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복한 체시어의 앞에서 황제가 서임 명장을 펼쳤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어린 기사가 세운 수많은 전공들이 흘러나왔다.
“……1779년 중부 위르겐 성수 사태 활약의 공, 1780년 겔다 영지 마수 토벌전, 소년병장으로서 발군의 전략을 세운 공…….”
그때.
관례에 따라 대전의 양쪽에 도열하여 서임식을 참관하고 있는 군단장들.
그 사이에서, 에녹은 황제와 체시어의 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와, 진짜 대단하다.”
조그맣게 감탄하는 목소리.
상념에 빠져 있던 에녹이 옆을 보며 슬쩍 웃었다.
오늘 성기사로 임명된 조카, 테오.
그는 에녹의 바로 옆에 서서 함께 체시어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너도 대단해.”
에녹이 제 어깨로 테오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저는 서임 명장에 전공 네 줄이 끝인걸요. 체시어는 끝나질 않아요.”
“네 줄도 엄청난 거야.”
칭찬에도 시무룩해하는 테오의 등을 두어 번 쳐 격려하며 에녹이 말했다.
“나중에 삼촌 자리는 네가 가져가야지. 너만 한 인재 없다.”
“으으,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둘은 다시 대전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이상, 신하 체시어 리브르에게 중부 필로소의 땅, 남부 에렌의 땅, 기사 남작위(位)의 품, 귀족 자작위의 품을 내리며.”
낭독을 마친 황제가 명장을 접어 체시어에게 건네고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검을 올리며 선언했다.
“위대한 파빌리온 제국의 도스군 마검사단장으로 임명하는 바이다.”
* * *
황궁, 파우더룸 앞 복도.
“이야.”
벽에 기대어 체시어를 기다리고 있던 레온이, 몸을 세우며 감탄했다.
테오도 꾸미고 나온 체시어를 보며 놀라서 웃었다.
“…….”
깔끔하게 넘긴 검은 머리.
그와 상반된 백색 연회복이 큰 키에 딱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진짜 멋있다, 체시어. 너 오늘도 레이디들한테 편지 백 통은 받겠는걸?”
“너 솔직히 말해라. 구두에 깔창 넣었지? 왜 키가 더 커 보이냐?”
과연 황실 시종들 솜씨랄까.
연회장에 들어서면 체시어에게 쏠릴 시선들이 벌써부터 예상됐다.
“빨리 가자.”
체시어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를 뒤따르며, 테오가 웃었다.
“뭐야,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서둘러? 연회 기대돼?”
기사를 우대하는 제국 황실.
하여, 서임식 연회는 매우 크고 화려하게 준비된다.
이때 초대받은 가문의 가주들은, 기사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제 여식들을 전부 데려오는 편이었다.
갓 서임을 받은 어린 기사들은 곧,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니까.
“오호라, 짜아식. 너도 남자라 이거지?”
아마 연회장에는 한껏 꾸민 레이디들이 넘쳐날 것이다.
“뭐래. 리리스 기다리니까.”
그러나 체시어는 놀리는 레온의 말에 간단히 대답하고 계속 걸음을 빨리했다.
“앗! 체시어, 잠깐. 너 몰랐어?”
테오가 당황하며 웃었다.
“오늘 리리스 연회 안 와. 살롱 갔거든. 살롱 날짜가 늦게 잡혀서 사실 우리도 어제야 들었긴 해.”
“…….”
테오의 말에, 거의 달려가듯 연회장으로 향하던 체시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 *
그 시각.
제국 마탑 영재관리부서의 장이자 마탑주의 보좌관, 로베르트 퀀.
이하 로벨, 서른 살의 청년은 은색 안경을 추어올리며 제 눈을 의심했다.
‘이게… 맞나?’
아름다운 흑마 네 마리가 이끄는 화려한 사두마차.
최고급 옷을 차려입고 손에는 보석 반지를 주렁주렁 단 마부가, 말고삐를 쥐며 헛기침했다.
돈지랄, 그 자체!
