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른 아침, 리브르 공작저.
“흐아아암.”
반쯤 감긴 눈으로 늘어지게 하품한 악시온이 욕실로 들어섰다.
먼저 들어와 있던 체시어가 거울 앞에 서 있다가 돌아보며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오냐.”
부자는 욕실을 같이 쓰는 데 별 거리낌이 없는 편.
악시온은 익숙하게 소변기 앞에서 물을 빼며 졸음을 쫓았다.
‘…? 뭐 하는 거야.’
문득 그의 눈에, 난처한 듯 머뭇거리는 체시어가 보였다.
거울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손에 면도칼을 쥔….
‘아하.’
악시온이 웃었다.
“벌써 수염 나냐?”
바지춤을 정리하고 손을 씻은 그가 체시어의 손에 들린 작은 면도칼을 가져갔다.
“말을 하지, 녀석. 나 봐봐. 알려줄게.”
체시어와 마주 선 악시온은 새삼 기분이 묘해졌다.
날카로운 눈매와 깊어진 눈빛.
어느새 제 눈높이만큼 자란 체시어는, 몰라보게 얼굴선이 굵고 날카로워졌다.
“잘생겼네, 짜식.”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표정이 없다는 점이었지만.
‘그게 또 매력이지.’
이제는 이 무표정한 얼굴마저도 냉랭한 매력처럼 느껴진달까.
―생각하던 악시온은 흠칫했다.
방금, 조금 팔불출 같았다.
안 그래도 엊그제 “내 딸이 제일 예쁘다!”, “아니다, 내 아들이 더 잘생겼다!”―하며 옆집 딸 등신과 한참 입씨름하지 않았나.
에녹에게서 바보가 옮아버린 느낌이라 질겁해 놓고는, 또?
“흠흠.”
괜히 헛기침한 악시온이 체시어의 턱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너 그런데 연애는 안 하냐?”
“…….”
아들의 특징.
개소리에는 대꾸하지 않는다.
한결같은 반응에 악시온이 큭큭 웃었다.
“아니, 말 좀 해 봐. 너 이제 슬슬 애인 만들 나이라니까? 나 때는 말이야, 기사 서임 받을 때 벌써 애 아빠인 놈들도 있었다고.”
체시어의 잘생긴 얼굴에 감탄하는 이는, 비단 악시온만은 아닐 터.
집, 연무장, 전쟁터.
사교 활동도 없는 체시어의 행동반경은 딱 세 곳뿐이지만, 대체 어찌 소문이 난 것인지.
매일 집으로 날아오는 뭇 아가씨들의 수줍은 편지만 수십 통이었다.
물론 전부 읽힌 적 없다.
“집사가 네 덕분에 겨울에 땔감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더라.”
겨울에는 벽난로행, 다른 때는 쓰레기통행이다.
“음, 내가 너무 눈치 없었나.”
악시온이 웃음을 참으며 덧붙였다.
“하긴. 남매 될까 봐 아주 호다닥 에녹한테서 도망쳐 나한테 왔었지.”
“……?”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은데, 딴 애인 만들라고 하면 듣기 싫긴 하겠다.”
악시온의 말뜻을 이해한 체시어가 움찔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어어, 움직이지 마. 베인다.”
이내 정돈을 마친 악시온이―
“우리 마검사단장님.”
―체시어의 어깨를 붙잡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정식 기사가 되시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체시어가 작게 따라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 * *
제도의 국립 갤러리, 비지터 홀.
옥타바부터 디에즈까지의 능력자들이 모여 갖는 사교 모임, ‘영 레이디 살롱’이 열리는 장소.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들이 고급스러운 원탁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귀여운 인상의 갈색 단발 소녀가 들고 있던 도화지와 펜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소녀의 손목에 달린 이름표에는 ‘라라’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가명이다.
익명제인 살롱에서는 전부 가명을 쓰니까.
“제임스… 양? 남자 이름이네요?”
라라가 내 이름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네, 가명이니까요. 제일 좋아하는 사람 이름으로 했어요.”
“앗, 그렇구나. 아빤가?”
오, 예리한데.
나는 그냥 웃었다.
