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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42)화 (143/261)

* * *

소년병들의 정식 기사 서임식이 있는 날.

눈부신 은색 갑옷과 푸른 망토를 갖춰 입은 남자의 눈이 거울 너머를 응시했다.

한층 깊고 날카로워진 눈빛.

“에이.”

그러나 일견 매서웠던 눈매는 누굴 생각하는지 금세 흐물흐물 풀어졌다.

“울 공주가 오늘 엄청 기대했는데. 아쉽네.”

서임식 후 있을 연회에 가서 직접 축하해주고 싶다고 딸애는 며칠 전부터 들떠 있었다.

그럴 만했다.

리리스와 제일 가까운 쌍둥이, 또 체시어의 일생에 한 번 있을 기념일이었으니까.

체시어는 정식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열여섯이 아니었지만, 마검사단 인력이 부재했기에 예외로 1년 빨리 정예군에 편성되었다.

“근데 말이야.”

에녹이 웃으며 돌아보았다.

“둘이,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자꾸 에녹을 힐끔거리고 있던 하녀, 제티와 쥰이 흠칫했다.

“저, 주인…, 억!”

뭔가 말하려던 쥰의 옆구리를 제티가 쿡 찔렀다.

“아닙니다, 주인님. 오늘 너무 멋지셔서요.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

“응, 그래. 우리 공주 오늘 살롱 끝나면 몇 시 정도 되려나?”

“어, 음. 글쎄요. 아무래도 살롱 열리는 첫날이니까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영 레이디 살롱(Young lady Salon).

오늘 처음 열리는, 4계급 옥타바부터 6계급 디에즈까지 어린 아가씨들의 사교 모임이다.

이 모임은 가문과 신분, 계급을 말하지 않는 익명이 원칙.

하위 계급부터 계급제의 구분을 흐리게 하고자, 에녹의 책사인 조제프가 고안하여 만든 살롱이다.

“울 공주….”

에녹이 리리스를 생각하며 한숨과 함께 웃었다.

대견한 내 딸.

살롱의 목적이 혁명의 일환임을 잘 아는 리리스는, 기대하던 서임식 연회도 포기하고 모임에 참석하러 간 것이었다.

“아, 나 늦었다. 갔다 올게. 오늘도 수고.”

에녹이 휭하니 방을 나섰다.

남겨진 두 하녀.

쥰이 제티를 노려보았다.

“어쩌려고 그래? 주인님한테 말했어야지!”

“말하면? 무려 성기사단장이 서임식도 팽개치고 아가씨들 살롱에 가는 꼴 볼래? 심지어 엄마도 아닌데? 아빤데?”

정보 길드 &;lt;붉은 매&;gt;의 단원인 둘은, 미리 입수한 소문 때문에 걱정이었다.

“그럼 아가씨는 어떡해! 얼마나 주눅 드시겠냐고!”

“아, 그러니까 말이야. 미치겠네.”

4년 동안 크고 작은 변화를 맞은 제국이지만, 몇백 년간 굳건했던 계급제는 당연히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살롱에 딸을 보낸 부모들이 ‘익명’으로 열리는 모임의 취지를 순순히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뜻.

하여 살롱이 끝난 뒤 귀족 부인들 전부 딸들을 깜짝 마중하러 갈 계획이시란다.

다시 말해―

‘아무리 그래도 우리 딸이 어떤 집 딸인지는 알려 줘야지!’

―라는 생각이랄까.

“아아, 안 돼.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해.”

쥰이 머리를 붙잡았다.

또래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나온 리리스.

그러나 살롱이 끝나고 나오자마자 친구들은 “엄마!” 외치며 마중 나온 귀부인들의 품에 달려가 안기겠지.

안 그래도 엄마가 없는 리리스는 그 사이에 혼자 멍하니 서서….

“아아악!”

도리질 쳐 끔찍한 상상을 끝낸 쥰이, 제티의 멱살을 붙들었다.

“어떡하지? 우리라도 아가씨 데리러 갈까?”

“미쳤어? 하녀가 거기 가서 뭐 해! 아가씨 꼴만 우스워지지!”

“오, 언니. 나는 진짜 귀부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아가씨 불쌍해. 거기 모일 엄마 부대를 상상해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물론 사정을 알면 당연히 에녹은 딸을 데리러 갈 거다.