말고삐에까지 촘촘히 박혀 번뜩이는 것은 다이아 되시겠다.
‘정말… 맞아?’
로벨은 마부와 눈이 마주치고 서로 민망한지 허허 웃었다.
강제로 꾸며진 마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
“야, 빨리 타! 늦었어!”
마차 안에서 신경질적인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건 아니야. 말려야 해. 나는 모시는 분의 품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로벨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마탑주님.”
“늦었으니까 타서 얘기해라.”
“아뇨, 제발. 안 탈래요. 재고해 주세요. 마탑주님이 어린 아가씨들 살롱에 왜 가시죠?”
“아줌마들이 다 간다잖아!”
“네! 그분들은 거기에 딸이 있으니까요. 따님들 마중 나가는 거죠. 그런데 마탑주님은? 거기 누가 있죠?”
“애 아빠 오늘 거기 못 간다고 내가 말했지.”
여기서 말하는 ‘애’는 루빈슈타인 공녀, 리리스다.
“그것참 아쉽게 됐네요. 그런데 그게 마탑주님이랑 무슨 상관일까요? 아니, 상관이 있다 쳐도 제발. 진심으로 그 꼴을 하고 가시려고요?”
“…왜. 내 꼴이 뭐. 이상한가?”
조금 전까지 빽빽 소리치다가 금세 걱정하는 목소리.
그에 멈칫한 로벨이, 마차 타기 전 봤던 오스카의 모습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흠, 뭐. 이상하진 않아요. 솔직히 멋지긴 해요. 맨날 마탑에만 틀어박혀서 퀭하니 폐인처럼 지내시던 분이 정말 오랜만에 멀쩡해 보이시긴 하는데….”
“너 뭐라 했냐.”
“그런데 이미지! 제발, 이미지 생각 좀 하셔야죠! 무려 마탑의 주인 되시는 분이 위엄도 없이 무슨 어린애들 살롱에 마중을…, 아. 진짜 아냐, 이건 아냐.”
“어차피 나 마탑주인 거 말 안 하면 아무도 못 알아봐.”
“하, 또 그것도 그렇긴 한데.”
워낙 신비주의시니.
“그래도 와중에 얼굴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아이 씨, 진짜! 얼른 타라고, 좀! 대체 그놈의 주둥이는 어디까지 길어질 셈이냐?!”
“맞다! 그래요! 가서 뭐라고 하게? 누가 공녀님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뭐라 하실 거예요?”
“…….”
“할 말 없지! 대체 마탑주님이 그 댁 따님의 뭔데요! 당신이 뭔데! 뭔데 거기에 가!”
“…아빠라고 하지, 뭐.”
“뭐라고요?!”
로벨이 입을 떡 벌리고 놀라다가 이내 쯧쯧 혀를 찼다.
오스카의 이해할 수 없는 리리스 사랑은,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로벨이 제일 잘 알았다.
“마탑주님, 마음은 알지만. 애가 갖고 싶으시면 밖에 나가서 여자를 만나고 결혼을 한 뒤에 힘을 쓰세요. 애먼 남의 집 딸 홀라당 들고 튈 생각 마시고요.”
“와, 진짜 말 더럽게 많네. 마부, 그냥 출발해. 저 촉새 버리고.”
“잠깐, 잠깐! 안 돼!”
그건 또 안 될 말이지!
“저도 데리고 가요, 알았어! 으아아아!”
로벨은 결국, 울면서 마차 문을 열었다.
* * *
“그런데 제임스 양은 뭘 그렸나요?”
살롱이 한참 진행되는 갤러리.
라라는 내가 정말 마음에 드는지 옆에 꼭 붙어서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아, 제 그림이요?”
나는 완성된 내 그림을 보았다.
‘손도 커지고 나이도 열한 살이나 됐는데 왜 그림 실력은 안 늘까?’
지붕도 있고, 사람 모양도 있고.
누가 봐도 화목한 가족인데 굳이 뭐냐고 묻는 걸 보면, 알아보기 힘든 모양.
역시 예체능은 재능의 영역인 게 분명했다.
“가족이에요.”
