 시간을 오롯이 살고 나에게 오도록 기적을 내리노라.>
‘이거면 되겠지.’
먼 옛날, 신의 기적으로 죽음 앞에서 살아 돌아온 신도들이 자주 받은 종류의 계시였다.
자드키엘은 펜을 내려두고 두 손을 모았다.
‘신이시여, 거짓을 고하는 부족한 종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저는 다만 신의 사자(使者)인 공녀님이 무사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내 그는 리리스를 떠올렸다.
세라프 신전의 병자들을 살렸던 첫 계시도 소중했지만, 리리스가 받은 두 번째 계시에는 더 많은 이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전쟁을 종용하는 대신관의 ‘거짓’ 계시를 밝힐 ‘진짜’ 계시.
‘공녀님이 무사히 살아 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셔야만, 무고하게 스러질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어.’
그러니 리리스를 위해 하는 거짓말쯤은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드키엘은 이미 지엄한 신전의 법도를 한 번 어기기도 했으니까.
“사제님, 이번 계시는 바로 대신관 할아버지한테 가서 알리지 마시구, 먼저 주변에다 널리널리 알려 주실 수 있어여? 여기 있는 신관님들이랑 사제님들이랑 신도들이랑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다!”
“공녀님, 계시를 받은 신도는 대신관에게 전달하기 전까지 함부로 신의 목소리를 퍼뜨려서는 안 됩니다. 신전의 오랜 법도인데….”
“헉! 정말요? 아, 그건 몰랐다…. 어떡하지….”
하지만, 난처해하는 리리스를 보고 자드키엘은 왜인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하겠습니다. 그것 또한 신의 뜻일 테니까요.”
“네, 네에에에?”
“법도를 어겨 제가 문책을 받게 된다고 해도 그 또한 신이 예비하신 희생일 겁니다.”
“아니, 몬…. 어휴. 그, 그치만 네! 사제님이 황제 폐하한테 혼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왜냐면 울 아빠가 그 정도는 막아줄 수 있으니까!”
* * *
“일단 숨겨야 해. 지금 이 계시를 바깥에 알려서는 안 되네.”
고심하던 황제, 니콜라스는 결정했다.
“곧 에녹이 딸 문제로 나를 찾아오겠지. 그럼 계획했던 대로 빠르게 테네바 왕국에 출정시킬 거야.”
일단은 계시를 철저히 숨긴다.
“군대를 보내고 나면, 그 후에는 변수가 생긴다 해도 에녹이 어찌하겠나? 그때까지만, 그래. 그때까지만 숨길 수 있다면….”
중얼거리던 니콜라스가, 티모시를 보며 재빨리 물었다.
“당연히, 그 어린 사제 놈의 입단속은 해 두었겠지?”
“그, 그것이. 폐하….”
티모시가 떨며 대답했다.
“계시를 받은 어제 이미 세라프 거리에 전부 말을 흘린 모양입니다. 알아보니 그쪽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하루 만에 소문이 퍼져 귀족들 몇몇도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뭐?”
니콜라스의 입이 허망하게 벌어졌다.
“감히 신의 계시를!”
말도 안 된다.
“대신전에도, 황실에도 알리기 전에 멋대로 밖에 퍼뜨려? 그리 입을 방종하게 놀릴 배짱이 있는 놈이었다고?”
어이가 없어져 노성을 터뜨리던 니콜라스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열네 살 어린애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랬을 리 없다.’
그 사제가 받은 계시는 ‘진짜’ 신의 목소리일 터.
계시를 미리 퍼뜨린 행위도, 전부.
모든 것을 내다본 신의 안배였을 것이다.
‘이 망할 년….’
니콜라스가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한 막막함.
지금 자신이 대적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절대자.
주신, 프리메라다.
인간이 신을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아니다, 아니야. 진정하자.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니콜라스는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았다.
이 나라의 신은 자신이다.
“계시에 나온 성물의 위치가 어디지?”
니콜라스가 급히 물었다.
* * *
아빠는 진정되자마자 내 팔을 꽉 붙들고 말했다.
“공주야, 있잖아. 혹시 스승님한테 들었을지는 모르겠는데 공주가 지금 혼자 일어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어.”
“응! 알아. 그럼 나 어뜨케야 하지? 계속 자는 척하구 있어?”
“방법 없어요? 애를 계속 이렇게 가둬 놓을 순 없잖아.”
오스카가 걱정하며 끼어들었다.
“그래서 아빠가 자드키엘 사제님한테 부탁 좀 하고 왔어. 우리 공주 신님이 깨워주실 거라고, 사제님이 거짓말해 주기로 했거든?”
“머, 머?”
나처럼 거짓 계시를 만들었단 뜻이다.
듣고 있던 오스카가 웃었다.
“괜찮네, 그거. 머리 좀 썼네요.”
“머리는 공주가 썼지. 공주가 썼던 방법 따라 한 거거든.”
아빠가 씩 웃었다.
나는 흠칫했다.
‘음, 뭐. 내가 프리메라인 걸 알았으니까.’
아마 눈치 빠른 아빠는 전에 병자들을 살린 신의 계시가 내 수작이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내 밑천 다 털렸다….’