하지만, 무려 루빈슈타인 공작이 그 자리에 행차해 버린다면 모임의 취지가 퇴색될 테고….

어차피 귀부인들이 다 간다고 하니, 모임의 취지야 의미 없지 않나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엄마들 가득할 곳에서 혼자 아빠 손 잡고 있을 리리스의 오묘한 심경이 걱정되고….

“어어언니! 잠깐! 나 좋은 생각이 났어!”

“뭔데?”

쥰이 눈을 번뜩였다.

* * *

“너희가 여기 무슨 일이야?”

테오 앙트라세는 출발하려다 딱 마주친 리리스네 하녀들, 제티와 쥰을 보고 의아해했다.

“도련님, 공작 부인을 뵈러 왔어요.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엄마한테? 뭔데?”

레온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들들! 서임 잘 받고, 이따 연회장에서 봐!”

그때 2층에서 내려오던 앙트라세 공작 부인, 오르디아가 멈칫했다.

“와, 당신 오늘 최곤데.”

그녀의 남편, 알렉세이는 입을 떡 벌리고 감탄했다.

연회를 위해 한껏 단장한 아내는 눈이 부셨다.

“아가씨, 만나는 사람 있나? 없으면 오늘 나랑 차 한잔 어때?”

“비켜 봐.”

금세 다가와 능글맞게 장난치는 알렉세이를 밀치고 오르디아가 제티와 쥰에게 다가갔다.

“너희가 웬일이니?”

“엄마한테 뭐 부탁할 게 있대요.”

테오가 말하자, 제티와 쥰은 머뭇거렸다.

리리스가 걱정되어 오긴 왔는데, 오늘은 일생에 한 번 있는 쌍둥이의 기사 서임식이다.

아무리 조카가 귀해도, 아들들만 할까?

“무슨 일인데 그래? 말해 봐.”

“오늘 저희 아가씨 살롱 첫날이신데요….”

“응, 알아. 그런데?”

운을 띄우고도 망설이는 제티 대신 쥰이 냅다 말했다.

“귀부인들이 오늘 살롱 참석하는 따님들 다 마중 나가신대요! 그러면 저희 아가씨만 혼자 집에 돌아오실 텐데 걱정되어서요!”

“뭐?”

오르디아가 놀랐다.

하위 계급의 선을 흐리기 위해 부러 익명으로 진행하는 살롱이었다.

한데 그곳에 귀부인들이 직접 마중 나간다니?

‘오, 그래. 그렇겠구나. 익명의 사교 모임이 아직은 귀족들에게 어색하고 언짢기도 하겠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엇, 그럼 큰일인데. 리리스 빼고 다 부모님이 데리러 가는 거야?”

“와, 그게 뭐야? 삼촌은 서임식 때문에 못 가실 거 아냐?”

테오와 레온이 한마디씩 했다.

“말씀드렸으면 주인님은 어떻게든 가시긴 했을 텐데…. 아무래도 어머니들만 가신다니까….”

제티가 소심히 말끝을 흐렸다.

다 엄마들만 온다 하니….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곧바로 이해한 오르디아가 둘의 어깨를 다독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 너희가 말 안 해 줬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리고는 쌍둥이를 돌아보았다.

“아들들, 오늘 너무 중요한 날인데 엄마가 축하를 못 해주겠네. 리리스에게 가 봐야겠어.”

“괜찮아요, 엄마. 당연히 리리스 데리러 가야죠.”

“응, 나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오세요.”

흔쾌히 대답하는 쌍둥이를 보며 웃은 오르디아가 뒤에 선 알렉세이에게 말했다.

“여보, 애들 부탁해.”

“걱정 마시죠, 아가씨.”

그리고는 급하게 다시 내려왔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나 공들여 화려하게 꾸민 차림.

아쉽지만, 살롱의 취지를 생각하면 이 모습 그대로 리리스를 데리러 갈 순 없었다.

“얘들아, 나 좀 도와주련? 치장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화려한 귀걸이를 빼며 오르디아가 말했다.

고민도 없이 조카를 선택한 멋진 고모를 보며 울먹이던 제티와 쥰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뒤를 따랐다.

“네, 그럼요!”

“바로 따르겠습니다!”

* * *

그 시각, 제국의 마탑.

“이건 또 뭐에 쓰라고 만들어서 가져온 쓰레기지?”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척, 올리고 거만하게 보고서를 살피는 마탑주.