“저는 열네 살, 라라예요. 제임스 양은 열한 살이라고 했죠? 계속 보고 있었어요. 아까부터.”
“네? 저를요?”
“네, 친해지고 싶어서. 왜냐하면, 너무 예뻐서요. 있죠, 인형처럼 생겼다는 말 들어본 적 있죠? 전 처음에 제임스 양을 보고 우와! 사람이야, 인형이야? 헷갈렸는데, 제임스 양이 말을 할 수 있으니까 그때 아! 사람이구나, 했다니까요?”
“……?”
나는 와다다다 뱉는 라라의 말에 멍해졌다.
‘…뭐지? 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현란한 주접은?’
“제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미인이에요. 정말, 정말, 정말로 놀랐어요.”
라라는 진심인지 자꾸 감탄사를 터뜨리며 내 얼굴을 뜯어봤다.
물론 우리 집 주접 대마왕 제임스 브라운 씨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어색해라.’
아빠 말고 타인에게 듣는 칭찬은 면역이 잘 안 생기는 편이었다.
“으음, 아니에요. 라라 양이 훨씬 더 예쁜걸요.”
“대체 이렇게 예쁜 사람을 내가 왜 몰랐지? 제도 사는 친구들 얼굴은 거의 다 아는데 말이에요.”
라라는 내 칭찬은 간단히 무시한 채 물었다.
“으음, 내가 몰랐으면. 제임스 양은 그러니까… 디에즈, 겠죠?”
어허, 위험.
나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붙였다.
“여기서 계급 말하면 안 돼요.”
“아아, 그렇죠.”
멋쩍은 듯 웃은 라라가 이내 발을 휘휘 굴렀다.
“조금 지루하지 않아요? 솔직히 친구들 아무도 안 간다는 거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왜요? 사람들 많이 안 와서요?”
초대를 받은 아가씨들은 오십 명이 넘지만, 오늘 살롱 참석자들은 고작 스물네 명.
심지어 이중 절반 이상은 디에즈들일 것이다.
‘하위 계급이라고 해도…. 그 사이에서 또 낮은 계급이랑은 겸상하기 싫은 거겠지.’
별수 없는 일이다.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음, 그래도 오늘은 첫날이잖아요. 살롱이 더 유명해지면 점점 많이들 오겠죠.”
“그렇겠죠? 루빈슈타인 공녀도 한 번은 얼굴 비치려나?”
라라의 말에 나는 흠칫 굳었다.
“알죠? 루빈슈타인 공녀도 옥타바잖아요. 사실 오늘 여기 온 거, 공녀 얼굴 볼 수 있나 해서였거든요.”
“그, 그렇군요….”
익명 모임의 취지는 오간 데 없이 나를 찾으려 하다니.
‘힘을 숨겨서 다행인가.’
은발에 푸른 눈은 너무 튀기도 했고 소문도 날 만큼 났다.
그래서 오늘 나는, 제임스 브라운 씨처럼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로 꾸미고 와 있었다.
허리까지 기른 동글동글 웨이브 머리에 단정하게 찬 머리띠.
내 또래 여자아이들 열에 아홉이 하고 다니는 스타일이라 안 튈 수 있었다.
“제임스 양, 그림 그리는 거 재미있어요?”
“아아, 네.”
라라는 무심코 펜을 놀리던 나를 보고 물었다.
사교 모임은 별거 없었다.
어린 아가씨들 취미대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그러면서 서로 대화하고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라라 양도 그림 보여주세요!”
“그럴까요?”
나는 라라가 내민 도화지를 보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못 그려서? 아니.
‘누군지 너무 잘 알겠다.’
라라의 솜씨는 제법 훌륭했다.
반짝이는 붉은 눈, 오뚝한 코, 굳은 입매.
훤칠하게 그려 놓은 남자 얼굴.
“리브르 공자님이죠?”
백 퍼센트, 체시어다.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
“라라 양이 그림을 잘 그려서요. 그리고 뭐, 리브르 공자님은 인기가 엄청 많으니까요.”
그래, 그의 인기는 가히 하늘을 찔렀다.
최상위 계급, 도스.
