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황제, 프리메라의 권능에 몸을 떨었다.
고작 손짓 한 번에 꺼트린 생명.
그 모습은 가히 신과도 같았다.
“위, 위대하신 프리메라시여!”
“프리메라시여!”
악시온은 황제를 경외하는 군중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렇게 쇼를 하려고 직접 나온 거였군.’
허탈하게 주변을 보던 악시온이 멈칫했다.
옆에 서 있는 체시어의 표정.
‘…뭔 표정이지?’
황제의 권능에 놀라며 두려워하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체시어는 마치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끓어오르는 감정에 한참 전율하고 있었으니까.
‘리리스, 이제 네가 왜 저 사람을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알 것 같아.’
체시어가 아는 한 가장 강한 자인 에녹도, 프리메라인 리리스도.
황제의 능력을 이상하리만치 두려워했다.
겪어 본 적이 없는 체시어는 알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리리스가 성열에 빠진 뒤 사무치게 느꼈다.
손짓 하나로 너를 위협할 수 있는 강한 존재.
천사의 날개를 무자비하게 쥐고 꺾을 수 있는 악마.
체시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제 가슴 안에 새겨 넣고 싶었다.
살심(殺心).
앞으로 자신을 움직이게 할 동력을.
* * *
대신관 할아버지가 죽었다.
제도는 뒤집혔고, 그 후로 두 달이 빠르게 흘렀다.
“에휴.”
그동안 해가 바뀌었고 나는 여덟 살이 되었다.
‘그래도 나 제도에 오고 반년 넘게 꽤 열심히 살았는데….’
당연하겠지만, 황제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어서 나는 요즘 좀 우울했다.
물론 십 년은 더 걸렸던 혁명을 반년 만에 해 먹으려는 건 도둑놈 심보였지만.
‘하아, 쉽지 않아….’
나는 무기력하게 엎드려 오스카가 내준 숙제를 풀었다.
“똑바로 앉아서 안 풀래?”
“앗, 스승님!”
오스카가 둔기처럼 두꺼운 책을 내 앞에 쿵, 내려놓으며 등장했다.
“뭐예요?”
“그거 저번 주에 내준 숙젠가? 그만 풀고 오늘부터 이거 봐.”
나는 책을 열어봤다.
그리고 놀랐다.
‘…사, 사영 기하학?’
대학교 가서 배우는 수학이다!
이건 머리에 힘 빡 주고 전생을 떠올려도 못 푼다.
나는 수학 전공이 아니었으니까.
“스, 스승님….”
“오늘 그거 30페이지까지 하자.”
오스카는 냉정하게 말하고 또 착 다리를 꼬고 앉으며 자기 책을 보기 시작했다.
“제, 제가 이런 것까지 꼭 풀어야 할까여…?”
“응. 내가 이동 마법식 가르쳐준다 했잖아. 그거 알아야 쓸 수 있어.”
“아! 글쿠나. 근데 이동 마법식을 꼭 알아야 할까여?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데 저만 알아봤자….”
“야, 나중에 위험한 일 생겨 봐. 네 능력 써서 도망치면 편하지. 근데 존재하지도 않는 마법을 쓰면 의심받지 않겠어?”
“…듣구 보니 그르네.”
“빨리 풀어.”
알려주지도 않고 풀라고 하네.
물론 내가 다 아는 줄 아니까 그런 걸 테지만.
“스승님, 그럼요. 한 가지 고백할 거 있어요.”
“뭔데.”
“저 문과였음….”
“뭐? 그게 뭔데?”
“수학 전공 아니었어요.”
“……?”
의아해하는 오스카의 눈치를 보며 나는 배시시 웃었다.
천재가 아니라 많은 기억이 있어 문제를 풀었던 거야, 오스카도 대충 알고 있지만….
내 입으로 말하려니 영 민망하군.
“저 그… 전에 살았던 세계에서 말인데요. 벡터까지는 애들 과외해 주느라 공부해놔서 알았는데….”
“…….”
“오늘 갖다 주신 이거, 사영 기하학 이거는… 대학교에서 수학 전공하는 친구들만 푸는 거라 저는 잘 몰라요. 배운 적이 없어서요….”
