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하고 싶어!”
“오, 우리 공주 말하고 싶었구나. 아빠가 미안해. 마음이 급해서. 무슨 말인데?”
“거기 자드키엘 사제님이 직접 가야 해.”
“맞아. 사제님이 자기가 꼭 가야 한다고 하긴 하더라. 그런데, 공주야.”
아빠는 한쪽 다리만 끼운 바지를 마저 입으며 말했다.
“황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사제님을 거기 보내 주지 않겠지? 그러니까 아빠가 먼저 찾아서 가져다줘야 할 것 같은데?”
“아아니!”
나는 아빠가 옷을 다 입고 후다닥 나가버릴까 봐 얼른 달려가서 바짓자락을 잡아당겼다.
“어어, 공주야. 아빠 바지. 벗겨져, 벗겨져.”
“그거 막 누가 찾아서 대신 가져다줄 수 있는 게 아니라구!”
“엉?”
아빠가 고개를 갸웃했다.
* * *
“계시에 나온 성물의 위치가 어디지?”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동부 알펜 영지입니다. 성스러운 땅이란 알펜의 옛 신전이 있던 터를 말하고요.”
대신관, 티모시의 말에 니콜라스는 생각했다.
‘계시가 이미 바깥에 퍼진 이상 원정대를 보내지 않을 수는 없다.’
예로부터 제국 곳곳에 존재했던 신성한 성물들.
역대 대신관들은 신의 계시를 듣고 그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고 계시가 내려온 이상, 황실에서는 원정대를 보내 성물을 찾을 의무가 있었다.
“알았네. 그럼 할 수 없지. 당장 원정대를 꾸려야겠어.”
“예? 서, 서, 성물을… 찾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달리 방법이 있나? 이미 신의 계시가 퍼진 상황이야. 그렇다면 내게는 선택지가 없지.”
“폐하! 재고해 주십시오!”
티모시가 대번에 몸을 납작 엎드리고 빌었다.
“이는 거짓을 밝히기 위한 신의 안배가 분명합니다. 성물이 무엇이든 간에, 찾아내면 뭔가가 밝혀질 것입니다. 그럼 저는 거짓말을 한 신도가 되는 것인데, 어찌….”
“성물의 주인이 자네가 되면 되는 걸세, 대신관.”
“…예?”
“그 어린 사제 놈의 손에 성물이 들어가게 둬선 안 돼. 그러니 최대한 빨리 먼저 찾아내 우리 손에 넣으면 될 뿐이야.”
“아.”
티모시가 눈을 껌뻑였다.
그래, 계시를 알리러 왔던 자드키엘은 자신을 원정대에 포함시켜 달라 했다.
그 부탁 또한 신의 안배였을 터.
만약 자드키엘이 성물을 손에 넣게 되면, 모두가 놀랄 만한 기적 같은 광경이 펼쳐질지 모른다.
이는 ‘거짓된 종’ 티모시와 ‘진실한 종’ 자드키엘을 가려내기 위해 신이 내린 계시이니까.
하지만 기적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한다면?
자드키엘의 손이 아예 성물에 닿을 수도 없게 한다면?
“걱정할 거 없어. 대신관의 뒤에는 내가 있지 않은가.”
니콜라스는 두려워하는 티모시를 달랬다.
“내가 지금 능력을 쓸 것이야. 그 어린 사제 놈이 아닌, 대신관의 손에 무사히 성물이 들어올 수 있게.”
니콜라스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였네.”
축복을 내리듯 제 머리 위에 쫙 펼쳐진 손.
티모시는 그의 손을 경외하듯이 바라보며 전율했다.
* * *
니콜라스는 급히 보좌관, 라몬을 불러 명했다.
“성물을 찾으라는 계시가 내려왔으니, 시급히 원정대를 꾸려야 한다. 1급 도스군, 마력계들로만 소집해.”
“예?”
라몬은 어리둥절했다.
“마력계 능력자들로만 원정대를 꾸린다는 말씀이십니까? 성기사단이 아니고요?”
성물을 찾는 원정대는 항상 성기사단으로 꾸려졌다.
이는 오랜 관례였다.
“그래, 무조건.”
하지만, 에녹을 보낼 순 없었다.
명민한 에녹은 분명 계시에 의아함을 느낄 거다.
어쩌면 제 명을 거역하고 성물을 빼돌려 구교파의 어린 사제에게 전할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일이 전부 틀어진다.
“계시에 따르면, 성수들이 성물을 수호하고 있다고 한다. 성력계 능력자들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어.”
다행히 관례를 무시하고 에녹을 따돌릴 명분은 있다.
에녹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라!”
성물을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
* * *
“아빠가 성물을 대신 가져다줄 수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니깐 자드키엘 사제님만 그 성물을 가져갈 수가 있어.”
아빠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 상상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건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겠지.’
생각하는데, 오스카가 지루해졌는지 귀를 후비적거리며 내 침대로 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애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정신 사나우니까 어디 가지 말고 앉아 있어요.”
