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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46)화 (147/261)

얼이 빠진 내 앞까지 다가온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눈만 슬쩍 굴려 클라라를 봤다. 그녀의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아버지예요, 제임스 양?”

“저, 젊으신데 오라버니가 아닐까, 클라라?”

쥘럿 부인이 정정해 줬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일단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불행 중 다행일까? 아무래도 여기 모인 이들 중 마탑주 얼굴을 알아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오스카가 워낙 마탑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신비주의이기도 하고, 그의 얼굴을 알 정도라면 상당한 고위 귀족이어야 하니까.

‘좋아! 그렇다면 오라버니? 삼촌? 마탑주라고 말할 순 없잖아? 나 뭐라고 수습하지?’

재빨리 머리를 굴리려는데,

“아니에요, 엄마! 아까 제임스 양이 아버지 얘기도 해 줬는데, 되게 젊고 멋지다고 했어요. 아버지 맞죠? 그러니까… 이분이 제임스 씨?”

흥분한 클라라의 물음에 순간 머―엉.

“아아, 네에. 아버지… 아, 아버지 같은, 아버지 같은 분이에요….”

바보야! 결국, 나는 멍청이 같은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입을 삐죽이며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 오스카를 노려봤다.

“연락도 안 하시구….”

“응? 뭐라고 했어?”

오스카가 대번에 무릎을 굽히고 내게 귀를 기울였다.

“어머.”

“우와.”

마치 딸 얘기를 들어주는 다정한 아빠 같은 그 모습에, 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우리를 감싸는 이 화려한 조명은 대체 언제 꺼지지?

나는 울고 싶어져서 오스카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게 뭐예요! 살롱 왜 익명인지 몰라요, 스승님?”

“알지. 근데 이 아줌마들도 다 딸 데리러 왔잖아. 너, 나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여기서 마차 태워주거든요?”

“그래서 안 반갑다 이거야?”

“…아뇨. 그건 아니구.”

사실, 이러면 안 되지만.

다들 엄마 손 잡고 있는데 나만 혼자 있는 기분이 좀 묘해서, 아주 살짝 반갑긴 했다.

“흠흠. 데리러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아, 스승님.”

수줍게 대답하자 오스카가 또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일어났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때였다.

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거물이 등장하셨나?

차라리 지금 나와 오스카에게로 쏠린 시선을 가져가 줄 극성 중의 극성 귀부인이라면 좋겠는데.

“와, 신이시여.”

…거물이긴 했다.

그것도, 여기 모인 귀부인들이 그 얼굴을 전부 알아볼 정도로.

“아, 앙트라세 공작 부인 아냐?”

“세상에! 저분이 여길 왜…?”

고모.

그래, 고모였다….

‘고모는 대체 왜? 오늘은 쌍둥이 서임식 연회도 있는데?’

도저히 내 빈약한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돌발상황들이 1초 간격으로 벌어지는 와중.

“뭐야. 네 고모가 데리러 오기로 했었어?”

당황한 오스카가 마차에서 내린 고모를 보며 말했다.

그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말했지만….

“……?”

“……!”

운명의 장난일까?

분명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어째 묘하게 그의 입이 열릴 때 조용해지는지.

목소리가 선명하게 주변을 울렸다.

고모가 데리러 오기로 했었어?

고모가 데리러….

고모가….

그래서 모두 듣고 말았다.

사람들 전부, 빠질 듯이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 진짜 망했다.’

오스카야 어찌어찌 수습해도 고모는 안 된다.

현시점 제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귀족 여성이자 사교계의 중심!

아름다운 미모와 기품을 자랑하는, 귀부인들 선망의 대상 1위니까!

“제, 제, 제임스 양. 아, 앙트라세 공작 부인이 고모면, 그러면….”

클라라가 덜덜 떨리는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제도 고위 귀족, 유명 인사의 가족 관계쯤은 거의 공공재이니 모를 리가 없지.

“히이이익!”

클라라가 두 손으로 자기 입을 꽉 틀어막았다.

“르븐스트은 긍느!”

루빈슈타인 공녀!

그래!

그냥 이제 다 알아라, 알아!

숨길 의지도 없어졌다!

“어머나?”

고모는 나를 발견하고 오려다가 옆에 있는 오스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고모도 잠시 뇌 정지가 온 표정이었다.

“흠.”

“…….”

멋쩍은지 헛기침하며 슬쩍 눈을 피하는 오스카를 보고, 고모의 푸른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둘 다 뇌 정지 상태다!

“…선생님이, 와 주셨구나?”

먼저 당황을 감춘 고모가 말했다.

그건 오스카의 이미지를 지켜주기 위한 빠른 판단이었다.

내일 아침 신문에 ‘마탑주, 갑자기 아가씨들 살롱에 등장한 이유는?!’ 따위의 헤드라인이 걸리지 않도록!

“하하, 익명 살롱이었는데 귀부인들이 이리 많이 보일 줄은 몰랐네. 다들 반가워요.”

고모는 재빨리 자기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몇몇 귀부인이 다가갔고, 고모는 상냥한 웃음과 함께 그들에게 둘러싸였다.

일단 다행인가?

그때.

전부 고모에게 관심이 쏠린 와중, 나는 혼자만 놀란 표정으로 오스카를 쳐다보는 한 귀부인을 발견했다.

‘뭐지? 저 표정은…!’

저건 백 퍼센트, 오스카를 알아본 얼굴이었다!

“스, 스승님. 저기 저분이 스승님 알아본 것 같지 않아요?”

당황해서 오스카의 손을 잡았는데 그도 그 귀부인을 본 모양.

오스카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목 긋는 시늉을 하며, 입만 움직여―

‘아는 척하면 모가지다.’

