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우리 다른 이야기 할까요?”
라라는 뭔가 이상해진 나를 알아봤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래, 다른 생각….
“제임스 양도 리브르 공자님 얼굴 봤댔죠? 제임스 양은 공자님 어디가 제일 좋아요?”
“네?”
라라는 체시어를 그린 자기 도화지를 내 도화지 위에 가리듯 엎어 놓고 물었다.
급하게 화제를 돌리려다 보니 영 생뚱맞은 곳으로 튀는걸….
“어, 얼굴을 본 적 있다고 했지 좋다는 말은 안 했는데….”
“헉! 그래요?”
물론, 우리는 아주 친하고 당연히 나는 체시어를 좋아하지만….
“으흠. 저는 공자님 실물, 사실 네 달 전에 처음 봤어요. 요 앞 거리에서 승전 행진했을 때요. 혹시 제임스 양도 그때 봤나요?”
“아아, 맞다! 음, 전 그때 본 건 아니지만. 맞아요, 그때 대단했죠.”
난리가 났었지.
굉장히 규모가 큰 마수 토벌이 있었고, 그래서 황명이 내려와 따로 승전 행진을 했었는데.
웬걸. 귀족들까지 집 밖으로 다 튀어나와서 인산인해였다.
나는 제도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사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니까.
“잘생겼다고 하도 유명해서 뭐 얼마나 잘생겼겠어? 하고 나가본 거였는데….”
라라는 체시어를 떠올리는지 침을 꼴깍 삼키고 덧붙였다.
“…정말 잘생겼더라구요.”
“네, 그쵸.”
나는 뭔가 기분이 묘해져서 헤벌쭉해진 라라의 표정을 계속 봤다.
라라만 이러는 거 아니다.
체시어가 말을 전혀 안 해서 몰랐는데, 일전에 악시온이 우리 집에 와서 아빠한테 하소연인 척 자랑할 때 듣기로는….
“하아, 요즘 나랑 우리 집사랑 아주 골머리 앓는다. 체시어한테 오는 여자애들 편지만 하루에 수십 통이 넘어. 어떻게 처리하지? 겨울에 땔감 없으면 우리 집 와서 좀 가져갈래?”
“아하하하! 웃기고 있네, 진짜. 저 거만한 표정 봐. 누가 보면 지가 받은 줄 알겠네. 하하하하!”
아빠는 분해 보였다.
웃으며 이를 갈다가, 우리 딸이 사교계 데뷔만 하면 체시어의 인기쯤은 씹어먹을 거라고 난리를 쳤지.
하지만 데뷔탕트를 치르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도 아마 내가 체시어의 인기를 앞지를 일은 없을 것이다.
걔가 괜히 주인공이겠냐고.
“저는 리브르 공자님의 표정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네?”
나는 라라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웬 표정? 체시어가 표정이 있나?
“표정 없는 그 얼굴. 세상의 모든 일에 초연한 듯한 그 무심한 눈빛과 냉랭한 분위기!”
꿈꾸듯 손을 모으며 감탄하는 라라.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 별….’
표정이 없는 게 매력이라니.
그냥 잘생겨서 좋은 거 아니냐고.
* * *
레온은, 체시어의 표정 없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회에 리리스가 안 온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선 체시어.
‘나는 이제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구분할 수 있지.’
4년 내내 소년병으로 동고동락한 전우.
레온은 이제, 남들은 절대 모르는 체시어의 무표정을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체시어의 눈은 제법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건 기대하는 표정이었지.’
그리고 지금은, 연회장에 가 봤자 리리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입이 미세하게 열려 있는데.
‘이건 당황하는 표정이고.’
체시어는 곧, 입을 다물고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지만, 자세히 보면 평소보다 눈이 가늘다.
‘이 표정은 실망했을 때지.’
물론 모르는 사람들이 겉으로만 보기엔 다 똑같은 무표정이다.
이 정도면 체시어 감정 판독기 배지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레온은 뿌듯하게 쓱, 코를 훔쳤다.
“그럼 그냥….”
체시어는 슬그머니 발을 돌렸다.
“응, 그럴 줄 알았다.”
레온이 재빨리 테오에게 손짓했다.
“야, 테오. 잡아.”
“응.”
둘은 범죄자를 연행하듯 체시어의 팔을 하나씩 단단히 잡았다.
“…뭐야.”
“설마 꼬맹이 없다고 연회 안 가고 집에 가려던 건 아니었지? 네가 그렇게 생각 없는 놈은 아니길 바라.”
“…….”
레온의 말에 체시어가 입을 다물었다. 긍정이다.
“그건 정말 안 돼, 체시어.”
테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주인공 없는 연회가 말이 돼? 너, 이러면 악시온 경 얼굴에도 먹칠하는 짓이야.”
매우 이성적인 테오의 판단.
악시온의 이름이 나오자 체시어는 그제야 멈칫했다.
“…알겠어.”
결국, 별수 없이 체시어는 쌍둥이에게 질질 끌려 연회장으로 향했다.
* * *
살롱이 끝나고 밖에 나왔을 때.
‘이거 실화야?’