반쯤은 못 알아들을 소리였지만, 말의 핵심은 눈치챘는지 오스카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오호라. 그러니까 지금까지 했던 거랑 달리 이 스승님의 제대로 된 가르침이 필요하단 얘기네?”
“스, 스승님.”
오스카가 사악하게 웃었다.
나를 열심히 굴리며 가르칠 의지가 만만해 보였다.
“잠깐만!”
다행히 뇌물이 있지.
나는 책상 구석에 밀어 놨던 예쁜 선물 상자를 건넸다.
“선물이에요!”
“뭐냐?”
“풀어 보세요.”
오스카가 고개를 갸웃하며 상자를 열었다.
나온 것은 예쁜 깃펜.
“으항항! 이거 엄청 비싸요! 제가 차곡차곡 모은 용돈으로 샀어요!”
“…갑자기 이걸 왜 줘?”
“오늘 스승님 생일이니까! 2월 18일!”
오스카의 눈이 커졌다.
나는 씨익 웃었다.
“저 이제 스승님에 대해서 모르는 거 없다구여~!”
“…….”
오스카는 묘한 표정으로 선물을 한참 봤다.
다행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열여덟 살 생일 축하드려요. 제가 앞으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리고 십 년 후에 스승님이 스물여덟 살, 서른여덟 살, 마흔여덟 살, 쉰여덟 살….”
“그만, 그만.”
“…아무튼 스승님 생일 평생 축하해 드릴게요!”
깊어진 눈으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오스카가 “그래.” 하고 말했다.
나는 히히 웃으며 속삭였다.
“스승님, 스승님! 생일 기념으로 오늘은 공부하지 말구 놀까여?”
씩 웃은 오스카가 얼굴을 바짝 붙이고는 내 코끝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책 펴세요, 공주.”
“…우쒸.”
* * *
중부, 발테락 신전.
넓은 기도실에 홀로 우두커니 앉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제프가 다가가자 기도하고 있던 남자, 에녹이 돌아보았다.
“왔나?”
“간만에 여기서 뵙습니다. 각하를 처음 만난 곳이었는데 말이에요. 어째, 포커 실력은 좀 느셨습니까?”
“전혀. 소질 없더라고.”
손에 포커 카드를 쥐고 있던 조제프가 킬킬거리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언제 웃었냐는 듯,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신전의 권력이 축소됐습니다. 이번 일로 황제는 큰 걸 잃었죠.”
거짓 계시를 퍼뜨려 신을 기만한 대신관이 죽었다.
황제는 직접 그를 벌하는 퍼포먼스를 하며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고 위기를 탈출했지만….
그럼에도 명백히 타격을 입었다.
“신의 뜻이 평화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황제는 당장, 섣불리 전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없겠죠.”
“그렇겠지.”
에녹은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지금부터 황제는 신전의 인력을 재배치하고, 추락한 권위를 다시 세우고, 제도의 분위기를 정비하기 위해 공을 들일 겁니다.”
“…….”
“숨을 죽이고 재도약할 발판을 만들 시점이라는 거죠.”
조제프는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에게는 상당히 좋은 기회입니다. 각하께서는 당분간 전쟁으로 골머리 앓으실 필요가 없으니.”
“그만큼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할 때이기도 하겠지.”
“맞습니다. 최종 목표는 황제의 목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근간을 지배한 계급제를 흔들어 끝내 도려내는 것이니까요.”
두 남자는 진지한 목소리로 앞으로의 계획을 오랫동안 주고받았다.
이윽고 떠나려던 에녹이.
“그런데 그거 안 끊을 거야?”
조제프의 손에서 내내 현란하게 파라락, 움직이던 카드를 가리키며 웃었다.
“아아, 간만에 중부에 왔으니 한 게임 하고 가려고요.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지나칩니까.”
“사람 참, 한결같다니까.”
“저 그래도 담배는 끊었습니다?”
에녹이 킬킬 웃었다. 함께 웃던 조제프가 일순 진지해진 눈빛으로 덧붙였다.
“각하.”
“응.”
“저는, 승산 없는 게임에 베팅하지 않습니다.”
“…….”