아니, 근데.
“사제님이 거짓말해 주겠다구 했어? 그 사제님이? 정말?”
나야 진짜 신의 계시를 받은 척했으니 어찌어찌 자드키엘의 입을 빌릴 수 있었지만.
아빠는 대놓고 거짓말을 해 달라 하는데 그걸 들어줬을까?
#선 #희생 #천사의 현신
감히 신을 기만하는 행위라도 하면 열흘 밤낮 앓아누울 듯한 키워드 총집합인 자드키엘 사제님이?
“아빠도 그게 걱정됐거든. 그런데 사제님이 우리 공주 위험하다니까 고민도 안 하고 들어주더라.”
“헉! 저, 정말이야?”
세상에나. 감동….
왜인지 등장인물의 캐릭터 붕괴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사제님이 바로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공주 답답해도 오늘만 방에서 기다리자.”
“응!”
“그리고 아빠는 급해! 우리 공주 얼굴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잠깐 왔지만, 또 나가 봐야 해.”
“응?”
아빠는 급히 일어나 옷장으로 가며 말했다.
“공주가 또 사제님한테 부탁해서 계시 만들었지? 아빠 전쟁터 안 가게 하려고.”
“…….”
그 말에, 오스카가 대번에 나를 노려보았다.
전처럼 내 생명력을 써서 일을 벌인 건가, 하는 못마땅한 눈빛.
나는 “이번에는 그런 거 아니에요.” 하고 조용히 말하며 슬그머니 그의 눈을 피했다.
“공주야…. 아빠가 진짜, 이번에 막막했거든. 근데 사제님한테 그 말 듣고 아빠 막 눈물이 나는 거야. 우리 공주, 아무 걱정 없이 맘껏 놀게만 해 준다고 약속했는데…. 아빠가 바보 같아서 공주 도움만 받고….”
아빠는 울컥한 목소리로 말하며 옷장에서 갑옷을 와르르 꺼냈다.
그리고 환복하려는지 윗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뭐야?!”
질겁한 오스카가 내 어깨를 잡고 휙 뒤로 돌렸다.
“아니, 당신 뭔데? 아들도 아니고 딸 앞에서 남세스럽게 옷을 왜 훌렁훌렁 벗어요?!”
이건 그냥 일상인데. 오스카는 이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기 네 방인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까지 방을 같이 써? 대체 왜 저 옷장에서 네 아버지 갑옷이 나오냐?”
“뭐래. 방을 같이 쓰든 말든 마탑주가 뭔 상관이야? 울 공주 나 없으면 잠 못 자거든?”
“당신이 딸 없으면 잠 못 자는 거 아니고요?”
시끄럽다. 귀에서 피 날 것 같아….
“아빠, 근데 어디 가?”
여전히 오스카에게 몸이 돌려진 채 묻자, 아빠가 말했다.
“아, 맞다. 성물 찾으러. 공주가 만든 계시에 그… 뭐더라?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의 성스러운 땅? 거기 어디야?”
“그거 동부 알펜 영지야. 거기 새 신전 말구, 옛날 신전 있었던 자리.”
“그렇구나. 거기 성물이 있어?”
“응, 맞아!”
“그걸 자드키엘 사제님 손에 들려주면 되는 거지?”
“응응! 근데 아빠 왜 이렇게 급해? 황제 폐하가 벌써 성물 찾으러 가라구 했어?”
“아니, 아직. 그런데 황제보다 아빠가 먼저 성물을 찾아야 사제님 손에 무사히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아!”
아빠는 황제가 성물을 가로챌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거 가로챌 수 있는 거 아닌데….’
나는 몰래 히죽 웃었다.
“아빠, 근데 그거 걱정 안….”
“으아악! 흉해!”
오스카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흉해? 아빠 알몸이라도 봤나.
“마탑주, 목소리 좀 낮춰! 여기 당신 숨어 있다고 동네방네 다 소문낼 생각이야?”
“내가 바보예요? 소리 안 나가게 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지?”
“아, 정말? 역시 대단하네.”
“아빠, 잠만 내 말 좀….”
“그리고 옷을 왜 한세월 갈아입습니까? 빨리빨리 좀 못 하나?”
“역시 전쟁터라곤 한 번도 안 가본 마탑주다운 발언이야. 갑옷은 원래 입는 데 오래 걸려.”
“아빠아! 옷 입지 말구 잠깐….”
“마탑주, 그리고 나 갔다 올 동안 우리 공주 좀 부탁해도 되지?”
“그런 거 부탁 안 해도 알아서 잘합니다.”
와!
내 말 하나도 안 들어!
“그래, 고맙….”
“제발! 아빠!”
나는 여전히 나를 돌려세운 오스카의 손을 뿌리치고 휙 뒤돌았다.
“내 말 좀 들어조오오!!!”
“와씨, 깜짝아!”
화들짝 놀라는 오스카.
그리고 바지 한쪽에 다리를 끼워 넣고 있던 아빠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와.”
놀란 아빠가 깽깽이 발로 몇 걸음 휘청거리다가 하하 웃었다.
“…내 새끼 건강한 것 봐라. 목소리가 아주 장군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