리브르 공작 가문 유일한 후계자.
유례없는 전공을 세운 소년병.
체시어는 그간 마수 토벌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전공만 수십 개 넘게 세웠다.
그래서 관례와 달리 열다섯에 정식 기사 서임을 받게 됐고….
‘심지어 마검사단장!’
함께 서임을 받는 마검사인 레온 오라버니도 제치고, 단장 배지를 달게 될 예정이시다.
4년 전, 성수 사태로 인해 마검사들이 전멸한 뒤 내내 공석이었던 단장 자리가 오늘 채워지는 거다.
‘주인공 능력치 대단하다, 대단해. 대체 누가 열다섯 살에 군단장이 되겠어?’
우리 아빠도 단장직은 열여섯에 달았는데 말이다.
“제임스 양도 리브르 공자님 얼굴 본 적 있나요?”
“아아, 네에. 어쩌다 보니.”
“정말 멋있죠? 저는 그렇게 생긴 사람 처음 봤어요….”
물론 체시어의 인기, 그 팔 할은 얼굴 때문이었다.
체시어는 갈수록 잘생겨졌다.
정말정말 잘생겨졌다.
자주 보는데도 매일 새롭게 느껴진달까.
‘키라도 좀 천천히 컸으면….’
걔는 키도 너무 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좀 속상했다.
지금 내 키는 145cm.
나도 열심히 능력을 쓰며 나이에 맞춰 성장했는데.
그래도 체시어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어서, 이제 나란히 서면 덩치 차이가 꼭 아빠랑 딸 같았다.
저번에 산책하다 발이 아파서 안아 달라고 했는데, 집에 와서 그 모습 그대로 거울을 보니.
“이, 이게 뭐야! 다른 사람이 보면 우리 이렇게 보여?”
“…왜.”
팔에 앉혀진 꼴이 정말 딱, 아빠에게 안긴 딸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신님.’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체시어 키 좀 제발 그만 크게 해 주세요.’
* * *
“야, 오늘 재 봤냐? 재 봤어?”
“…어, 182.”
“아, 젠장!”
레온이 분한지 주먹을 꽉 쥐었다.
체시어는 한 달 전보다 그새 1cm 더 컸다.
이대로면 하늘도 뚫을 기세다.
“레온 앙트라세 경, 차례가 왔으니 대전으로 들어 주십시오.”
그때, 시끄러운 레온에게 의미 없는 눈치를 주고 있던 황실 기사가 옳다구나 말했다.
서임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마지막 순번의 둘이었다.
“후우, 이 형은 먼저 가 보마.”
“그래.”
육중한 대전의 문이 열렸다.
체시어는 일부러 안쪽으로 눈을 두지 않으려 하며 숨을 골랐다.
다시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진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떨리네.’
정식 기사가 되는 것이?
서임을 받는 것이?
아니.
“체시어 리브르 경, 대전으로 들어 주십시오.”
몇 분의 기다림 후, 체시어는 열린 문 앞에 섰다.
금과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빛이 나는 화려한 대전.
붉은 융단 끝에 그가 있었다.
황제,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
‘드디어.’
체시어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
‘만났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은 끝내 그를 황제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황제는 아름다웠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젊고 고귀해 보였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 가죽 아래 추악한 이면을 숨기고.
“……?”
서임 명장을 펼치려던 황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곧바로 부복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기사가 의아해서였다.
첫 대면.
체시어는 심장이 가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 끓어오르는 피.
온몸이 전율한다.
손에 칼을 쥔 이후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황제, 눈앞의 이 거대한 존재를 죽이는 것.
너의 날개를 꺾어 쥐려 하는 저 더러운 손을 자르고.
너의 옷자락을 잡으려 뒤를 쫓는 두 다리를 박살 내고.
끝내, 숨통을 끊어놓는 것.
“신하, 체시어 리브르가….”
체시어는 가슴속에서 격동하는 감정을 애써 숨기며 황제의 앞에 무릎 꿇었다.
나의 천사를 위해,
죽여 없애야 할 악마.
“…위대하신 프리메라의 검이 되기 위하여 왔습니다.”
악마의 검이 아닌, 천사의 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