“물론 긴 싸움이 되겠지만, 분명 승리할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조제프가 씩 웃었다.
“마지막에 웃는 건 각하이실 테니까요.”
조제프와의 대화는 항상 에녹을 안도하게 했다.
고마운 자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표정에서 불안을 걷어내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말 처음에 승산 있어서 뛰어든 거 맞나? 울 공주 때문에 나 도와줄 결심 한 거 아니고?”
“앗.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아하하하!”
둘은 한참 웃었다.
일어난 조제프가 카드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어째. 한 게임 같이?”
“아냐. 혼자 해. 나는.”
에녹이 어깨를 으쓱했다.
“울 공주 없이 그거 못 해.”
* * *
대신관의 죽음으로 황제의 팔 한쪽이 잘린 지금.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황제가 숨을 죽일 이 시기가 에녹에게는 기회였다.
변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할 시점.
“공주야!”
에녹은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괜히 딸을 불러보다가 웃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
새삼 참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게….
“아빠가! 많이많이 사랑해!!!”
진심을 담은 목소리가 평온한 하늘 위에 새겨지듯 울려 퍼졌다.
남자는 언제부턴가 항상 해 왔던 다짐을, 속으로 또 새로이 고백했다.
공주야.
너를 위해서,
아빠는 뭐든 할 거야.
* * *
제국력 1783년, 3월.
생명이 움트는 초봄의 어느 날.
앙트라세 공작가는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다.
“나 너무 잘생겼는데.”
레온 앙트라세는 거울 앞에서 한참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리리스가 단정하게 좀 다니라며 매일 핀잔주는 머리를 멋지게 정리하니 확실히 달라 보였다.
“큭큭. 꼬맹이 나 보고 반하는 거 아니겠지?”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를 손으로 쓸며 레온이 거만하게 웃었다.
자라면서 똑 닮았던 쌍둥이 테오보다 묘하게 얼굴선이 날카로워져서일까.
그는 나이보다 성숙해 보였다.
“집사, 망토!”
“옙, 도련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등에 붉은색 망토를 둘러줬다.
제국군의 문장이 위엄 있게 박힌 붉은 망토와 흑색 갑옷.
마검사단의 상징이었다.
“때깔 죽인다.”
씩 웃은 레온이 오른쪽 귀에 루비 귀걸이를 차고 허리춤에 검을 멨다.
“자, 이만 가 볼…, 아차차차!”
방을 나서려던 레온이 호다닥 벽에 붙었다.
“집사, 봐 줘.”
“예.”
집사가 떨리는 눈으로 레온이 등지고 선 벽을 보았다. 벽에는 키를 재 놓은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도련님, 까치발 내리시고….”
“이번엔 안 했어!”
“네네.”
키를 보던 집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78이요….”
“으아아아!”
레온이 절규했다.
“도련님, 상심하지 마세요. 대체 도련님 나이에 이렇게 키가 크신 분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테오 도련님보다도 2센티나 크시잖아요.”
“체시어! 그 자식! 은! 벌써 180 넘었단 말이야!”
“그건 리브르 공자님이 너무 이상하신 거고요.”
나이에 안 맞게 몸 쓰고 전쟁터를 전전해서 그런가. 소년들은 성장기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훌쩍 자랐다.
집사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자란 키에도 만족 못 하는 도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맨날 한 끼에 두 그릇씩 먹는데 왜 안 크냐고! 왜!”
“더 자라실 거예요.”
“뭘 더 자라! 남자는 열여섯이면 다 큰다며! 아빠도 지금 키가 열여섯 살 때 키라고 했다고!”
“아니에요. 정말 더 크실 거예요. 그렇게 걱정되시면 오늘부터는 두 그릇 말고 세 그릇씩 드세요. 일단은 늦었으니 얼른 출발하시지요.”
집사가 레온을 달랬다.
밖에서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얼른 나와라.”
“레온, 대체 뭐 하고 있어? 빨리 나와! 늦겠어!”
아버지 알렉세이와 쌍둥이 형제 테오의 목소리.
“알았어! 가!”
레온이 후, 숨을 내쉬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씩 웃었다.
레온 앙트라세, 16세.
오늘은 그의 정식 기사 서임식이 있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