나는 기함하고 말았다.
“엄마아아!”
“우리 이쁜 딸, 살롱 괜찮았어?”
휘황찬란하게 차려입은 귀부인들.
“엘리! 엄마 여기 있어요!”
“엄마!”
교통 체증을 일으킬 만큼 갤러리 앞에 북새통을 이룬 마차들.
살롱의 어린 아가씨들은 생각지도 못한 엄마의 마중을 기뻐하며 달려나갔다.
‘아니, 이게 대체 뭐야….’
몇몇 귀부인은 이미 안면을 트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와중에도 꿀리지 않으려는지 할 수 있는 최대한 화려하게 꾸민 모양새들이었다.
‘와, 완전 엉망이 됐어. 이러면 익명 사교 모임의 의미가 없잖아.’
나는 좌절했다.
조제프 아저씨가 이 ‘익명 살롱’을 고안한 이유가 뭔데.
아직 뭘 모를, 자라나는 새싹들이 계급의 구분 없이 섞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중에는 천천히 통성명도 하게 되겠지만, 그 전에 친해지면….
‘망했어! 망했다고!’
한데 귀부인들이 전부 마중 나옴으로써, 살롱 첫날부터 다들 어느 집 딸들인지 대놓고 밝혀지게 됐다.
“엄마, 엄마! 여기는 오늘 친해진 제임스 양이에요!”
그때, 라라가 자기 엄마 손을 끌고 내게 왔다.
“반가워요, 제임스 양.”
“아! 안녕하세요.”
나는 라라 엄마에게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혼란한 상태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나는 마리안느 쥘럿이에요. 쥘럿 부인이라고 부르면 돼요.”
“아아, 하하. 네에.”
쥘럿이라면 들어본 적 있는 자작 가문의 이름.
라라…. 쥘럿 자작 영애셨군….
익명의 의미가 사라진 살롱을 어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한데 제임스 양 어머니는 어디 있나요?”
쥘럿 부인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라라가 쥘럿 부인의 치맛자락을 잡고 어색하게 웃었다.
“제, 제임스 양은 오늘 어머니 안 오셨을걸요.”
“어머, 그래요?”
“하하. 네에….”
눈치 빠르게 에둘러서 말해주는 라라가 고마웠다.
“음, 그럼 오늘 주최 측 마차를 타고 귀가하나요?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서 클라라랑 더 얘기 나누다 가지 않겠어요?”
“네?”
“앗! 제임스 양, 그럴래요?”
라라, 아니.
“아하하. 근데 엄마가 먼저 내 이름을 말해 버렸네. 저는 클라라 쥘럿이에요.”
클라라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딸을 마중 나온 엄마들은 태반이 좋은 가문일 터.
한데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나는 딱 봐도 디에즈 같을 텐데….
금세 흥미를 잃을 줄 알았던 쥘럿 부인은 의외로 상냥하고 다정했다.
‘흠, 나쁘지 않은데?’
역시 계급제 꼭대기에 계신 고위 귀족들과는 다른, 인간미가 느껴진달까.
‘익명제가 무색해져도 사교 모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지도?’
어쩌면 우리의 똑똑한 브레인, 책사 조제프 아저씨는 이런 결과까지 다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초대에 응해볼까?
고민하던 찰나.
“우, 우와.”
“뭐야? 누구야?”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렸다.
모여있던 귀부인과 딸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쫙 갈라지고―
“와, 진짜 멋지다.”
―내 옆에 있던 클라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뭐지?
슬쩍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오, 대박.’
가장 처음 보인 건 번쩍, 광이 나는 검은 구두였다.
그리고 긴 다리에 매끄럽게 각이 잡힌 정장 바지.
늘씬한 몸에 착 달라붙은 블랙 수트 차림이 일품인….
‘참, 나. 엄마 부대 사이에 이번엔 아빠의 등장이신가.’
나는 좌중을 압도한 남자의 아우라만 대충 파악하고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극성인 아빠인 거지?
셔츠 팔목에 달린 커프스 링크며 블랙 베스트의 단추 전부 번뜩이는 금장.
‘아니, 크라바트에 달린 건 또 뭐야? 다이아인가? 크기 봐라….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아주 대놓고 ‘나 돈 좀 있다!’ 과시하며 딸을 데리러 온….
“……?”
쯧쯧 혀를 차던 나는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뭐지?
어디서 많이 본….
“잠시만요.”
남자의 뒤로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검은색 반코트까지 어깨 위에 척, 둘러 줬다.
그런 에스코트가 당연하다는 듯 남자는 거만하게 고개를 꺾으며 검은 장갑 끝을 매만졌다.
“와, 와….”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이야. 진짜 이건, 바로 못 알아볼 만했다.
항상 손질도 안 하고 다니던 하얀 머리를 힘주어 쫙 뒤로 넘기기까지 해서.
‘대, 대체….’
남자는 입을 떡 벌린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왜, 왜….’
주변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런웨이 위의 모델 같은 그의 걸음을 주시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내리비치는 듯한 착각.
‘스승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
그래, 오스카였다.
아니, 이게 진짜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