“정신 사납게 했다면 미안하지만 난 마음이 급해. 울 공주가 힘들게 고생해서 판 깔아 줬는데 허무하게 날려버릴 순 없잖아.”
아빠는 오스카를 한 번 노려보고 다시 내게 말했다.
“그럼 아빠가 자드키엘 사제님을 데리고 가면 되는 거야?”
“황제가 멍청이도 아닌데, 그러는 당신은 원정대로 보낼까?”
듣고 있던 오스카가 빈정거렸다.
“당연히 아니지. 나한테는 알려 주지도 않을걸. 그래서 지금 서두르는 거잖아. 먼저 가려고.”
아빠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오스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 뭐야. 그럼 황제 명령도 없이 성물을 몰래 빼돌린다는 말이었어요?”
“응. 그거 말곤 방법 없지.”
“이야, 대단하네. 도서관에서 책 훔칠 때부터 알아봤지만, 사람 진짜 못 쓰겠네.”
“맞다. 그때는 미안하게 됐어. 내일 꼭 반납할게.”
“정식으로 대출도 안 하고 훔쳐 간 주제에 반납은 무슨 놈의 반납! 그리고 어차피 다 읽었을 거 아냐!”
또 둘이서만 주고받는 다정한 대화.
왠지 모를 소외감에 나는 오스카 옆에 가 풀썩 누워, 한쪽 턱을 괴고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 황제 폐하 명령도 없는데 거기 가면 혼나잖아. 혼날 일 하지 말자. 그럼, 만약 황제 폐하가 아빠 안 보내면 누구 보내?”
“다른 부대 단장 아저씨를 보내지 않을까? 공주 고모부라든가.”
“에구. 고모부 고생하겠네.”
자드키엘이 가면 고생할 일도 없을 텐데.
황제는 아빠도, 자드키엘도 따돌리려고 한다니까….
“어쩔 수 없당. 기다리자. 아빠는 괜히 또 범죄 저지르려고 하지 말구 그냥 집에 있어.”
“같은 생각.”
오스카도 나랑 똑같은 포즈로 누워 턱을 괴고 쯧쯧 혀를 찼다.
그런 우리 둘을 보는 아빠 표정은 여전히 초조해 보였다.
마음은 알겠지만….
“정말 괜찮다구. 날 믿어바.”
* * *
알펜 성물 원정대.
원정대장은 도스 마권사단의 수장, 알렉세이 앙트라세.
그는 간만에 쌍둥이 아들들과 놀던 중에 뜬금없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소집되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군인들에게 황명은 절대적이니.
하지만.
‘아니, 대체 왜 마력계 능력자들이 가야 하는 거지?’
소집된 지 1시간 만에 알펜에 와 있는 알렉세이는 어이없었다.
성물을 찾으라는 계시가 내려온 것은 알겠다.
한데 왜 황제는, 관례도 무시하고 성기사단이 아니라 마력계 능력자들을 보냈단 말인가?
‘그 늙은 뱀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럴 리 없지. 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제는 에녹과 상의할 틈도, 자신의 꿍꿍이를 깊게 고민해 볼 시간도 주지 않았다.
“후, 빌어먹을!”
달려드는 사자 모습의 성수.
마나를 실은 권갑으로 찢어내자 끈적하니 푸른 피가 뺨에 튀었다.
“끝이 없네, 진짜.”
알펜에 있는 옛 신전의 터.
200년 전 성수들이 습격해 차지한 이후, 알펜 신전은 이곳을 버려두고 새로운 터로 이전했다.
그 뒤로는 성수들의 본거지였다.
바로 이곳에서 성수들이 성물을 수호하고 있다 하는데….
“대신관님. 이게 맞습니까?”
“예, 예?”
알렉세이는 제 옆에서 실드를 두른 채 서 있던 대신관, 티모시에게 물었다.
벌써 상당히 많은 수의 성수들을 제거한 상황.
“계시랑 말이 좀 다르지 않냐, 하는 겁니다.”
즐비한 사체들을 보며 알렉세이는 의아했다.
성물을 수호하는 성수들은 그의 걸음마다 복종하며 무릎 꿇으리라.
계시의 해석이야 물론 제각각이다.
하지만 성수들이 복종하며 무릎을 꿇는다―는 계시의 마지막 말이 갖는 뜻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날뛸 리가 없을 것 같단 말이지.’
그랬다.
성수들을 얌전하게 할 대신관과 함께 왔건만.
순순히 수호하던 성물을 내어줘야 할 성수들이 왜 이리 공격적일까?
“오, 오랜 시간 동안 성물을 수호하던 상서로운 짐승들입니다. 당연히 반항적일 수밖에 없지요.”
“…….”
당황한 표정의 티모시가 대답하자, 알렉세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한숨 쉬었다.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올 터.
이내 알렉세이는 다시 성수들을 잡아 나갔다.
