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관님?”
알렉세이가 재촉했다.
티모시는 눈앞이 새하얘져서 덜덜 떨리는 걸음을 겨우 내디뎠다.
‘괜찮다. 저따위가 뭐라고. 내게는 폐하의 은총이 있어.’
들 수 있을 거다.
황제가 무사히 제 손에 성물을 넣을 수 있도록 힘을 썼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늙고 주름진 손이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
손에 힘을 줘 봤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후우.”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알렉세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관님.”
티모시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대신관님?”
“…….”
“아무래도 대신관님은 성물이 찾는 주인이 아니신가 본데.”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 티모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알렉세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계속해 봤자 시간 낭비겠군요. 이만 돌아가시죠.”
* * *
황제, 니콜라스는 원정을 떠난 대신관 대신 부신관이 가져온 계시를 읽고 있었다.
<나의 가여운 어린 종이여.
너는 아직 나의 성전에 들 때가 되지 아니하였으니.
예비한 생의 시간을 오롯이 살고 나에게 오도록 기적을 내리노라.>
니콜라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의 어머니가 참으로 필사적이시구나.’
제힘으로 성열에 빠트린 에녹의 딸을 깨우겠다는 계시다.
벌써 세 번이나 자신을 방해한 신의 목소리.
이제는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감히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의 권능에, 전의마저 사그라졌다.
‘신이 돌아왔다…, 라.’
황족에게 권능을 양도하고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절대자.
하필 자신의 대에 다시 나타난 신은,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왜?
자신의 부친도, 조부도….
강력한 프리메라의 권능과 신권정치로 독재하며 제국의 세를 불리고 땅을 넓혀 왔다.
그것을 전부 보고 자랐던 니콜라스의 숙원 또한 같았다.
강한 나라.
유일한 대국.
결국에는 이 하늘 아래, 제국의 이름만을 남겨놓는 것.
선조들이 쌓아온 업적의 마침표를 자신의 대에 찍을 수 있어야 했다.
평생 그것을 위해 살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포기하라고?
“어머니.”
니콜라스는 나직이 신을 부르며 웃었다.
신이 명백히 바라는 바는 ‘평화’.
“당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일련의 사태들로, 금방이라도 이룰 듯했던 숙원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흐려지고 제도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기까지, 다시 몇 년에 걸친 기다림이 필요하겠지.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방문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원정대가 돌아왔습니다. 원정대장 알렉세이 경과 대신관이 폐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그래, 들라 하게.”
니콜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맞았다.
* * *
“으음.”
뒤척이던 오스카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열렸다.
‘아, 뭐야. 나 잤어?’
창 너머 주홍빛 노을이 들이쳤다.
자도 꽤 한참 잔 모양.
오스카는 놀라서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떴다.
꿈도 안 꾸고 자다니.
회귀한 이후 악몽 때문에 잠들기 괴로웠던 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애는….’
순간 리리스가 생각났다.
당황해 고개를 돌리니.
‘아.’
오동통한 뺨이 베개에 눌린 채 색색 잠든 아이가 보였다.
“…….”
하얀 얼굴 위에 드리운 노을빛.
잠든 표정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여서 오스카는 웃고 말았다.
‘소리 내면서 자네. 애는 앤가.’
고요한 방에 아이의 숨소리가 잘 들렸다.
일정하게 푸― 푸― 하고 내쉬는 숨이 귀여워서 오스카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막았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버려 둔 채, 얼마나 한참을 아이 얼굴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을까.
뒤늦게 시선이 느껴졌다.
‘아, 씨.’
창가에 에녹이 서 있었다.
깨어난 오스카를 빤히 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는, 웃음을 참는 표정이 역력했다.
“공주 얼굴 닳아버리겠네~”
“시끄러워요.”
혹여나 아이가 깰까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온 오스카가 에녹에게 다가갔다.
에녹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오스카가 밖을 내다보았다.
리리스의 방에서는, 웅장한 대신전 건물이 작게나마 보였다.
‘아하.’
오스카는 피식 웃었다.
신전 앞은 왜인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 * *
대신관의 낯빛은 창백했다.
그 표정만 봐도 일이 틀어졌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폐하, 원정 결과를 보고드립니다.”
원정대장이었던 알렉세이가 니콜라스의 앞에 고개 숙이며 말했다.
“수고했네. 한데, 가지고 온 게 없는 걸 보니 어째 일이 잘못된 모양이군그래.”
“예.”
알렉세이는 침착해 보이는 니콜라스의 표정을 의아해하며 보고했다.
“계시와는 달리 성물을 수호하던 성수들이 공격적이었습니다. 하여 직접 처리하고 성물을 발견하긴 하였으나….”
“무엇이었나?”
“검이었습니다.”
“검? 그렇군. 성물을 회수해오지 못한 이유는?”
“계시에서 이른 성물의 주인만이 회수할 수 있는 듯합니다. 원정대원 전원, 그리고 대신관님까지 성물을 드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아아, 또 그랬군.”
니콜라스가 쯧쯧 혀를 찼다.
“당연히 이 제국에서 가장 신실한 우리 대신관이 성물의 주인이리라 예상해서 함께 보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 계시를 받은 세라프 신전의 사제가 주인인 모양이지.”
니콜라스가 명령했다.
“그렇다면 알렉세이 경, 그 사제를 데리고 다시 알펜으로 가서 성물을 회수해오게.”
“…예?”
알렉세이는 놀랐다.
왜 황제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어 보이는 걸까.
분명 성물을 대신관 손에 쥐여 주고 싶었을 것 같은데….
“…명령 받들겠습니다.”
의아해하던 알렉세이가 나가고 둘만 남은 집무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티모시는 병적으로 떨기 시작했다.
