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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힘을 숨김 (147)화 (148/261)

씩씩거리는 오스카를 보며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아니, 눈썰미 없는 건 둘째 치고 웬 연애 타령이람.

“너 뭐 하는 놈이야.”

오스카는 나를 뒤로 보내고 건들거리며 로브 쓴 남자에게 물었다.

“뭐래! 스승님, 진정!”

나는 오스카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았다. 이건 내 거야!

“제가 스승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구 연애할 리가 없잖아요!”

“그치. 맞지.”

“…? 아니, 잠깐.”

듣고 있던 고모가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우리 조카가 사람 만나는데 마…, 아니, 선생님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나요?”

“그래야죠. 남자는 남자가 제일 잘 봅니다. 어디서 놈팡이 양아치 같은 놈 데려오면 어떡해요?”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모는 과한 간섭이 약간 언짢은 듯했지만, 오스카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말했다.

나와 남자는 중간에서 둘이 주고받는 걸 지켜보았다.

나는 한숨을, 남자는 로브가 자꾸 들썩이는 걸 보니 웃음을.

“고모, 이 사람 아―”

“일단, 선생님. 너무 무례하게 굴진 마시고요. 저, 내가 얼굴 좀 볼 수 있을까요?”

오스카와 입씨름하던 고모도 나를 막아서며 남자에게 말했다.

“어째 우리 리리스랑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 보이는데.”

“그러게요. 영 별로네. 다섯 살 위로 넘어가면 안 되지.”

오스카가 마치 촉새처럼 뒤에서 부추기자 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우리 리리스 의견을 존중하지만, 어른으로서 조언은 해 줄 수 있는 거니까.”

“맞는 말이죠. 역시 동생분보다는 훨씬 현명하시네.”

이게 진짜 뭐 하는 거람.

“으앙, 진짜! 얼른 얼굴 보여 줘! 지금 즐기고 있지?”

결국, 내가 못 참고 말하자.

남자가 로브를 살짝 들춰 우리에게만 얼굴을 내보였다.

“어머?”

“아, 뭐야!”

* * *

그 시각, 황궁.

서임식 연회가 한창인 그랜드 홀.

“체시어 제법인데? 저렇게 많은 레이디들을 쉴 새 없이 상대하다니.”

“넌 저게 상대하는 거로 보이냐?”

레이디들에게 둘러싸인 체시어를 보며, 테오와 레온이 주고받았다.

“그럼?”

“입 모양을 자세히 봐.”

레온이 체시어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5초 이상 입을 움직이는 일이 없어. 게다가 ‘예’랑 ‘아니오’밖에 쓰고 있지 않아.”

“뭐, 뭐?”

그랬다.

“저번 승전 행진 때 멀리서 뵈었어요. 전 플란츠 백작 가문의 로즈예요.”

“예.”

“저는 라우스 백작 가문의 이본느라고 해요. 기사님, 정식 서임 축하드려요.”

“예.”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민 레이디들에게 둘러싸인 체시어.

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저번 토벌전 때 이야기 해 주실래요? 경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아뇨.”

“…….”

이쯤 되면 듣는 레이디들이 불쾌할 만도 하건만.

“어머나, 역시 경께서는 생각했던 이미지랑 같으시네요. 어쩜 이리 과묵하고 우직하신지!”

“맞아요, 플란츠 영애. 남자가 말이 많으면 정말 별로죠. 특히나 기사님들은요.”

마냥 좋다고 까르르 웃는다.

‘집에 가고 싶다.’

체시어는 이들과의 대화가 정말 지루했다.

소년병 때 수도 없이 출정하면서 그가 전장에서 들은 것은 팔 할이 여자 얘기.

남자들이 왜 모이기만 하면 여자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는데….

난생처음 여자들이 많은 곳에 와 봐도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한테 문제가 있나.’

드레스 입은 돌멩이들이 번갈아 찾아와 말하는 것 같달까?

오늘 연회에 온 거의 모두와 인사했는데, 그 누구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겠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 주에 롯트 거리에서 하는 오페라 같이 보러 갈래요?”

붉은 머리가 아름다운 백작 영애, 로즈 플란츠가 과감하게 체시어의 팔뚝에 손을 대며 물었다.

“아뇨! 는 말구요. 저 서운해요. 용기 내서 말했는데.”

“…….”

잽싸게 선수 치는 로즈의 말에, “아뇨” 하려던 체시어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 거짓말했다.

“이미 봤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로즈가 민망해하며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그, 그거 다음 주에 처음 오픈하는 오페라인데…. 그걸, 음. 어떻게 벌써 보셨을까….”

“…….”

그때, 마침 체시어를 보러 온 악시온은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당황했다.

“레이디들, 잠시 아들과 얘기 좀.”

“어머! 악시온 경, 네.”

“호호호.”

부채를 탁 펼친 레이디들이 뺨을 붉히며 물러났다.

물론 지척이었다. 부자의 대화가 끝나면 다시 매처럼 체시어를 낚아챌 기세.

“저… 아버지.”

체시어는 기다렸다는 듯 악시온을 돌아봤다.

“어,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 집에 가고 싶다고 할 거지?”

“…….”

“그건 안 돼. 나도 가고 싶은데 너 때문에 남아있는 거야. 적어도 너는 연회 끝날 때까지 있어야지.”

악시온은 아들이 좀 안쓰러웠다.

‘레이디들을 상대하는 법, 뭐 그런 것도 따로 가르쳐야 하나? 아니, 근데 나도 그런 건 배운 적 없는데?’

생각해 보면 악시온 자신도 처음 사교계에 나왔을 때는 이랬다.

그냥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며 천천히 사회성과 대화 스킬을 습득했을 뿐이지.