“앗! 그렇구나…. 그럼 이게 사람이었군요? 정말 솜씨가 좋아요.”
라라는 당황하며 말했다.
‘착하네.’
내가 민망해할까 봐 일부러 칭찬해 주는 걸 보니 라라는 괜찮은 아이 같다.
“그런데 가족이 참 많네요. 누가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네!”
나는 친절하게 도화지를 펼쳐서 라라에게 하나하나 설명했다.
“가운데 이건 저구요. 왼쪽은 아빠, 그리고 오른쪽은 스승님.”
“아빠! 그러면 제임스 씨겠네요?”
“아하하, 네에! 또 여기는 할아버지구요, 빨간 지붕 아래 요기 두 명은 오라버니들. 여기는 고모랑 고모부고….”
“오빠도 있구나! 좋겠다. 전 동생뿐인데.”
“오라버니들 다 멋있고 착해요.”
“부러워요. 가족 진짜 많다. 그럼 이 지붕 아래에 있는 두 명은 누구예요?”
라라는 마지막 파란 지붕 아래 두 개의 사람 모양을 가리켰다.
그건 악시온과 체시어였다.
“삼촌 집이에요. 이거는 삼촌이고 얘는….”
체시어를 가리키다 나는 슬쩍, 라라 눈치를 봤다.
까맣게 칠한 머리카락에 눈이라고 찍어 놓은 두 개의 빨간 점.
혹시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얘는, 얘는 남자 사람 친구….”
라라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헉. 설마 알아봤나? 내 그림 솜씨가 제도 최고의 인기남 정도는 다들 알아보게 묘사할 만큼 발전했다든지?’
콩콩콩.
긴장 반, 기대 반.
그러나, 라라는 왜인지 머뭇거리더니 조심히 물었다.
“엄마는 왜 없어요?”
“아.”
그렇구나. 그려진 사람들을 전부 소개했는데 엄마가 없어서.
그게 이상했던 거구나.
‘에이, 나 바보다. 다른 애들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대충 그려놔야지.’
나는 급하게 머리가 긴 여자 사람 모양을 하나 그려 넣으며 허둥지둥 말했다.
“…사실, 엄마는 안 계세요. 그래서 깜빡했어요.”
“네?”
라라가 놀랐다.
“따로 사는 거예요?”
“아니요…. 그냥 안 계세요.”
엄마를 떠올리는 건 굉장히 괴로워서 나는 그냥 얼버무렸다.
“미, 미안해요. 전사하셨나 봐요. 자꾸 물어봐서….”
전사? 나는 멈칫했다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나라는 가족 중 누군가 없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전장에서 죽은 줄 아니까.
“정말 미안해요….”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미안해하는 라라를 위해, 도화지 위에 그림을 마저 그리며 정정해 줬다.
“돌아가신 게 아니라, 그냥….”
4년 전, 자각몽을 꾸고 난 후.
나는 일부러 엄마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냥….”
사라진 시간.
‘그거 이제 다 없는 일인데.’
그러니까 엄마를 원망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데….
그럼에도 내 성격이 모나서인지 가끔씩 울컥, 엄마가 미웠다.
물론 나쁜 건 황제지만….
그래도 엄마가 날 조금만 생각해 줬다면.
아들인 카일만큼이라도 나를 불쌍하고 예쁘게 여겨 줬다면.
그럼, 어쩌면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미 없는 가정 때문에.
엄마가 날 황제에게 넘기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처럼 황제에게 잡히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면.
‘그랬으면, 그랬으면….’
“내가 꼭 아빠 만나게 해 준다고 했잖아.”
오스카가 시간을 돌릴 필요도, 그 대가로 무거운 족쇄를 달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냥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안 계셨어요. 그래서.”
나는 또 울컥 치민 감정을 내리누르려고 빠르게 말했다.
“그래서 얼굴도 몰라요.”
그림을 그리던 손도 빨라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 제임스 양….”
“…정말 괜찮아요. 저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있지도 않은 엄마 그림을 그려놓고는, 당황한 라라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