“폐, 폐하…. 저는 오직 폐하를 위해 충성을 바쳤습니다. 저는….”
황제가 시켜서 만든 거짓 계시.
그것이 들통났다.
이제 황제는 당연히 발을 빼려 할 테고, 자신은 혼자 죽어야 한다.
뻔히 보이는 제 운명에 티모시는 두려웠다.
“버, 벌써부터 신전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합니다…. 저의 거짓 계시가 확실해지면 다, 다들 제게 돌을 던지고 욕을….”
“아아, 대신관. 떨지 마.”
그러나 니콜라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티모시를 다독였다.
“대신관은 그저 나를 도왔을 뿐이잖나. 내가 설마 일이 잘못되었다고 나의 충직한 신하를 모른 척할 파렴치한으로 보였던 거야?”
“폐, 폐하…?”
“걱정하지 말게.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내가 직접, 신전으로 가 많은 이들 앞에서 이 사태를 소명할 것이야.”
“예? 폐하께서… 지, 직접?”
놀란 티모시를 보며, 니콜라스가 너그럽게 웃었다.
“그러니 우리 대신관은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게.”
* * *
“저 사람들은 대신관 늙은이한테 돌이라도 던지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겠죠?”
“그렇겠지.”
창밖을 내다보던 오스카가 묻자, 에녹이 짧게 답했다.
“늙은이 어떻게 되려나. 이번 일은 타격이 좀 클 텐데, 안됐네.”
안타까워하는 말과 달리 오스카는 킬킬 웃었다.
신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한 이번 사태에서, 대신관이 빠져나올 방법은 아무리 봐도 없었다.
“삶아지겠지?”
“뭘 삶아요?”
멀리 신전을 바라보는 에녹의 푸른 눈이 매섭게 빛났다.
“대신관 말이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솥에 삶긴다.
하물며 사냥도 그르친 쓸모없는 늙은 사냥개.
황제는, 그를 살려둘 리 없다.
도리어 잘 삶긴 개고기를 나누며 사냥에 실패한 자신의 죄과를 감추려 들 자였다.
* * *
사흘 뒤.
칩거하던 대신관, 티모시는 덜덜 떨며 나갈 채비를 했다.
대신관이 정말로 거짓말을 했나?
첫날에는 그저 신전 앞에 찾아와 궁금해만 하던 사람들은, 이제 소리치고 욕하며 티모시를 불렀다.
세라프 신전의 어린 사제, 자드키엘을 데리고 떠난 원정대가 무사히 성물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그로써 자드키엘이 받은 계시는 진실이요, 티모시는 신의 이름을 판 기만자로 낙인찍혔다.
‘폐, 폐하가 와 주실 거야….’
황제는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귀한 몸을 이끌고, 이곳에 직접 와 주기로 했다.
하지만 티모시는 불안했다.
황제가 무엇을 소명하고 어떻게 자신을 구해주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에….
“대신관이다!”
“왜 거짓말을 한 거야!”
“신을 기만한 자다!”
신전 밖으로 나온 티모시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들은 티모시의 입이 열리고 어떤 변명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 * *
그때, 신전 앞에 모인 군중 속에 로브를 뒤집어쓴 악시온이 있었다.
“너도 성격 참 이상하다. 뭐 좋은 구경이라고 나오자고 하나? 왜, 같이 돌이라도 던지게?”
그의 옆에는 체시어도 있었다.
“…아니요. 황제 얼굴을 보고 싶어서요.”
“웬 황제? 귀하신 몸이 여기 올까? 단물 빠진 대신관이랑 엮이기 싫어할 텐데.”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지고 만 대신관.
그의 몰락은 아쉽겠지만, 황제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면 도망쳤지 대신관을 구할 위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악시온의 생각과 달리.
“폐, 폐하!”
“황제 폐하시다!”
황제가 직접 신전 앞에 행차하고 있었다.
‘뭐야, 정말 왔잖아? 대신관을 그냥 보내기가 아까웠던 건가? 여기서 대신관을 싸고돌면 자기한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악시온은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덜덜 떨기만 하던 대신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보였다.
“황제 폐하!”
“위대한 프리메라시다!”
사람들은 전부 두려워하며 황제의 앞에 서둘러 엎드렸다.
“폐, 폐하….”
황제는 멍하니 서 있는 대신관의 앞까지 다가갔다.
대신관은 울컥한 표정이었다.
“들어라.”
황제가 군중을 향해 말했다.
“대신관은 감히 거짓으로 계시를 만들어 나와 제국민들을 조롱하고 신을 기만하였다.”
체시어는 멀리서 그를 지켜보았다.
여기에 온 것은 대신관의 변명이 궁금해서도, 그의 최후를 보고 싶어서도 아니다.
다만 황제의 얼굴을 제 눈꺼풀 안에 새겨 놓고 싶어서였다.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함은 물론, 대신관의 직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제도의 분위기를 조성한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폐, 폐하? 저….”
가시 돋친 듯 날카로운 말 하나하나가 의아해, 대신관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제국의 주인으로서 절대 좌시해서는 아니 될 사태이기에, 내 직접 기만자를 벌하여 본보기 삼기 위해 이곳에 행차하였다.”
무슨 말이지?
당황한 대신관이 주름진 손을 뻗어 황제의 붉은 망토 자락을 잡으려 할 때.
“폐―!”
“보아라!”
황제는 머리끝까지 분노한 얼굴로, 위엄 있게 오른쪽 팔을 세웠다.
그 순간.
늙은 대신관의 눈에서는 단숨에 생명의 빛이 사그라졌다.
정적.
이내,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
모두가 놀라 그대로 굳었다.
그 사이에서 체시어만, 감흥 없는 눈으로 황제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풀썩.
곧, 채 식지도 않은 대신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