‘친아들도 아닌데 왜 이런 것까지 닮아?’

악시온은 한숨과 함께 체시어의 어깨를 다독였다.

“거의 다 끝났으니 조금만 버텨.”

“…예.”

“마음에 드는 아가씨들은 없나? 이제 승전 연회도 매번 가야 할 텐데, 파트너를 둬야지.”

체시어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연인을 만들라는 게 아냐. 그냥 구색만 갖추라는 말이다. 파트너라도 없으면 너 오늘처럼 이렇게 쉴 새 없이 시달려야 해.”

생각해서 말해 줬건만, 체시어는 또 고개를 저었다.

“약속해서….”

“무슨 약속?”

“리리스가 데뷔탕트 무도회 때 제가 파트너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 그런데 그게 왜?”

“첫 파트너 자리를 저한테 주기로 했으니까. 저도 그 전에 리리스 말고 다른 사람이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요.”

“……?”

악시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가 뭐라는 거야. 파트너가 뭐 그리 큰 의미가 있다고.”

“…….”

“…이 자식 진심이네. 너, 걔 데뷔탕트까지 4년 넘게 남은 거 알고 하는 얘기야?”

물론 모를 리가 없을 테지.

아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있을 수많은 사교 활동을 파트너 한 명 없이 버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너 진짜!”

“그런데, 아저씨는요?”

체시어는 이어질 악시온의 잔소리를 예상하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에녹? 에녹은….”

다행히 악시온은 넘어왔다.

하지만.

“…미안하다. 갔다, 걔는. 이미 한참 전에.”

* * *

로브를 벗자 드러난 아빠 얼굴을 보고, 고모와 오스카가 놀랐다.

“아하하하! 공주우~!”

아빠는 웃으며 나를 잽싸게 안아 들고는 뺨에 뽀뽀했다.

“움~뫄!”

“아빠! 대체 여긴 왜 왔어?”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이람. 에녹, 애들 연회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얼굴은 비쳤으니까. 어차피 초반에만 좀 있다가 나와서 기다릴 생각이었거든요. 공주 살롱 끝나는 시간을 잘 몰라서….”

그 말은, 원래부터 데리러 올 생각이었단 거다.

“그럼 어제 말이라도 해 주지!”

“말하면 오지 말라고 했을 거잖아!”

“그치! 익명으로 열리는 살롱에 날 데리러 오면 어떡해!”

“에이, 봐줘. 그래서 이렇게 얼굴 가리고 몰래 왔잖아. 혹시 공주 친구 많이 사귀었으면 그냥 멀리서만 보고 집에 가려고 했어.”

말하던 아빠가 혀를 내둘렀다.

“와, 그런데 사람 생각은 다 똑같더라. 기다리고 있는데 귀부인들이 하나둘씩 오더라고. 아빠 엄청 당황했잖아.”

“응, 나도 놀랐어.”

“아빠는 얼굴 보이기가 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여기 누님이 오실 줄은 몰랐고.”

아빠가 오스카를 보며 풉,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 스승님이 이렇게 근사하게 차려입고 올 줄은 더더욱 몰랐네.”

“그러게. 나도 놀랐지 뭐니. 훤칠하니 보기 좋은데 앞으로도 이렇게 다녀요.”

“…….”

오스카는 놀리는 남매 사이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틀어버렸다.

“에녹, 난 아직 귀부인들과 일정이 안 끝나서 바로 가 봐야 해.”

“누님, 고생하십니다.”

“뭘. 나중에 보자. 선생님도 고생했어요. 우리 예쁜이, 조심히 들어가렴.”

내 뺨을 건드리며 인사한 고모가 급히 마차에 올라 떠나갔다.

“이야, 누가 알겠어? 마탑에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밖에 잘 나오지도 않는 마탑주가 이렇게 힘 잔뜩 주고 어린 아가씨들 살롱에 왔다고? 그 누구도 상상 못 할걸?”

“이봐요, 1절만 합시다.”

“아하하하! 공주는 돈 많은 스승님 있어서 좋겠네! 저 마차 봐라, 마차. 번쩍번쩍 빛나는 거.”

아빠는 나를 안으며 계속 놀렸다.

“공주야, 아빠 아무것도 안 먹고 와서 배고파. 공주 스승님한테 맛있는 저녁 사 달라고 하자.”

“앗? 좋아!”

나는 오스카에게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요! 아빠도 사 주실 거죠?”

“하아….”

“당연히 아빠도 사 주겠지. 우리 마탑주 있는 게 돈뿐인데 쌓아 놓고 쓰지도 않는걸.”

“저기요. 당신한테 쓰려고 쌓아둔 거 아니거든?”

오스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아빠가 나를 안은 채로 잽싸게 마차에 올랐다.

“나도 마차 좀 얻어 탄다! 비싼 거 먹어야쥐~!”

“으항항! 고기 먹자, 고기!”

“아하하! 좋아~!”

오스카는 주고받는 우리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 진짜! 왜 왔어, 저 인간!!!”

* * *

연회가 거의 끝나가는 저녁.

황제, 니콜라스의 방.

널찍한 창으로 비쳐 드는 달빛이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미남자의 탐스러운 금발 위로 내려앉았다.

“흐음.”

소파에 느긋이 기댄 니콜라스가 와인잔을 빙글, 흔들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체시어 리브르.

오늘 서임식에서 제대로 마주해 본 그의 눈빛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젊은 세대의 도스.

그는 곧 새 시대의 권력자가 될 터였다.

“폐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날카로운 눈빛의 중년 귀족 남성이 니콜라스를 찾아왔다.

“그래, 반갑네. 거기 앉게.”

니콜라스가 웃으며 맞았다.

남자는, 로저 오닉스 후작.

체시어 리브르의 친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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