곧 마지막 성수 한 마리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단장님, 성물을 찾은 것 같습니다!”
멀리 있던 마권사 하나가 알렉세이에게 손짓했다.
다가가자, 많은 성수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던 ‘성물’의 정체가 보였다.
* * *
“공주야. 그런데 그 성물이 대체 뭐길래 사제님만 가져갈 수 있다고 하는 거야?”
아빠는 여전히 초조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 그게 뭐냐면….”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자각몽을 꿨을 때.
체시어에게 목이 뎅강, 하고 날아갔던 순간이 떠올라서였다.
그러니까 그 성물은 그때 체시어 손에 들려 있던….
* * *
‘검?’
유려한 검신을 지닌, 아름다운 검 한 자루.
200년 넘게 버려져 있던 옛터에 마치 새것처럼 보존되어 빛을 뿜고 있으니 분명 성물이었다.
“저 중요한 걸 뭐 이렇게 아무 데나 던져 놨어?”
그런데 이상하게 어디에 보관되거나 곱게 모셔져 있지도 않았다.
그냥 바닥에 덜렁 버려져 있을 뿐.
‘왠지 그대로 황제에게 가져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알렉세이는 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생각했다.
굳이 성기사단을 빼고 원정대를 꾸린 이유….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에녹의 손에 먼저 성물을 쥐여주지 않기 위함인 듯했다.
에녹이야 황명을 무시할 배짱이 있으니.
‘하지만 처남이야 괜찮아도, 나는 좀 곤란한데.’
황명을 거스르고 성물을 빼돌리기도 힘들거니와, 그렇게 튀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되는 시점이다.
“매형께선 최대한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굴어 주십시오. 저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니, 의심을 사기 쉽습니다.”
반란을 준비하는 에녹.
계획을 알리며, 에녹은 그리 당부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끝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알렉세이는 피곤한 머리를 두어 번 두드리며 검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
그러나.
“뭐야?”
무겁다.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뭐냐고?”
이번에는 두 손으로.
그래도 검은 들리지 않았다.
딱히 마법이 걸려 있는 것도, 땅에 붙여놓은 것도 아니건만.
“풉.”
부하 하나가 그런 알렉세이를 보며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게도 별로 안 나가 보이는 얇은 검신.
그런데도 들지 못하고 검과 씨름하는 꼴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야, 네가 해 봐.”
“네?”
알렉세이가 부하에게 말했다.
곧 부하도 검을 들어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 못 들겠는데요?”
“그렇지? 무겁지? 나만 못 드는 거 아니지?”
“그런데 이거 무거워서 못 든다기보다는… 그냥 안 들리는걸요?”
“아.”
깨달은 순간.
성물 주변에 모여 선 능력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대신관, 티모시를 향해.
* * *
“아, 그러니까 자드키엘 사제님이 아니면 그 검을 아무도 못 든다는 말이지?”
“응응.”
아빠랑 열심히 얘기하는 와중.
드르렁, 드르렁.
“커억!”
코 골다 숨넘어가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오스카는 자고 있었다.
“어휴, 맨날 일하느라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더니 보기 좋네.”
아빠가 측은한 눈으로 오스카를 보며 말했다.
“으응. 그러게.”
“그런데, 공주야.”
“응.”
아빠는 여전히 걱정되는 얼굴이었다.
“공주도 알겠지만, 황제는 프리메라야. 그러니까 뭐든… 할 수 있지.”
“아하.”
그래, 어쩌면.
황제는 자드키엘이 아니라 대신관의 손에 성물이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능력을 써 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쎄….”
내가 만든 계시.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다.
‘성물의 주인만이 앞으로 진짜 신의 계시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만든 거짓말이지만.
‘성물의 주인이 자드키엘 사제님인 건 진짜잖아?’
그 검은 내가 거기에 가져다 놓은 게 아니다. 아무도 못 들게 손을 써 놓은 것도 내가 아니고.
원작에서 토벌을 갔던 체시어가 우연히 발견한 성물.
그러니까 황제의 목을 따고 세계 평화를 이루라는 의미에서 신이 갖다 둔 아이템일 터.
‘후대의 프리메라가 아무리 잘나봤자 전대의 능력을 뚫을 순 없지.’
신이라면 프리메라 중의 프리메라.
최고봉이 아닌가.
“쉽지 않을걸~!”
나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 * *
내가 선택한, 오직 진실한 종만이 주인 될 자격이 있는 성물을 예비하였으니.
계시에서 말하는 ‘주인 될 자격이 있는’ 자만이 성물을 들 수 있을 터.
‘오히려 잘됐네.’
안 그래도 의심스럽더라.
슬쩍 웃은 알렉세이가, 티모시를 돌아보며 검을 향해 턱짓했다.
“대신관님, 들어보시죠. 아무래도 성물이 인정하는 주인 되시는 분만 가능한 모양입니다.”
“…….”
그때.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티모시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