“돈 줘, 때 되면 식사 나와, 몸 편하게 마법식만 연구하라는데 고작 결과물이 이거야?”

마탑주, 오스카 마뉘엘.

올해로 21세.

“오늘부로 그냥 짐 쌀래? 잘려야 정신 차리지?”

새파랗게 어린 놈이 싸가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전부 오스카보다 나이가 많은 마탑 연구원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인 상사랄까.

“다시 만들어 와!”

파라락―!

오스카의 손에서 날아간 수 장의 보고서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야근, 확정?

“마탑주님! 제발 오늘만은!”

서른다섯의 연구원, 카렌은 열네 살이나 어린 상사에게 비굴하게 두 손을 모았다.

“오늘은 정말 안 돼요! 진짜 빨리 가 봐야 해요!”

“…? 쓰레기를 싸 놓고 양심도 없지. 야근해!”

“재, 재택근무 안 될까요? 내일까지는 꼭 보고서 다시 만들어서 제출하겠습니다.”

악마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펜을 쥐며, 슬쩍.

책상 위에 있는 달력을 살폈다.

3/14

영 레이디 살롱.

기사 서임식.

마탑주의 달력인지, 어디 사는 귀족 아가씨 스케줄 표인지.

달력에는 오늘 말고도 리리스의 일정만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서임식 연회 못 간다고 앵앵거리더니 결국 살롱 갔으려나.’

하필 뒤늦게 나온 살롱 일정이 기사 서임식과 겹쳐 속상해하던 리리스가 떠올랐다.

“마탑주님, 제발 오늘만. 오늘만 선처해 주시면 앞으로 한 달 내내 야근하겠습니다.”

“와. 아직도 안 갔어?”

오스카가 여전히 앞에서 서성거리는 카렌을 노려보았다.

“부탁드려요. 저 오늘 딸 데리러 가야 해요.”

“딸? 딸 있어?”

“네. 모르셨나요….”

몇 년이나 같이 일했는데.

무심한 상사의 질문에 카렌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딸이 어디 갔는데 데리러 가?”

“오늘 제도에서 열리는 영 레이디 살롱이요. 첫날이에요.”

“……?”

흥미 없이 다시 책상을 향해 있던 오스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거길 왜 가?”

“네?”

“그거 익명 사교 모임 아닌가? 주최 측에서 사람 보내서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잖아.”

“…잘 아시네요?”

카렌이 놀랐다.

멈칫한 오스카가 헛기침하다가 이내 빽 소리쳤다.

“그러니까 거기를 왜 가냐고! 그 살롱이 왜 익명인데? 가문 소개도 안 하는 자리에 애를 데리러 가는 빡대가리가 어디 있어? 내 딸 이 집 딸이다, 알려주게?”

“네, 그렇죠….”

“뭐?”

“있는 가문 귀부인들은 좀 극성이라서요. 아무리 익명이래도 애들 기는 살려 줘야 한다고들 해요.”

“아니, 미친 거 아냐?”

오스카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오늘 살롱 간 애들 전부, 부모가 데리러 간다고?”

“엄마들이요. 아마 제가 아는 귀부인들은 거의 다 갈걸요.”

놀라서 멍해진 오스카를 보며 또 카렌이 간절히 손을 모았다.

“마탑주님, 부탁드려요. 친구들은 다 엄마가 데리러 왔는데 제 딸만 혼자 나와 봐요. 어린애가 얼마나 상처받겠어요? 그런 기억 평생 갈 거라고요.”

“아, 씨. 진짜!”

오스카가 벌떡 일어나 달력을 다시 살폈다.

3/14

영 레이디 살롱.

기사 서임식.

애 아빠인 에녹은 암만 봐도 못 뺄 스케줄이 잡혀 있는 날.

“아줌마들이 할 일도 없나!”

씩씩거리던 오스카는 고민도 없이 곧바로 겉옷을 걸쳤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려는데―

“마탑주니이임!”

―카렌이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놔놔놔! 이거 놔! 나 바빠!”

“저 보내 주세요….”

“그래! 가!”

“…정말요?”

“어, 가라고! 이거 빨리 안 놔?!”

“오, 감사합니다?!”

안도한 카렌은 곧, 금세 저 멀리 사라지는 오스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마탑주님은 어디 가세요!”

쾅―!

대답도 없이 오스카는 꽁지에 불붙은 새처럼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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