―라고 협박했다.

세상에나! 표정하며 말본새까지 싸가지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대충 봐도 저 귀부인은 오스카의 이모뻘인데!

“스승님! 예쁜 말 좀 써요!”

“아, 직장 동료야!”

질색하는 내 표정을 봤는지 오스카가 투덜거렸다.

직장 동료라면 마탑 연구원쯤 되는 모양.

아무리 부하직원이라도 그렇지, 나이 많은 귀부인인데….

‘아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뭐.’

황제 앞에서도 목 뻣뻣한 오스카 아닌가.

오히려 나한테 잘해 주는 모습이 신기한 것이다. 저 귀부인의 입이 떡 벌어진 이유겠지.

“거기서 뵈어요, 후후.”

“엘리, 얼른 가자꾸나!”

그때 고모 주변에 모여 있던 귀부인들이 함박웃음과 함께 딸 손을 잡고 각자 마차에 올라탔다.

“제, 제임스 양! 아니, 루빈슈타인 공녀! 나중에 또 봐요!”

“아아, 네!”

클라라도 내게 인사하고 엄마인 쥘럿 부인을 따라 떠나갔다.

왜인지, 질세라 빠른 걸음들.

어떻게 했는지 순식간에 모인 눈들을 처리한 고모가 다가왔다.

“휴, 리리스.”

“고모!”

나는 달려가 고모의 허리를 잡고 안겼다.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 오빠들 서임식 안 가셨어요?”

“귀부인들이 다 살롱에 딸 데리러 간다고 하지 않니. 너 혼자 나오면 서운할까 봐.”

“으아. 전 괜찮은데.”

감동….

“다들 같이 식사하면서 더 친해지기로 했단다. 고모도 가야 해. 이대로면 살롱 연 의미가 없으니까.”

“아! 그렇구나.”

고모는 다 죽어버린 익명 살롱의 취지를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모양이었다.

역시 주인공의 남매답다. 아무것도 허투루 하지 않는군.

“한데, 음.”

고모가 오스카를 쳐다봤다.

서로 얼굴이야 알지만, 오스카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을 거다.

왜냐면, 나도 처음이니까!

“많이 바쁠 텐데…. 리리스를 챙겨 줘서 고마워요.”

“아뇨, 뭐.”

고모는 쫙 빼입고 민망해하는 그를 보며 꽉 다문 입술을 씰룩였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 조카 선생님이 무척… 다정하시네…. 아! 그럼, 저 마차가.”

고모가 돌아보았다.

멀찍이 웅장한 사두마차와 화려한 옷을 입은 마부가 보였다.

‘저게 뭐람?’

나는 눈을 비비며 놀랐다.

“…타고 오신 마차인 모양이구나. 대체 누군가 했는데.”

마치 ‘내가 이 구역을 접수하러 왔다!’ 과시하려는 생각 만만인 마차.

저런 화려함은 처음 본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해 주셨는데, 네가 저걸 안 타면 조금 서운하겠어.”

“아니, 뭐. 전 괜찮습니다. 고모 왔으니까 넌 같이 가든가….”

은근히 놀리는 고모 때문에 오스카의 귀가 붉어졌다.

“후후, 아니에요. 리리스, 고모는 지금 바로 갈 거거든? 다들, 요 옆에 식당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으니까.”

먼저 걸음을 옮기며, 고모가 덧붙였다.

“넌, 기왕 선생님이 와 주셨으니 같이 귀가하려무나.”

“으으. 죄송해요, 고모. 괜히 저 때문에….”

“어머? 아니야. 귀부인들 쪽은 원래 내 소관이잖니.”

사업 얘기다.

4년 동안 제도는 많은 것이 변했는데, 혁명군은 각자의 위치에서 열 일 중이었다.

“오히려 오늘 살롱을 네게만 맡겨뒀던 게 미안하지.”

고모, 오르디아 앙트라세의 임무는 가문의 내실을 관리하는 귀부인들을 규합하는 것.

이미 장악해 둔 사교계를 이용해 고위 가문의 안주인들을 포섭하고 있다.

“꽤 힘들여 준비한 살롱이었는데 무색해질 뻔했어. 그나마 지금이라도 내가 수습할 수 있어 다행이지. 오늘 모인 귀부인들과는 따로 자리를 마련할 명분도 부족했는데, 아주 잘된 일이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고모는 빙긋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고는, 손을 잡아주었다.

“헤헤.”

뭔가 좋다. 고모가 이렇게 말해 주니 마음도 편해졌고, 또….

‘아빠랑 엄마랑 놀러 가는 것 같아!’

오른손엔 고모 손을, 왼손엔 오스카의 손을 잡고 팔랑거리며 걸어가던 그때.

“음?”

우리 앞을 누군가 불쑥 막아섰다.

키가 무척이나 큰 남자.

남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보이는 건 날카로운 턱선뿐이었다.

“뭐죠?”

고모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당신?”

오스카도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앞을 막은 무례한 태도에 두 사람 다 불쾌해 보였다.

‘와, 대박….’

아무래도 둘 다 이 남자를 못 알아본 것 같다.

나 빼고….

“아니, 으아아.”

이 상황이 웃긴지 로브 쓴 남자의 몸이 들썩였다.

못 살아, 내가.

남자는 쥐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불쑥 내밀었고 나는 어이없어져서 웃고 말았다.

“여긴 왜 왔어어….”

남자를 아는 듯한 내 중얼거림에 고모가 고개를 갸웃.

웃음을 터뜨리며 꽃을 받으려는데.

“……?”

오스카가 그걸 휙 낚아채 갔다.

그리고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며 말했다.

“너 뭔데! 이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연애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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